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론은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바다와 같은 넓은 장소를 대대적으로 수색한 건 그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능을 이런 식으로 아낌없이 낭비한 것 역시 난생처음이다.
한차례 이를 간 아론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결심했다. 다시 그녀를 붙잡으면, 그땐 정말로 다리 하나는 부러뜨려 놓겠다고. 생각으로만 그친 공작과 달리 그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결심을 비웃듯, 노력에 비해 성과 없는 날이 이어졌다. 인근 바다에 떠 있는 배라는 배는 전부 확인했지만 검은 머리의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필 해안가 인근이라, 어선이고 무역선이고 할 것 없이 배가 많은 것도 지안을 찾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며칠간 발견한 배만 해도 수십 척이 넘었다. 심지어 배가 향하는 방향도 제각기 다 달랐다.
그러나 저 중에 지안이 탑승해 있으리란 사실만은 분명했다. 알타 인근의 육로를 모두 확인했으나 말이나 마차를 구하는 이방인 여자의 목격담은 들은 적 없다. 그녀는 분명 배로 이동하는 중일 터였다.
이런 이유로 아론은 갈매기를 하나하나 일일이 조종해 선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이동 능력을 써 직접 배를 수색하는 것보단 이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때문에 아론의 갈매기는 처음에는 무역선을, 그다음은 상선을, 세 번째에는 어선을 헤집으며 선원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대충 그런 식으로 연거푸 대여섯 번쯤 실패했을 무렵, 시야를 공유해 둔 갈매기 하나가 죽었다.
몇 번 있었던 일이라 아론은 갑작스레 뚝 끊겨버린 시야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선실을 헤집다 보면 뱃사람이 휘두른 그물에 걸리거나, 선원의 몽둥이에 의해 갈매기가 종종 죽어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갈매기를 노리고 날아든 것은 그물이나 몽둥이가 아닌, 번개처럼 날아든 검이었다. 거기다 마지막 순간 보았던 긴장한 사내의 얼굴은…… 언젠가 황성에서 보았던 기사였다. 지안이 황성의 시녀 노릇을 할 때 그녀를 도맡아 감시했던, 삼황자의 기사.
“하. 드디어 찾았군.”
힘없이 중얼거린 아론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정신없이 바다 위를 헤매며 그녀를 찾느라 한계까지 능력을 끌어다 썼다. 이만큼이나 무리한 건 오랜만이었다. 당장이라도 지안의 곁으로 가서 그녀를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그녀가 거부한다면 손이나 머리카락, 하다못해 옷자락이라도 좋았다. 그만큼 간절했다.
하지만 이 간절한 소망을 충족시키려면, 가장 먼저 방해꾼부터 없애야 하리라.
* * *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이 평화롭게 그레브의 배를 비췄다. 하지만 갑판의 풍경은 그리 평화롭지 않았다. 막 배 위로 이동한 아론이 선주인 그레브의 목을 그어 버렸기 때문이다. 바다의 짭짤하고 비릿한 해풍이 날름 피 냄새를 삼켰다.
아론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레브의 시체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그는 그대로 선실의 문을 통과해 들어섰다. 그리고 짐 위에 구겨져 잠든 지안과 아르킨을 응시했다.
“……하.”
그 순간 아론이 느낀 것은 배신감이었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화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유는 꽤나 단순했다. 지안이 아르킨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상은 아르킨이 지안의 손을 더 단단히 붙든 채였으나, 촛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선실은 어렴풋한 윤곽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 주질 않았다.
아론은 딱 자신이 바랬던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는 남녀를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지금 당장 저 기사를 치우고 그가 누웠던 자리를 차지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게 순조로워질 것 같았다.
퍼뜩 떠오른 것 치곤 정말 괜찮은 생각이었다. 지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침을 맞을 테고, 그사이 자신은 며칠간 이능을 과도하게 써서 불안정해진 상태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짐 쌓인 선실은 비좁고 쾨쾨한 냄새투성이라 빈말로도 쾌적하다고 할 수 없는 장소였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당장 저 초라한 선실의 짐짝 위에 눕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 웅크리고 싶다. 그 욕구는 강렬한 허기와 같았다. 어쩌면 갈증인지도 몰랐다.
아론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아르킨을 그 자리에서 치워냈다. 아무 곳에나 그를 이동시켜 버린 뒤 곧장 그 위에 누웠다. 손을 뻗어 비어 있는 지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 나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멈췄던 숨이 쉬어지고 멎어가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지금처럼 극적이진 못할 것 같았다.
어쨌거나 반 시체에서 사람이 되었단 것만은 분명했다. 느껴지지 않던 피로가 느껴지고, 눈을 감아도 오지 않던 잠이 드디어 찾아왔으니까.
아론은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지안이 정말 성녀이긴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딱히 그 사실을 의심하거나 실체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래. 이런 감각을 안겨다 주는 사람이 성녀가 아니라면 그거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나는 이런 구원에 오랫동안 목말라 있었던 걸지도…….’
