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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128/199)

129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지안은 황망히 갑판을 둘러보았다. 아르킨의 파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걸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흔들리는 배를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주변은 사람의 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기사님은 어디 있지? 늘 갑판에서 항로를 살피던 선주는 어디로 간 거야?’

철썩!

때맞춰 인 큰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뱃전을 때렸다. 창백해진 지안의 뺨 위로 바닷물이 튀고, 옷이 젖었다. 배가 크게 출렁였다. 동시에 무언가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음의 방향을 따라 돌아본 지안은 갑판을 구르는 그레브의 머리를 보고서 선 채로 굳어 버렸다.

비극은 비극을 부르고, 불운은 연달아 찾아온다고 했던가. 구름에서 벗어난 달무리가 갑판 위를 비추자, 왜 이제야 발견한 건지 모를 머리 잃은 시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악몽이 고스란히 현실에 재현된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했다.

“아….”

비틀거리며 선실의 문간에 주저앉은 지안은 양손으로 꾹 입술을 눌러 막았다. 희미한 별빛이 눈을 부릅뜬 그녀의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더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기사님은 사라졌고, 선주는 살해당했다. 멀쩡히 살아 있는 건 나뿐이다.

그것을 인정한 순간, 전날 밤 아르킨과 나누었던 대화가 지안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재생됐다.

‘내일 저녁이면 파리온에 도착한다는군요. 항구에 도착하면 그땐 좀 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삼황자 전하도 거기 계시겠죠?’

‘리벳과 파리온은 서로 거리가 가까워 이틀이면 왕래할 수 있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분명 먼저 도착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얼마나 안도했던가. 그래서인지, 다음의 말이 너무도 쉽게 나왔다.

‘기사님. 혹시 괜찮으시면,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실래요?’

‘어디로 말입니까?’

‘제 고향으로요.’

‘…제가 동행하길 바라십니까?’

‘그럼요. 제 은인이신걸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냔 듯, 부족한 쾌활함을 모조리 끌어와 대답했다. 그리고 은근히 방사 가이딩까지 펼쳐가며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렸다.

‘당신도 제게 그렇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서 가장 먼저 느낀 건 감격이었다. 다음 순간 몰려온 건 수치심이었다. 에스퍼인 그에게 내 의사를 멋대로 강요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과, 기꺼이 그러겠노라 답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 한 곳에서 엉망으로 뭉개지고 뭉쳐졌다.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경계가 다 허물어질 만큼 사려 깊은 대답이었다. 심지어 그는 고향이 어딘지, 언제까지 동행하길 바라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전날 밤만 해도 분명히 함께 있었던 기사님은 더 이상 여기 없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서둘러 감각을 예민하게 확장해 보았으나 희미한 파장 하나 감지되지 않는다.

이윽고 지안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살해, 당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갑판 위의 시체가 큰 역할을 했다. 평범한 뱃사람도 저리 무참히 죽여 버리는데, 이능력자인 기사를 살려두었을 리 없다.

그래. 죽었다면 파장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지안은 주저앉은 그대로 잠시 넋을 놓았다. 좋은 일 뒤에는 항상 나쁜 일이 있으니 알아서 조심했어야 했는데. 일이 잘 풀리는 걸 보고 마음을 놓았다. 무방비한 채 안심해 버렸다.

허탈하다 못해 황망했고, 황망이 지나쳐 슬펐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오려 했다. 선주가 죽고 기사님이 살해당하는 동안 난 대체 뭘 한 거람. 무시무시한 죄책감에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지안을 일깨운 건 그녀를 뒤따라 선잠에서 깨어난 아론이었다. 몇 시간에 이르는 접촉 가이딩으로 기운을 되찾은 그는 답지 않게 쭈뼛쭈뼛한 태도로 지안에게 접근했다.

아론이 그처럼 조심한 건, 뒷모습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지안 때문이었다.

배 위에 내려서면서 이런 순간을 상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울고 화내며 소리치는 지안의 모습을 왜 떠올리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어떤 예상은 때때로 예상에서 빗겨나가는 법이다. 눈앞의 성녀는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기척을 느끼고서 비틀거리며 일어나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아론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돌아선 지안을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 창백한 신색. 한 톨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눈동자. 성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것마냥, 고요한 분위기를 흰 눈처럼 덮고 있었다.

불같이 화를 냈다면 오히려 안심했을 텐데. 비난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면 내심 안도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차라리 화를 내.”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아론은 자신이 겁에 질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몹시 이상한 깨달음이었다. 죽음도, 언젠가 맞이할 폭주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내가, 고작해야 가슴께에나 올 법한 여자의 미움을 사는 걸 두려워하게 되다니.

하지만 그게 진실이었다. 생소한 공포에 몸과 마음이 절로 위축되고 움츠러들었다. 어른을 앞에 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런 아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지안이 말했다.

“시체가 하나뿐이던데.”

“…….”

“기사님은 어디 있어? 바다에 빠뜨렸나?”

정답이다. 아론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침묵했다. 비난조차 어리지 않은 목소리에 설익은 안도감이 든 것이다. 이에 힘입어 다소 여유를 찾자, 기다렸단 듯 반발심이 찾아들었다. 아무리 성녀라지만 이런 조그만 여자에게 압도당하다니… 대체 난 뭘 두려워한 거지?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도 전에, 명령에 가까운 지시가 떨어졌다.

