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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132/199)

133화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왜 나를 파리온으로 이동시켜 준 걸까.’

생각과 동시에 지안은 거칠게 머리를 저었다. 알 게 뭔가. 이유가 뭐든, 이제 와선 알고 싶지 않다. 더 생각해 봤자 좋을 것도 없었다. 이어지려는 생각을 차단한 지안은 옷을 갈아입고 가발을 머리에 끼워 넣었다.

그러나 가발 착용이 낯선 탓에 기존의 머리카락을 가발 안으로 밀어 넣어 꼼꼼히 가리는 게 꽤 어려웠다. 어설프게나마 억지로 착용해 보았으나, 머리 크기에 비해 가발이 좀 작은 것 같았다. 두상의 문제라기보단 모발의 부피가 커서 거치적거렸다.

지안은 고민 끝에 짐꾸러미 속에서 공작의 것으로 보이는 단검을 찾아 꺼내 들었다. 머리카락을 한 뭉텅이씩 잡고 잘라내자 종이를 자르듯 머리칼이 잘려 나갔다.

거울을 보고 자른 게 아니라서 꼴이 꽤 엉망이겠지만, 상관없다. 머리카락을 대충 손질한 다음 다시 가발을 착용하자 그제야 머리카락이 제대로 감춰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꾹 눌러 쓴 지안은 표정 없는 얼굴로 여관을 나섰다.

할 수만 있다면 기사님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하다못해 시신이나마 건지러 다시 바다로 나가고 싶지만, 이제 와 그럴 순 없었다.

이제 그만, 파리온을 떠나 북부 홀런드로 향할 차례였다.

* * *

선실 안인데도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다. 몸을 웅크린 채 모포를 몇 겹이나 뒤집어썼는데도 발가락이 죄다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선실 안이 이러니 파도가 치는 바깥에선 아마 칼바람이 불 것이다. 그럼에도, 지안은 점점 더 극심해지는 추위가 기꺼웠다.

파리온에서 다시 북부까지 보름. 북부에서 얼어붙지 않는 항구는 홀런드밖에 없다. 하선하자마자 썰매를 타고 오데르겐령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가끔 항해 도중에 눈보라가 일기도 했고. 커다란 빙하를 피해서 빙 돌아가야 할 때도 있었지만……. 이만하면 큰 사건 사고 없이 평탄한 항해라고 한다. 직접 보거나 체감한 건 아니었다. 이마저도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의 말을 전해 들으며 유추한 것에 불과하다.

창문 하나 없는 선실에서 벗어나지 않은 지도 며칠. 어느 순간부터는 날짜 감각이 사라져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처음엔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날짜를 헤아려보기도 했지만, 열흘쯤 헤아렸을 무렵 잊어버렸다. 그래도 갈수록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 전해 들은 대로 항해가 순조롭긴 한 모양이었다. 그새 차가워진 손을 데우기 위해 지안은 일리아스가 남겨 두고 간 화로 가까이 두 손을 내밀었다.

그대로 양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온기에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선실의 문이 열리며 삼황자 전하가 나타났다. 얼음이 가득 들어 있는 대야를 지안의 발치에 내려놓은 일리아스는 곧바로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가끔 저런 식으로 그가 세숫물을 만들어준 적이 있었으므로 지안은 이번에도 그런 건가 싶어 잠자코 기다렸다. 다만, 이번엔 용도가 좀 달랐다.

“발 좀 내밀어 봐.”

“왜…….”

“내밀어 봐, 좀.”

망설이며 발을 내밀자 곧바로 신발과 양말이 벗겨졌다. 살갗을 드러낸 두 발은 멍이라도 든 것처럼 울긋불긋했다. 어디 부딪힌 적도 없는데 망치질이라도 당한 것 마냥 엉망이었다. 지안은 그제야 자신이 동상에 걸려 있었단 걸 깨달았다. 최근부터 좀 간지럽긴 했는데 이런 상태일 줄이야.

