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못을 박듯 거친 말이었다. 타협의 여지는 없다. 그런 그를 설득하는 건 지느러미가 잘린 상어에게 이전처럼 헤엄쳐 보라 종용하는 것과 같았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여지가 있는지 살피는 것도, 지금의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도, 더는 하고 싶지 않다.
흔들리는 배 위에 우두커니 선 채로 지안은 가슴 속의 뭔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아론.”
“왜.”
“넌 물고기 밥이 되는 게 좋겠어.”
협박이나 위협이라기엔 목소리가 무척이나 상냥했다. 지안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또한 실바람처럼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저런 얼굴로 무슨 짓을 해 올지 어떻게 아는가? 일전에 그랬듯 특유의 능력으로 몸을 꿰뚫거나 자신을 홀려 놓을 게 분명했다. 아론은 그에 대비하기 위해 잔뜩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당장 능력을 사용해 인근의 배로 피신할 생각이었다. 정 안 되면 잠시 바다에 몸을 담그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옷이 좀 젖기는 하겠으나 그쯤이야 아주 사소한 낭패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예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그마한 조짐조차 없었다. 전신을 감싸 안은 기운은 담요처럼 포근하기만 했고,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이미 가까운 거리가, 점점 더 밀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봐, 잠깐…….”
한없이 무해하게 접근해온 지안을, 아론은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바짝 다가온 것을 뜬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도무지 제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사이 얼굴을 더듬던 손길은 턱을 스치며 목덜미로,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론은 흔들리는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성녀가 더없이 친밀한 자세로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채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쯤 되자 그는 본능적으로 지안이 이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 알아차렸다. 입을 맞추려는 거다. 그때처럼 날 기절시키려고. 순순히 당해줄 순 없으니 지금이라도 떼어놓아야 했다. 물리적인 거리를 둬야 했다.
하지만…… 그땐 방심해서 그랬던 거고,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지 않나?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갈등하는 사이, 느릿하게 입술이 닿아왔다. 훅 끼쳐오는 체취와 함께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깨물리고, 입 안으로 말캉한 살덩이가 침범해 들어왔다. 약 올리듯 입천장을 톡톡 두드린 혀가 스치듯 윗입술을 핥았다.
감질나는 입맞춤이었다.
질 나쁘고 위험한 장난질보다 더 유혹적이었다. 한차례 타액이 오갔는데도, 점차 호흡이 가빠지는데도 부족했다.
아론은 그제야 자신이 자만했음을 깨달았다. 적당히 멈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입을 맞추고 있는데도 부족했다. 만족할 수 없었다. 호흡과 타액을 삼키면 삼킬수록 애가 타다 못해 절절 끓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차 하는 사이 기절하거나 제압당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걸 아는데도 입술을 떼고 싶지 않았다. 와중에 지안의 혀 놀림이 너무 능수능란해 약이 올랐다. 아니, 화가 났다. 하지만 그 화를 표출할 여유가 없었다.
아론은 점막을 통해 전달되는 가이딩을 허덕이며 받아먹었다. 점점 더 고조되는 고양감에 잔뜩 흥분한 채 몸을 떨었다. 처음 설탕을 맛본 아이처럼 감동했다. 아낌없이 쏟아지는 기운에 기분이 붕 뜨고 전신이 뜨거웠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그녀에게 더 닿고 싶었다. 이대로 끌어안은 채 뒹굴고 싶다. 한껏 치솟은 욕망을 거리낄 이유가 없어, 아론은 지안을 달랑 들어 안은 채 선실로 향했다. 그 탓에 잠시 입술이 떨어졌으나, 그 순간에도 아론은 지안의 목덜미를 찾아 지분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작은 선실 안에 쉴 틈 없이 살갗을 물고 빠는 소리가 선정적으로 울렸다. 그쯤 되자 아론은 자신이 멈출 수 없으리란 걸 깨달았다. 멈추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간신히 마지막 이성을 붙든 아론은 지안이 울고 있는 게 아니길 바라며 시선을 맞췄다. 다행스럽게도 지안은 전혀 울상이 아니었다. 잔뜩 달아오른 분위기에 어울리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다음 순간 무엇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대로 지안의 로브에 손을 뻗은 아론은, 침으로 반질거리는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걸 목격했다. 바로 그 입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어냈다.
“너한텐 그게 어울려.”
제동을 걸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한껏 숨이 가빠진 자신과 달리 조금도 호흡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로, 지안은 그렇게 말했다.
‘어울린다니, 무엇이?’
반사적으로 생각한 아론은, 지안이 좀 전에 했던 말을 곧 기억해 냈다.
넌 물고기 밥이 되는 게 좋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 * *
이멜다는 싱긋 웃으며 성녀로 분장한 하녀를 다독였다. 보상에 눈이 멀어 덜컥 대역을 수락할 땐 언제고, 막상 대중 앞에 나서려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흐음. 표정을 좀 수습하는 게 좋겠는데……. 긴장돼서 그러니?”
“그게, 네.”
“하긴, 대중의 시선 앞에 서는 건 힘든 일이지.”
