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이변은 없었다. 이멜다는 정해진 수순과 계획된 흐름에 호응하기 시작한 능력자들을 성실히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분노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걸 직감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기사가 내민 성녀의 시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즉위식 날에도 너희 능력자들이 성녀께 위해를 가하더니! 기어이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이는구나! 이분은 너희를 폭주에서 구하려고 하셨는데……. 독점욕을 이기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성녀님을 살해해? 범인을 색출해라! 바람의 이능력자가 행한 짓이 틀림없다!”
쐐기를 박듯 소리친 이멜다의 목소리가 아티팩트를 타고 비통히 울려 퍼졌다. 술렁이는 분위기에 이보다 더 좋은 전환점은 없었다.
이후로는, 몇 번 거짓으로 흐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비참함을 연기하며, 이멜다는 눈물에 젖은 눈동자로 여전히 충격에서 허우적거리는 능력자들을 응시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곧 범인을 찾아 찢어 죽이겠단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당분간은 그 누구도 저 분노를 잠재우거나 흐름을 뒤바꾸지 못할 터였다.
더는 이 연극에 가담하거나 지켜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이멜다는 성녀의 시신을 운구하는 척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시신을 은밀히 훼손시켜 둘 것을 명했다.
특히 훼손되어야 할 부위는 얼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참극을 맞았으나, 의심을 거두지 않은 자들은 기어이 시신의 얼굴이라도 확인하려 들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후처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성녀의 시신에 해를 가한 건, 미련을 거두지 못한 능력자의 만행으로 발표되리라.
* * *
‘넌 물고기 밥이 되는 게 좋겠어. 너한텐 그게 어울려.’
그렇게 살벌하게 말한 주제에, 언제 그런 말을 내뱉었냐는 듯 입술이 다시 맞닿아왔다. 아론은 지안이 홧김에 악담을 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게, 점막을 통해 전달되는 기운이 점점 더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기운은 몹시 강력했으나 전처럼 강제적으로 몸과 정신을 후려치지 않았다. 그런 단순한 힘의 행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이 맑게 깨어나고 감각이 충만해졌다. 심장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의 존재를 개별적으로, 생생히 감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뭔가 기막힌 일이 일어나기 직전이란 걸 아론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무척이나 이로운 일이 될 거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강줄기처럼 흘러든 기운이 마침내 전신을 채우자.
무언가가 심장에 새겨졌다. 아니, 어쩌면 영혼인지도 모른다.
“아……. 하하…….”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지안이 신체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혹은 영혼의 일부인 것 같기도 했다.
반드시 필요했던, 간절히 그리워했던, 그러나 필요로 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미처 알지 못했던 존재를 마침내 얻었다는 감격이 전신을 장악했다. 조금 전 접촉과 함께 흘러든 기운에 기대 허덕였던 것이, 닿아온 입맞춤에 흥분하고 만 것이 잠시 민망해질 정도였다.
마치 잃어버린 신체를 되찾은 것 같았다. 완전해진 기분이었고, 실제로 완벽했다. 그간의 삶이 눈과 손, 폐와 심장을 가지지 못한 불완전한 삶이었다는 것을 절절히 실감하며 아론은 어리둥절한 감동에 몸을 떨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경이로움이 가슴을 소란하게 만들었다.
정작 이 기적을 행사한 지안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아론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이능을 사용하건, 자신은 폭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 확신은 정확했다.
지안이 각인을 파괴하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으윽?”
각인의 파괴는 환희가 절망으로 변모해가는 과정과 꼭 닮아 있었다. 적어도 아론에겐 그랬다. 충족감과 안도, 감격 따위가 후두둑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천국의 한복판에서 순식간에 지옥의 문간으로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안은 거슬리는 벽지를 뜯어내듯 각인을 파괴했다.
각인을 하는 건 생각보다 더 쉽고 간편했는데, 파괴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감정을 배제한 채로 지안은 생각했다. 이건 ‘시간이 좀 걸리는 작업’이구나, 하고.
“자, 잠깐, 그만둬. 하지 마!”
놀라울 만큼 연약해진 아론의 목소리가 지안을 만류해 왔지만, 그게 그만둘 이유가 되진 못했다. 오히려 지안은 그 애원이 즐거웠다. 너도 이젠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겠지. 내가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했는지 이젠 알겠지.
“……제발. 하지 마. 내가… 헉. 내가…….”
그만둬. 내가 잘못했어. 내가 거짓말했어. 어떻게든 찾아올게. 죽지 않았다면 바다 어딘가에 있을 거야. 용암에 던져넣었단 건 거짓말이었어.
헐떡임과 함께 아론은 애원했다. 그 기사가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고. 그러나 돌아온 건 무섭도록 상냥한 냉소였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론의 말이 진실이란 건 지안도 알았다. 입으론 거짓말을 해도 파장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용암에 시신이 녹았을 거란 말이 거짓이란 것도, 처음부터 알았다. 알았지만, 악질적인 거짓과 비아냥에 모든 희망이 탈색되어 버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동 능력자인 그가 살아 있는 한, 이와 비슷한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거란 걸.
