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위치는, 아직입니까?”
대뜸 그렇게 물어온 사람은 공작이었다. 며칠 사이 수십 번도 더 들었던 말이라, 일리아스는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바람이 멎고 항구의 파도가 잠시 잠잠해지자 그 위로 상심한 공작의 얼굴이 비쳤다. 그의 두 눈은 해풍에 충혈되어 있었다. 거친 해풍이 눈을 할퀸 탓도 있겠지만, 며칠간 햇살이 출렁이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느라 눈이 상한 거다. 일반인이었다면 아마 시력이 크게 손상됐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 매일같이 항구를 지켰으니 저리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초췌한 얼굴을 하고서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바다를 응시했다.
새벽별이 바람에 흔들리며 빛나고, 다시금 철썩이기 시작한 파도가 흰 거품을 토해냈다. 부지런한 파리온의 뱃사람들이 항구에 하나둘 모여들 시간이었다. 지평선 인근에선 어선과 상선, 무역선이 간간이 윤곽을 드러냈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출항하려는 배들이 항구로 모여들거나 떠나길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리아스와 악시온은 후미에 파란색 칠을 한 배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철썩이는 파도가 만들어낸 물보라에 옷과 신발이 축축이 젖어 들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처럼 두 에스퍼가 자신의 가이드를 간절히 기다리는 동안, 바다는 다가오는 여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라색에서 남색으로, 다시 검은색으로 색을 바꾼 파도들이 살며시 어둠을 끌어안았다. 이제 밤하늘과 작별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 줄기 여명이 희미하게 파도를 장식한 순간. 일리아스는 그대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 * *
몸의 감각이 이상했다. 오랫동안 배를 타고 있다 말고 갑자기 대지에 발을 디딘 탓이었다. 땅 멀미를 하며 지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주황색 지붕을 얹은 석조 건물이었다. 바로 그 건물들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정박해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지안은 생각했다.
‘여긴 어디지?’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붙잡고 물어라도 볼 텐데. 날이 밝지 않은 탓에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한 거리에서 유일하게 들려오는 건 그간 지겹도록 들어왔던 파도 소리뿐.
물이 밀려들어 오고 빠져나가며 쏴아아― 하는 울림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사이사이로 끼룩거리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마을이라기보단 도시에 좀 더 가까운 규모. 2층 3층의 석조 건물. 하얀 돛을 달고 바다를 가르는 여러 척의 배. 그리고…… 피부에 닿아오는 친숙한 파장.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 없지만, 어쩌면, 어쩌면 여긴…….
“……파리온?”
작게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손가락 끝에서 불꽃이 팍! 소리를 내며 튀었다. 손끝을 감싼 불길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파장과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뜀박질 소리에 심장이 두근대며 뛰었다.
전신을 감싼 불길과 타오르는 두 손을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지안은 일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뒤돌아섰다.
멀리 거리의 끝에서 삼황자 전하와 공작님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지안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힘껏 발을 내디뎠다.
어쩌면 헛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능력자의 파장을 잘못 감지한 걸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 그렇게, 섣부른 희망을 경계하면서 희망을 향해 달렸다. 순식간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은 온몸을 던지듯 서로를 향해 달렸다. 때맞춰 바람이 등을 떠밀어 주었다. 지안은 순식간에 일리아스와 악시온의 품에 안겼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로 세 사람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 * *
악시온은 퉁퉁 부은 지안의 눈에 면포로 싼 얼음을 대고 찜질해 주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었으면서 아직도 더 울 일이 남았는지 지안은 연신 코를 훌쩍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돌아온 건지. 아르킨이라는 기사는 또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악시온은 차마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아직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었다.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우울과 좌절로 휘청거리는 지안을 느낄 수 있었다. 안도와 죄책감으로 얼룩진 채 오열하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분노였다.
그녀의 분노에 지목당한 게 자신이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 만큼 섬뜩한 증오심. 바로 그 격노가 일으키는 감정의 진폭에 자신마저 덩달아 휩쓸릴 정도였다. 맨땅에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 다만 이 지진은 대지가 아닌 지안의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중이다.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무엇이 그렇게 아픈지 물을 수가 없어서 위로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비틀거리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지, 무슨 말로 괴로움에 파묻힌 지안을 끄집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재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무겁지 않은 농담이나 흥미를 끌 이야기 하나 떠오르는 게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지안을 내버려둘 수도 없어서, 악시온은 고심 끝에 그간 궁금했으나 묻기를 주저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약간이라도 좋으니, 분노에 집중한 지안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고 싶었다.
“그대가 사는 세상에는, 말 없이도 달리는 마차가 있다고 했었지.”
“…….”