자조하며 아론은 생각했다. 내일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보복하고 싶어하거든 얼마든지 당해 주어야겠다고. 그녀가 휘두른 힘이 아무리 험악하게 몸을 관통하고 들쑤셔도, 참으라고 하면 참아 줄 생각이었다. 특유의 알 수 없는 힘으로 조종하려 해도 좋다. 삼황자에게 돌려보내란 것을 제외한, 그 어떤 요구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아론은 바로 이런 생각을 하며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사람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제도의 능력자들 바로 그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더는 폭주로 죽어 나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장담한 황실의 공표에 희망을 가진 것도 잠시. 성녀의 등장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 뒤로 보름이 지나자 사실은 성녀가 황성에 없는 것 아니냔 소문마저 나돌았다.
‘어떻게 소문이 새어나갔지.’
분명 단단히 입막음을 해 두었는데. 어디에서부터 구멍이 난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추이가 예상보다 더 빨랐다. 삼황자 휘하 능력자들과 북부 기사들을 챙겨 오데르겐령으로 떠난 황녀 전하의 소행일까? 아니면 신전 관계자들이 입을 나불댄 것인가?
밀실에 홀로 앉아 이런저런 가정을 되새겨 본 이멜다는, 이제 와 궁금해해 본들 알 도리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후에야 고민을 관두었다.
어차피 소문은 통제의 범위를 벗어났다. 지금 필요한 건 대안이지 고민이 아니었다. 성녀의 대역도 미리 준비해 두었고, 성녀와 비슷한 체구의 시체도 마련해 두었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황제의 승인도 진작에 떨어졌으니 자신은 계획한 바를 실행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능력자들이 황성 앞에 진을 치고 성녀를 내놓으라 성화를 부린 지도 벌써 보름째.
처음부터 지안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황실과 성녀가 서로 공생하는 관계란 걸 대놓고 밝혀버린 바람에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성난 능력자들에게 희생양을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이멜다는 그들에게 기꺼이 ‘그들 자신’이란 희생양을 제공할 생각이었다. 다루어야 할 개가 목줄을 잃고 끝내 미쳐 버렸다면, 주인이라도 나서서 때려죽이는 수밖에 없지 않나.
오늘, 성녀는 황성에 침입한 능력자에 의해 불운히 사망한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이를 위해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능력자들도 미리 매수해 두었다. 성녀와 접촉해 보지 못했으며 황가에 충성하는 귀족들 위주로 세심히 골라둔 만큼, 나름 쓸모 있는 바람잡이가 되어 줄 터였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능력자들의 분노는 황실이 아닌 그들 자신에게 역류할 것이다. 범인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시위하는 능력자들을 잡아 가두고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면, 성녀라는 구심점을 잃은 어설픈 집단은 순식간에 와해된다. 나서서 흔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것은 퍼레이드 도중 바람을 다루는 능력자가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계책이었다. 그 과격함이 황실을 향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그렇다고 신전을 제물로 삼을 수도 없으니…….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독은 독으로 제압하고 짐승은 짐승끼리 싸우도록 만들어야 한다.
혼란이 크면 클수록 황실의 잘못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희석될 것이다. 지금이라면 성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실행에 딱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북부로 떠난 황녀가 성녀를 찾아낼 것을 대비해 사람을 붙여 두었고, 이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대처할 수 있도록 새로운 대안이 될 만한 요인들을 짜 맞춰 두었다.
황실은 건재할 것이다. 성녀를 중심에 두고 마련한 계획이 어그러지긴 했으나, 상심할 정도로 큰 일은 아니었다. 당장 닥쳐온 일을 해결하다 보면 결국엔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마련이고, 그건 성녀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이후 충분히 시간이 지나면 황녀 전하나 삼황자가 성녀에게로 닿는 길을 알려 줄 터. 그 기회를 놓치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적당한 시기에 성녀의 신변을 확보한 뒤, 성녀를 살해한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콕 짚어 범인으로 지목하는 게 다소 어렵긴 하겠으나. 의혹을 제기하고 그것을 부풀리면 어찌어찌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능력자들이 알아서 그들을 처단해줄 것이다. 필요 이상의 힘을 빼거나 손을 더럽히는 일 없이 한 번에 방해물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차분히 이득과 손실을 계산해 본 이멜다는 이내 주저하는 마음을 모조리 털어냈다.
그리고 그를 기다렸다는 듯 시종장이 벽을 두드려 황제의 방문을 알렸다.
그가 보내온 신호에 이멜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바로 방을 나서지 않고 잠시 걸으며 제 새로운 발 받침대가 주는 기분을 즐겼다.
전대 후작은 자신의 뼛골이 최종적으로 머물게 될 곳이 대대로 내려온 후작가의 무덤이 아닌 일개 여인의 발 받침대 속이란 걸 상상이나 했을까. 그것도 그가 평생 제 아래라 생각하던 이의.
픽 조소한 이멜다는 겁 많은 새로운 황제를 진정시킬 단어를 몇 가지 상기하며 경쾌한 걸음으로 밀실에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