일리아스는 민망함으로 꼼지락대는 발을 붙잡으며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다.”

“……저도 몰랐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형편없을 정도로 까슬해진 목소리에 일리아스는 구겨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자다 말고 발을 침대 모서리에 비비는 걸 봤어.”

그렇게 말한 일리아스는 지안의 발을 끌어다 대야 속에 담갔다. 발끝에 온수가 닿자 지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발바닥이 온통 가렵고 간질거렸다. 그걸 본 일리아스는 손을 녹여주는 것으로 충분할 줄 알았던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덩달아 표정을 구겼다.

“넌 대체. 이렇게 되기 전에 말했어야지.”

타박하며 일리아스는 대야 속의 물을 성실히 덥혔다. 화로의 불을 조금 더 키워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선실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달라진 온도를 체감하며 지안은 물에 잠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몸을 녹이는 온기도 온기지만, 살뜰히 보살펴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아니, 너무 좋아서. 몸이 녹는 속도만큼이나 마음이 녹았다. 어릴 때 이후로 이렇게 보살펴진 게 얼마 만이더라.

이어진 일리아스의 목소리가 상념을 끊어 놓았다.

“육지가 보인다고 하더군.”

“육지.”

“그래. 곧 홀런드에 도착할 거야. 내리자마자 털신부터 사는 게 좋겠어.”

그 말에 지안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썰매부터 사요.”

“홀런드에서 오데르겐령까지 닷새는 더 걸려. 그리고, 고작 이런 가죽신을 신고 북부의 얼음산을 오르겠다는 거냐?”

“그러는 삼황자 전하도 가죽신 신으셨잖아요.”

“나는 너처럼 허약하지 않아. 체온 조절은 어릴 때부터 숨 쉬듯 해 왔어.”

“그래도. 한가하게 신발이나 사고 다닐 여유 없어요. 썰매랑, 썰매 끄는 개부터 사요. 하선하자마자 출발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약속했잖아.”

“조급한 건 알겠는데, 고집부리지 마. 신발이 먼저야. 이딴 구멍 난 모포 말고 제대로 된 털옷도 사야 하고. 로프, 손도끼, 털신 아래에 끼울 도구도 사야 해. 썰매개들 먹이도 구해야 하고.”

“…….”

“이해했어? 기대에 응해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바로 출발하진 않을 거야. 오데르겐령으로 향하는 건 준비가 끝난 다음이야. 북부의 기사들을 이끌고 제도를 떠났다는 이비엔의 행방도 수소문해 봐야 하고……. 그리고 다프탄데르 백작령에 아르킨의 소식도 전해야 해.”

하나하나 지적하는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얌전히 찌그러졌다. 마음은 저만치 앞서서 가는데 뭐 하나 아는 것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짐덩이가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그래서 더 서러웠다.

하지만 서러워할 새도 없이, 침울해진 코끝을 일리아스가 툭 건드렸다.

“너무 걱정 마. 보채지 않아도 늦지 않게 출발할 거니까. 그리고…… 혹시 괜찮으면 갑판 위로 나가볼래? 이 부근 해협은 무척 추워서 갈매기 같은 것도 없어. 선원들 말로는 간간이 나타나는 고래나 바다표범 말곤 아무것도 없다더군. 게다가 지금, 바깥 소란스러운 거 들리지? 마침 고래 무리가 지나가고 있다는데. 너만 좋다면 같이…….”

“싫어요.”

“지금이 아니면 못 볼 텐데도? 고래무리는 선원들도 보기 드문 구경거리라는데. 정말 안 나올 건가?”

“안 봐요.”

완강한 거절에 일리아스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김빠진 얼굴로 되돌아간 그는 지안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혀를 찼다.

“알았다. 고래 구경은 텄군.”

“……아쉬우면 가서 보고 오세요.”