이제 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닌가? 중요한가? 기사님이 아직 살아 있다면 중요한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살아는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지안은 밤바다가 내보이는 거친 파도를 바라보았다. 살아 있더라도, 지금쯤이면 저체온증으로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미 바다에 가라앉은 채 영영 잠들었거나.
혹시나 하는 희망이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마음이 이미 지옥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냥 끝을 보고 싶었다. 이 악몽을 끝내고 싶었다.
“제발… 그만…….”
“늦었어.”
그 말에 실낱같은 가능성이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지안의 선택을 돌이킬 수 없으리란 사실을 안 것과 동시에 아론의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졌다. 고통스러운 전율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분명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지만,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서글펐다.
그녀는 성녀니까. 아닌 척해도 겉보기완 달리 무르고 연약하니까. 다정하고 평범한 마음을 가졌으니까. 거칠게 대응하고 화내도 날 죽이진 못할 거라고 여겼다. 왜 그렇게 여겼을까? 나는 왜 그렇게 오만했나.
뒤늦게 찾아온 후회의 실체를 확인하듯 아론은 울컥 피를 토했다. 절반 가까이 각인이 파괴된 여파였다. 컥컥거리며, 아론은 무표정한 지안의 얼굴을 두 눈에 담았다. 하얗게 표백된 얼굴은 색을 잃은 듯 창백했다.
저 얼굴로 웃기도 울기도 했던 것 같은데. 눈썹을 찡그리고, 미소를 짓고, 떨떠름해하며 눈을 굴리고, 입을 앙다무는 걸 보았었는데……. 그랬던 얼굴 위에 아무런 표정이 없다. 남은 건 분노조차 퇴색되어버린 눈빛뿐.
그리고 성녀를 저렇게 만든 건 자신이다.
늦었지만, 너무 늦어버렸지만, 그녀의 의지를 꺾어두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들을 지금이라도 정정하고 싶었다. 소유욕 같은 게 아니었다고. 그런 저열한 욕망으로 너를 원한 게 아니라고. 그걸 하필 지금 구별해 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하는 사과 따위, 절대로 받아주지 않겠지.’
생각하는 와중에도 각인의 붕괴가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신체 내부에서도 점진적으로 폭주가 진행되어 간다. 혈관이 파열되고, 뼈가 부스러지고, 폭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장기가 터져 나갔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선명히 다가온 죽음의 감각보다 지안에게 절대 용서받지 못하리란 사실이 조금 더 두려웠다.
‘후회가 이렇게나 두려운 것일 줄이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죽으면 잘못을 빌 기회도, 잘못을 만회할 기회도 모두 사라진다. 용서받지 못할까 봐 두렵다니. 아론으로선 그간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생소한 종류의 공포였다.
언제나 약자였던 적 없었고,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용서를 필요로 한 적이 없었다. 그간 저질러온 악행에 죄책감을 느낀 적도 없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는지. 바로잡을 수 있긴 한 건지. 그런 의문조차 들지 않을 만큼 비틀린 인생이었다.
이젠 안다. 결코 성녀의 근처에 얼씬도 해선 안 될 악한. 그게 자신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니까. 지금이라면 예전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론은 처음으로 지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지금 이 순간 가장 바라는 건 아마…….
생각을 마친 아론은 마지막 힘을 다해 이능을 발현시켰다. 폭주가 더욱더 앞당겨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간을 갈라 그 안에 지안을 떠밀어 넣었다. 각인이 파괴되는 와중이라 함께 이동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다.
* * *
일리아스는 초조한 얼굴로 바다를 노려보았다. 파리온의 항구를 지킨 지도 벌써 이틀째. 그는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서 지안의 기척이 느껴지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배를 구해 인근의 바다를 둘러보고 싶었다. 혹시나 엇갈릴까 봐 시도하진 못했지만…… 내일이 돼도 지안의 위치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배를 구할 예정이었다.
해류의 흐름에 따라 도착이 하루 이틀 늦어질 수 있단 걸 알고 있음에도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지안의 도착이 더뎌지는 거라면, 직접 바다에 나서서라도 그녀를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는 살면서 누군가를 이토록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기다림은 너무 가혹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걸, 일리아스는 새롭게 배워가는 중이었다.
지안이 아르킨과 함께 있단 걸 아는데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억지로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질 않았다. 잠든 사이 지안이 탄 배가 항구에 도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할 수 있는 게 기다리는 것밖에 없어서, 일리아스는 항구에 선 채로 기다렸다. 기다림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조바심을 억눌렀다. 지안을 만나기 전까진 마음 놓고 잠들지도, 뭘 먹지도 못할 것 같았다. 파리온에서 다시 만나자던, 기쁨과 다급함이 뒤섞인 지안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반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