짐짓 공감하는 얼굴로 하녀의 양어깨를 주물러 준 이멜다는 다정한 낯을 가장하며 삐뚤어진 베일을 고쳐 주었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다. 황성 직속 기사들이 널 호위할 테고, 능력자들은 멀리 성벽 너머에서 널 올려다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말이야. 나가서 손 좀 흔들어 주고, 내일 중앙 신전에서 폭주로 고통받는 능력자들을 축복하겠다고. 그렇게만 말하면 돼. 대본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다.”
“네. 폐하.”
공손한 대답에 이멜다는 드레스의 브로치를 떼어내 하녀의 가슴팍에 달아 주었다.
“뭐든 처음은 어렵지. 하지만 막상 해 보면 네 생각보다 훨씬 더 간단한 일이란 걸 알게 될 거야. 다만 기억하렴. 너는 내 명령을 수행하기 이전에, 에다의 성녀를 돕는 거야. 실수가 있어선 안 돼.”
당부를 마친 이멜다는 하녀의 가슴에 매달린 브로치를 가리켜 보였다.
“연설을 잘 마무리하면 그 브로치는 네게 주마.”
“가, 감사합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좋아하는 하녀의 모습을 이멜다는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자신이라고 기꺼운 마음으로 죄 없는 하녀를 죽음으로 떠미는 건 아니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 사감은 없다.
말하자면 이 하녀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불운했을 뿐이다. 하필 성녀와 비슷한 외모를 타고났으니 말이다. 처음엔 분위기가 다소 비슷하다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마법 약으로 눈동자를 바꾼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달라졌다. 거기에 화장을 더하니 눈썰미 좋은 자들도 속아 넘어갈 만큼 성녀와 닮아 있었다.
만약 성녀가 사교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다면 이런 눈속임은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간 공작이 그녀를 극도로 싸고돌아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대내외적으로 성녀의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나마 이 변장을 간파할 수 있는 건 삼황자나 황녀 전하뿐인데, 하나는 반역자로 전락했고, 다른 하나는 손잡을 수 없는 배신자가 되어 떠났다. 치워내야 할 걸림돌이 사라진 덕분에 연출은 몹시 간단해졌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주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황실을 향한 능력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방법 중 어렵고 힘든 것과 쉽고 간단한 것이 있다면, 당연히 쉽고 간단한 쪽을 택하는 게 낫지 않나.
이멜다라고 진짜 성녀를, 지안을 찾아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 있는지 모를 성녀를 찾아내기 위해선 적절한 시간이 필요했다. 조사와 추적, 억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허비되는 것이다.
그리고 능력자들에겐 그 시간을 인내할 힘이 없었다. 그들은 너무 과열되어 있었고, 언제든 실재하는 위협으로 돌변할 수 있었다.
갈등이 격화되는 일을 피하려면, 압력을 제때 터뜨려야 하는 법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희생양이 필요했다. 애꿎은 충돌로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입는 것보단, 단 한 명이 피를 흘리는 게 효율 면에서도 더 좋지 않나.
합리화를 마친 이멜다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벽 위로 오르는 하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인내심이 다한 제도의 능력자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은 그녀가 조그만 목소리로 거짓 축복을 약속하는 것을 들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내일, 제가 신전에서 모두를 축복할 것을…… 야, 약속드리…….”
아티팩트로 음량을 증폭시켜 크게 울려 퍼지던 음성은,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황성의 외벽을 타고 오른 일단의 능력자 무리에 의해 멈추고 말았다.
“난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 지금 당장 축복을 해 달라고!”
“나도 그래! 당장 오늘 밤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일은 무슨 내일이야! 난 폭주하고 싶지 않아. 죽기 싫다고!”
준비된 대사가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때로는 진실보다 거짓이 더 큰 힘을 가진다고 했던가. 바람잡이의 호소력 넘치는 말에 능력자들이 너도나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술렁임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다.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한 하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뭐라고 입을 열려던 순간, 기사로 변장한 바람의 이능력자가 성녀로 분한 하녀의 목을 갈랐다.
“……!”
허공에 피 분수가 쏟아지자, 술렁대면서도 기대감을 어렵사리 누르며 성녀를 올려다보던 능력자들은 모두 제 눈을 의심하며 경악했다. 이멜다는 이를 찬찬히 지켜보았다. 목 졸린 소리를 낸 하녀가 마침내 쓰러지는 것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붉은 피가 성벽을 타고 흘렀다.
“누가! 누가 이런 짓을!”
“성녀님!”
지시받은 대로 비통한 목소리를 낸 기사들은 곧 성벽 아래의 능력자들 중에 범인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외쳤다.
이능의 사용 거리는 개인마다 제각각이고, 사용 순간은 대개 은밀하기 마련이다. 특히 바람의 이능력자들이 다루는 칼바람은 대응이 너무 까다로워 같은 능력자끼리도 꺼리는 힘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능력이 날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충격에 빠진 능력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상황을 부정하는 자도 있고, 의심하는 자도 있었으며, 개중에 몇몇은 우리 중에 혹시 치유 능력자는 없느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설사 치유 능력자가 있다고 해도. 숨이 끊어진 사람을 되살릴 순 없는 노릇이다. 성녀의 죽음이 실시간으로 확실시되자, 얼마 안 가 폭발적인 혼란이 모든 걸 장악했다. 집단이 일시에 좌절하며 만들어낸 무질서는 빠르게 폭력의 얼굴로 바뀌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