“관심 없어. 너랑 같이 구경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한 일리아스는 뚱해진 얼굴로 화로 위에 주전자를 올렸다. 선실 안의 습도를 조절할 겸, 목이 잠긴 지안에게 뜨거운 차라도 좀 먹여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물이 끓을 즈음 악시온이 궤짝을 들고 나타났다.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궤짝이었다.

* * *

이멜다는 짜증스런 얼굴로 남부에서 올라온 서신을 불태웠다. 능력자들의 앞에서 성공적으로 가짜 성녀의 죽음을 선보인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이런 소식이라니. 어쩐지 성녀를 구심점으로 세력을 만들던 능력자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다 말고 다시 전열을 갖춘다 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리벳에서 성녀가 출현했다, 라…….”

그런데 정말 거기에 그녀가 있을까?

황녀는 곧장 북부로 향했지만, 삼황자와 공작은 북부로 향하다 말고 기수를 돌려 남부로 향했다. 추격조를 붙여놓은 덕분에 그들이 리벳에 들른 게 확인되었으니, 여기까지만 보면 성녀가 리벳에 출현했단 소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다만 거리가 거리인 탓에 정보의 정확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리벳은 거의 남부 끝에 위치한 영지라 황실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만일 성녀가 정말로 리벳에 있고 삼황자와 공작이 그녀와 무사히 조우한 거라면, 남부를 거점으로 삼은 뒤 소문을 퍼뜨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로선 능력자들이 리벳으로 모여들기만 해도 손쉽게 무력을 손에 넣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리벳에서 성녀가 출현했다는 소문이 제도를 뒤흔들기 전에 이 일을 처리해야 했다.

“마침 남부의 군주가 브리켄 공작가라 다행이군.”

중얼거린 이멜다는 곧바로 황태후 블레어를 떠올렸다. 손쉽게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대상이 가까이 있으니 말이나마 꺼내 볼 생각이었다. 시간이 나면 방문을 하라고 언질 받은 상태이기도 했고, 겸사겸사 몰래 황태후 폐하의 궁에 심어 둔 카리나의 얼굴도 보고 싶었다. 생각한 즉시 이멜다는 펜을 꺼내 서신을 작성한 후 밀봉했다.

“황태후 폐하를 만나 봬야겠다. 가서 폐하께 내가 오늘 저녁 찾아뵙겠노라고 전하렴.”

“네. 폐하.”

서신을 받아든 측근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가자 집무실은 곧바로 적막해졌다. 문밖의 기사들이 내는 인기척 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멜다는 답답한 구두를 벗어 던지고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알레인을 대신해 오전 내내 각 영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본 탓이었다. 그러나 잠시 쉴 틈도 없이. 빠르게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멜다는 곧바로 소음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알레인.’

국정을 자신에게 다 떠맡겨놓고 황성의 사냥터로 놀이 사냥을 떠난 그가 돌아왔다.

예상대로, 문이 열리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은 알레인이 나타났다.

“이멜다. 이거 봐!”

그가 내민 건 새하얀 여우였다. 정확하게 목덜미에 화살이 꽂힌 것을 보면 알레인의 실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는 척해 봐야 좋을 일 없으리라.

“어머, 축하드려요. 사냥에 성공하셨네요.”

“이 정도쯤이야. 널 위해서 잡았어.”

그렇게 말하며 알레인은 이멜다의 목에 여우의 사체를 둘러 주었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 이걸로 목도리나 숄을 만드는 게 좋겠어. 그렇지?”

잔뜩 들떠 있는 알레인의 모습에 이멜다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도리고 뭐고 당장 어깨에 둘러진 여우의 사체부터 치우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알레인이 싫어하겠지.

그대로 꼼짝없이 한 시간가량 알레인의 비위를 맞춰 주게 된 이멜다는 그가 돌아가고 나서야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평소에는 향기를 마시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던 홍차,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파운드 케이크를 앞에 두고도 여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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