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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127/199)

128화

한데 예상과 달리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알레인이 아니었다.

“황태후 폐하.”

“오랜만이로구나 이멜다.”

반갑게 웃어 보인 황태후가 말했다.

“모처럼 함께 후원이나 둘러볼까 해서 들렀는데……. 시간을 좀 내어 줄 수 있겠니?”

황태후의 말에 이멜다는 곧장 숄을 두르고 자리를 옮겼다.

한때 든든한 방패이자 유사시의 도피처 노릇을 톡톡히 해 주었던 황태후의 얼굴은 고작 며칠 사이 크게 상해 있었다. 희끗희끗한 흰 머리가 부쩍 늘어나 보이는 것 역시 착각이 아닐 것이다. 폐하가 정체 모를 능력자에게 시해당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멜다는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황태후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정체 모를 능력자에게 시해당한 황제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젊은 날의 인생을 통째로 바쳐 이룩한 성공 그 자체였다. 뿐인가. 카디스는 자신의 아들이기 이전에 제국의 황제였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잃어선 안 될, 테리온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아들을 잃은 복수를, 그녀는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자신은 너무 나이 들었고 노쇠했다. 이제 테리온의 황제는 손자인 알레인이었고, 새로운 황후는 이멜다였다.

한때는 브리켄의 공녀였고, 테리온의 지고한 황후였으며, 황태후로서 오랫동안 영예를 누려왔다 한들, 이제 와 이런 게 무슨 소용인가? 블레어는 회한에 찬 얼굴로 이멜다를 돌아보았다.

“때가 되면 네가 이 후원의 주인이 될 거라 믿었단다.”

“……폐하.”

“능력자들이 일으킨 크고 작은 소요사태를 처리하느라 바쁘다 들었지만, 궁금한 것도 있고. 황성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진 않은지 묻고 싶어서 말이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편안히 지내고 있어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근황을 묻는 물음이 다정했으나 이멜다는 슬며시 긴장해야 했다. 황실 후원의 주인은 아직 눈앞의 황태후 폐하셨다. 불의의 사고로 황후 폐하가 목숨을 잃은 후, 황성의 실질적인 안살림은 모두 황태후 폐하가 도맡아 진행해 왔다.

그간 살갑게 굴며 쌓아온 친분을 생각하면 큰 마찰 없이 황태후 폐하에게서 황실의 권한을 위임받을 수 있을 것이나……. 그 시기가 언제일지는 황태후 폐하의 의사에 달려 있었다. 그런 만큼, 아무리 이멜다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변은 없을 거야.’

그도 그럴 게, 황태후 폐하는 그간 자신에게 아낌없는 지지와 보살핌을 제공해준 황실의 웃어른이었다. 무엇보다 폐하는 자신을 무척 아끼셨다. 권한의 이양은 서로를 존중하며,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이른바 계승이다. 조심스레 이를 예견하는 이멜다에게 황태후가 말했다.

“이멜다. 혹시 기억하니? 카디스를 해친 진범을 찾아내겠다고 내게 약속했었지.”

그런 약속, 한 적 없다. 하지만 자신을 대신해 이런 약속을 남발할 사람이 한 명 있긴 했다. 알레인 테리온.

폐하가 시해당하고 황태후 폐하가 쓰러진 당일, 그와 함께 황태후 폐하의 병문안을 갔었다. 삼황자의 탈출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지 못했던 자신과 달리, 그는 그날 밤 내내 황태후 폐하의 방을 지켰다. 진범을 찾아내겠단 약속은 아마……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루어진 것이리라.

“조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니.”

“……죄송합니다.”

“이런, 죄송할 것 없다. 최근 성녀가 사라진 일로 제도가 시끄럽다지? 네가 이를 처리할 방안을 마련하느라 바쁘단 걸 나 역시 알고 있단다. 다만, 일리아스에게 죄를 씌우는 걸 용인하고 알레인의 즉위를 도운 건…… 범인을 찾겠다고 내게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란 걸 잊지 말렴.”

“…….”

“늦어지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진범을 찾아내지 못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굳이 말하자면, 네가 에를랑겐 후작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란다.”

넌지시 건네지는 말에 이멜다는 잘끈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황태후 폐하는 그간 아낌없는 비호를 제공해 준 은인이었다. 곤경에 처한 어린 자신을 보살피고 가르친 선생이기도 했다. 바로 그렇기에…… 어떤 면에선 돌아가신 전 황제 폐하보다 더 어렵고 무서운 분이셨다.

단순히 그녀가 황실의 웃어른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간 황태후 폐하가 어떻게 전 황제 폐하를 제위에 올렸는지 내내 들으며 성장해온 탓이 컸다. 어린아이가 들어도 좋을 만큼 핏기를 지워낸 이야기였으나, 그것들은 대개 현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동화였다. 그래서 더욱 잔혹했다.

이를 상기한 이멜다는 마른침을 삼켰다.

황태후 폐하의 치마폭에 싸인 채 들었던 이야기들은 모두 생생한 교훈이 되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승리를 향한 계획을 세우는 법도, 수십 개의 방안과 대안으로 대세의 흐름을 바꾸는 법도 모두 그녀에게서 배웠다.

그렇기에 이 경고를, 이멜다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탓일까. 그녀는 순간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그것을 본 블레어가 빙긋 미소 지었다.

“내가 본의 아니게 네게 부담을 준 모양이다.”