“시신이라도 다시 건져 와.”

“어차피 죽은 거 시신은 뭣 하러…….”

“건져 와.”

강압적인 말에 쪼그라든 마음이 슬며시 부풀었다. 두려움을 물리친 건 질투, 혹은 불만이었다. 아론은 으득― 이를 갈았다.

“몸뚱이라도 되찾고 싶을 만큼 그놈이 좋나?”

“너랑은 달리, 좋아하지 않는 게 힘들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었어.”

“하! 그래서? 좋아하기라도 했나?”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 없이 날 도와주었고,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큼 반듯하고 선량했어. 그런 사람을 물고기 밥이 되도록 내버려둘 순 없어.”

그 말에 아론은 제 심사가 험악하게 뒤틀리는 걸 느껴야 했다. 못마땅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만큼 속이 꼬여 들었다. 그녀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단 걸 뻔히 아는데도…… 순순히 저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마침 좋은 거짓말이 떠올라 아론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내뱉었다.

“소용없어.”

“소용없다니?”

“되도록 확실하게 치워 버리고 싶어서 용암에 던져 넣었거든.”

“…….”

“확신하는데, 지금쯤이면 뼛조각도 남지 않고 죄다 타 버렸을 거다. 그러니 시신을 찾는 건 포기해.”

태연히 주절거리며 아론은 주의 깊게 지안을 살폈다. 이번에야말로 뭐라도 반응이 돌아올 터였다.

그러나 되돌아온 건 “그래? 그렇구나.” 하는 재미없는 대답뿐이었다. 분노나 저항의 기색은 없었다. 감정을 극도로 절약하기라도 한 듯 일견 단조로운 태도에 아론은 천천히 긴장을 내려놓았다.

현실에서 도피라도 한 것마냥 무기력한 태도를 보아하니…… 드디어 포기를 배운 걸지도. 실제로 아론의 눈에 비친 지안은 몹시 무기력해 보였다. 무언가를 할 의사도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바로 그 얼굴 위로 선명히 드러나 보이는 상심의 기색에 다소 신경질이 났지만, 빠른 수긍만은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대충 꺼내든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는 순진함이 우습고 신기했다.

“날 어디로 데려갈 셈이야?”

자포자기한 듯한 물음에 희열과 만족감이 번갈아 차올랐다. 비릿하게 웃어 보인 아론은 흔쾌히 계획하고 있던 것을 털어놓았다.

“이왕 배를 탔으니 이대로 도망쳐야지. 배편으로 보름쯤 걸리는 거리에 키마라스라는 작은 섬나라가 있다.”

“섬나라?”

“그래. 뱃사람을 하나 구해 와서 그곳으로 향할 생각이야.”

“왜?”

“거기라면 삼황자도 더 이상 너와 나를 추격해오지 못할 테니까. 혹시 바다를 건너오려 한대도 나라면 언제든 다시 돌려보낼 수 있어. 여차하면 그 기사처럼 용암이 끓는 화산에 처넣어도 될 일이고.”

“허세 부리지 마.”

“허세?”

지안의 눈동자가 아론을 파헤치듯 응시했다.

“할 수 있으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네 이능은 전하께 통하지 않아. 상성이 좋지 않으니까. 전하가 스스로를 불로 감싸고 있으면 아무 소용…….”

“아. 하하. 그렇긴 하지. 하지만 배 위에서도 그럴 순 없는 노릇이잖아? 강철로 만들어진 배라면 또 모를까. 그는 바다를 건널 수 없어. 절대로.”

쾌활한 웃음과 함께 시작한 말을 협박으로 끝마친 아론은 지안에게 바짝 다가가 붙었다.

“이제 내게서 도망치려 시도하는 건 그만두지 그래. 해 봐서 알잖아? 넌 뭘 어떻게 해도 내게서 못 벗어나.”

그 말에 지안의 입술이 달싹였다.

“……있잖아.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얼핏 호소처럼 들려오는 질문에 아론은 잠시 의기양양했다. 그러느라 그는 질문에 담겨 있는 것이 두려움이나 애걸이 아닌, 순수한 궁금증이란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차분한 지안의 물음이 이어졌다.

“살고 싶어서 그래? 아니면 폭주가 두려워서? 그런 거라면 살려 줄게. 폭주하지 않도록 만들어 줄게. 대신 날 북부로 데려다줘. 지금이라도 파리온으로 가서 삼황자 전하와, 공작님과 합류하면…….”

“푸핫!”

터져 나온 비웃음이 지안의 말을 끊었다.

“아, 정말. 자꾸 헛소리를 하는데……. 난 그냥 널 가지고 싶은 것뿐이야.”

“…….”

“그리고 네가 뭐라고 나와 협상을 하려 들지? 그새 잊었나 본데. 애초에 널 구입하려 한 건 나였어. 기억 안 나나? 노예 경매장에서 내가 널 샀잖아.”

“……그랬지.”

“알았으면 되지도 않는 고집은 그만 부리고, 포기해. 넌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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