“사람들이 강철로 만든 새를 타고 하늘을 날고, 마법 없이도 언제 어디서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수단이 있다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말에 지안의 손가락 끝이 움찔 떨렸다. 잿더미 속에서 타다 남은 의지가 다시 움텄다. 악시온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선택한 주제였는데 정답인 모양이었다. 뒤이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지구란 곳에 가게 되면, 그대의 말대로 연예인이란 걸 해 볼까 한다.”
“……네?”
“노래는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지만…… 연습하겠다.”
그 말에 지안은 제 눈에 올려진 차가운 얼음 면포를 치워냈다. 이대로 간과하기엔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아니…. 가수가 되고 싶으셨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엔터…테이먼트? 그곳의 사람들이 내게 일을 줄 거라고 하지 않았나.”
“…제가요?”
일단 반문했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긴 했다. 얼굴이 잘났으니 연예기획사 사람들이 탐내며 몰려들 거라고. 가수를 하든 모델을 하든 다른 세상에서도 먹고 살 걱정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말이다.
가수가 뭐냐고 묻는 공작님에게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해 줬던 게 기억난다. 순식간에 난처해진 공작님의 얼굴을 보고 깔깔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지구에 가면 하기 싫어도 분명히 연예인을 하게 될 거라고 반 장난으로 장담했었다.
나는 왜 그런 말을 했나. 뒤늦은 부끄러움이 잠시 근심을 잊게 만들었다. 지안은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요. 반 농담이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믿고 계실 줄 몰랐어요.”
사실을 실토하자 기대에 찬 질문이 돌아왔다.
“그럼 혹시, 내가 할 만한 다른 일이…….”
“에스퍼시니 길드에 소속된 다음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하게 되겠죠. 그 전에 협회에 에스퍼 등록을 하고 등급도 부여받고 기본 교육 먼저 이수하셔야겠지만요. 굳이 비유하자면…… 용병 같은 거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하겠네요. 하지만 이곳의 용병들보다 훨씬 대우도 좋고, 굉장한 고수익이 보장돼요. 그래도 내키지 않으시면 딱히 에스퍼로 활동하지 않으셔도 괜찮고요. 왜냐면 제 앞으로 나오는 가이드 수당도 있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받은 보상금도…… 음. 아무튼 직업을 가지겠다거나 그런 부담은 갖지 마세요. 벌써부터 그런 걸 고민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것보단 지구에 적응부터 먼저 하는 게…….”
점점 활기를 띠어가는 목소리에 악시온은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지안의 말을 숙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삼황자가 돌아온 건 바로 그 때였다. 성급한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북부로 향하는 배편을 구했다. 오늘 오후 출항한다니 서두르지.”
그렇게 말한 일리아스의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가발과 모자가 들려 있었다. 성큼 걸어와 지안의 머리에 가발과 모자를 차례로 씌운 일리아스는 부루퉁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옷도 좀 사 왔어. 혹시 모르니 갈아입도록 해.”
그가 가져온 건 십 대 소년들이나 입을 법한 옷가지였다. 투박하고 조잡한 천에다가, 가죽으로 만든 조끼. 그러나 변장하기엔 좋은 복장이다. 나름 신경을 써서 골라온 착장이란 게 느껴졌다.
옷가지를 대충 몸에 대어 본 지안은 공작과 삼황자를 방 밖으로 내몰았다. 실컷 운 덕분인지 아니면 도중에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그런 건지, 잔뜩 들쑤셔진 화톳불 같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얼음찜질 덕분에 얼굴의 부기도 다소 가신 듯했다. 후유증이 남았는지 이마가 아직 뜨끈하긴 했지만…… 고작해야 두통일 뿐이다.
그래. 그만 옷을 갈아입고, 변장을 마친 후 북부행 배를 타고 떠는 거다. 배편도 구했다고 하지 않나.
너무 많은 방해를 받았고, 앞으로의 일도 그리 순탄하지 않을 테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다. 달리다 좀 넘어졌다고 그대로 앉은뱅이가 될 순 없는 일이다.
오래 주저앉아 있기엔 고지가 코앞이었다. 무엇보다 그 이동 능력자, 폭주는 하되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폭주가 죽음과 동일어란 걸 뻔히 아는데도 이런 생각이 들다니. 그야말로 코웃음 나는 가설이었다. 그러니 이 느낌은 단순한 착각일 것이다. 착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각인이 제대로 유지된 채였다면 그를 통해 에스퍼의 상태를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인위적으로 폭주시키며 각인을 절반 이상 파괴한 탓일까. 생사여부가 제대로 가늠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각인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일까? 희미하게나마 그가 살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고작해야 느낌이다. 짜증스럽고 신경에 거슬리지만, 이제 와 확인은 불가능했다.
당사자가 앞에 있다면 각인을 완전히 부숴서 이 찜찜한 기분을 해결해 버렸을 텐데. 물리적인 거리가 있으니 그럴 수도 없다.
뭐, 그도 이성이 있다면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보이는 즉시 남은 절반을 파괴해 버릴 테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