“부담이라니요.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심려 마세요. 반드시 시해범을 찾겠습니다.”

“안심이구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믿지 않았을 거다. 약속, 장담, 맹세……. 다들 손쉽게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내뱉곤 하지. 하지만 네가 하는 말은 달라. 넌 내가 보살핀 영애들 중 단연 최고란다. 이비엔은 타고난 혈통 탓에 욕심이 부족했고, 알스페트 후작가의 차녀는 그닥 영민하지 않았지. 반면, 너는 늘 갈망하는 것이 있었어. 그리고 이젠 바라던 것들을 모두 손에 넣었구나.”

“과찬이세요. 모두 폐하의 지지와 은혜 덕분인 것을요.”

“조만간 내 궁으로 찾아오렴. 슬슬 네게 황실의 보석을 물려주어야 할 것 같으니. 그리고…… 기억하렴, 이멜다. 나는 알레인이 아닌 널 믿는다.”

“기대에 부응하겠어요. 실망하시는 일 없을 겁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블레어는 손을 뻗어 이멜다의 어깨를 토닥였다. 언제나 그렇듯 상냥한 접촉이었으나 평소와 달랐다.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격노가 눈에 보일 듯 생생했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모든 순간을 분노에 쏟아부을 순 없는 일. 이멜다는 황태후의 분노가 천천히 사그라드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십여 분이 지나자, 황태후 폐하는 순식간에 상심과 회한에 허덕이는 일개 노부인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본인의 입맛에 맞춰 사교계의 실세들을 움직였던, 한때 경이와 존경을 담아 바라보았던 황성의 오랜 실세는 더 이상 없었다. 몸과 마음이 크게 상한 노년의 여인이 있을 뿐이었다.

지친 얼굴을 한 블레어가 돌아가자, 이멜다는 카리나를 잠시 그녀의 궁에 보내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후원을 빠져나갔다. 카리나의 정체를 숨긴 채 황태후 폐하의 궁에 하녀로 심어두면 언제든지 황태후 폐하의 건강을 즉각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레인이 황제로서 제대로 된 권위를 내세웠다면 굳이 이럴 필요 없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전 황제 폐하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초라한 권세가에 불과하다. 반면 여러 귀족가를 위시하던 브리켄 공작가 출신의 황태후 폐하는 황실의 권위를 유지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선은…… 해야 할 일부터 마치도록 할까.”

그래. 전 황제 폐하의 시해범을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은 가짜 성녀로 분장시켜 둔 여자가 정해진 장소에서 제때 죽음을 맞이하도록 무대를 올려야 했다.

많은 목격자를 필요로 하는 만큼, 이 연극의 장소는 황성의 외벽이었다. 성녀가 모습을 드러내고, 기대감이 고조되면 예정된 비극이 일어날 것이다.

진짜 성녀의 행방과 시해범은…… 이후에 찾아도 늦지 않으리라.

* * *

뱃전에 철썩이며 달라붙은 파도 소리가 천천히 잠을 깨웠다. 지안은 어렴풋이 깨어난 상태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가물거리는 시야로 어두컴컴한 선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잠기운을 털어내지 못한 의식이 곧 꺼져버릴 전구처럼 깜빡거렸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쉬이 잠들기엔 간밤에 꾼 악몽이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기사님의 파장이 이동 능력자의 파장으로 뒤바뀌는 악몽을 꾼 탓이었다. 하필 꿈을 꿔도 이런 재수 없는 꿈을 꾸다니……. 아직까지도 이동 능력자의 파장이 느껴지는 걸 보면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이대로 잠들어봤자 꿈자리가 사나울 게 뻔했다. 무엇보다 악몽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다.

‘일어나자.’

결정을 내린 지안은 아르킨의 손을 조심스레 놓은 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하품을 하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졸음에 겨운 눈을 손등으로 비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자꾸, 영 엉뚱한 파장이 느껴졌다. 확실하게 잠에서 깨려면 물도 좀 마시고 세수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생각한 즉시 곧장 선실 구석을 더듬어 수통을 집어 든 지안은 뚜껑을 열고 물을 들이켰다. 근처의 수건을 대충 적신 뒤 얼굴도 닦았다.

“…….”

그런데도, 왜? 어째서 기사님의 파장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제정신으로 악몽을 꾸고 있을 리 없는데……. 왜 기사님이 아닌 이동 능력자의 파장이 느껴지지?

질문과 함께 잠기운이 완전히 가셨다.

엄습해오는 불길한 예감에 지안은 삐걱이는 몸을 돌려 일정한 숨을 토해내는 남자를 응시했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선실 안이 어두워서 잘 분간이 되질 않았다.

대신, 선명히 전달되는 파장이 이변을 알려 왔다. 이상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아직도 꿈을 꾸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동 능력자의 파장이 이렇게 생생히 느껴질 리 없다. 그래. 확인, 확인을 해야 했다. 지안은 어둠 속을 더듬더듬 걸으며 선실 문을 찾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악마에 홀린 것 같은 섬뜩함이 전신으로 치달았다.

손가락 끝이,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서둘러 선실의 문을 연 지안은, 어슴푸레한 빛이 선실 안을 비춘 순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기다렸단 듯 얼굴을 후려치는 비릿한 바닷바람이 불운한 현실을 일깨웠다.

간밤에 꾼 악몽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선실 안에 잠들어 있는 사람은 기사님이 아닌, 이동 능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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