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진실이 뭐든 알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놓아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치달을 뻔했으나. 모두 잘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 굳이 그 순간을 반복 재생하며 자학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는 것. 그것만 생각하자.
지구로 돌아가면 모두 다 해결될 것이다. 돌아가면 지친 몸과 정신을 누일 집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골치 아픈 모든 상황에서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머리 위 갑판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발소리가 정체 모를 안도감을 주었다. 아르킨과 그레브가 날씨와 항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듣고 있자니 긴장이 사르르 녹았다. 졸음이 비 오듯 쏟아졌다.
* * *
다시 잠에서 깼을 때, 배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 누가 둘러 준 건지 어깨에 모포도 둘러져 있고, 머리에는 작은 쿠션이 받쳐져 있었다. 달게 잔 덕분인지 모처럼 정신이 개운했다. 마침 작은 등불을 들고 선실로 내려온 아르킨은 눈을 비비는 지안을 발견하고서 말했다.
“일어나셨군요.”
“네. 지금 막 깼어요.”
“시장하지 않습니까?”
그 말과 함께 작은 밀빵과 육포, 물이 내밀어졌다. 솔직히 평하자면 레이크와 함께 다닐 때보다 더 초라한 식사였지만, 지안은 즐겁게 그것들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한참 육포를 씹는 것에 열중하던 지안은 물로 입가심을 한 뒤에야 아르킨이 자신이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사님은 뭐 좀 드셨어요?”
“전 미리 먹어 두었습니다.”
“제가 좀 오래 잔 것 같아요. 배가 흔들리는 걸 보니 출항한 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맞습니다.”
어딘가 머뭇거림이 묻어나는 대답이었다. 말을 하려다 만 입술이 파르르 달싹인다. 지안은 그제야 아르킨의 파장을 인지했다. 눈앞에 두고 어떻게 여태 몰랐나 싶을 만큼 상태가 위태로웠다. 눈치를 보며 손을 내밀자 아르킨은 기다렸단 듯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실제로 아르킨에겐 그 손을 사양하거나 거절할 여유가 없었다. 뻗어져 나오는 지안의 기운이 오랜 고통을 밀어내자, 아르킨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깨달았다.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온 건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만일 고통에 실체가 있다면,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혀오던 그것들이 연기가 되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으리라.
지안은 비틀거리는 아르킨을 자신의 옆에 앉히고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님은 제 소문 못 들으셨어요?”
가볍게 던져진 질문이었으나 그 내용은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흐려지는 정신을 차갑게 일깨웠다. 그러고서도 적절한 대답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바닥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지안의 기운이 몸과 정신을 몹시 혼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듣긴 했습니다만……. 저는 이제껏 주로 변방의 영지를 골라 이동해서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대충 당신이 성녀로 추앙받고 있단 건 압니다.”
“알면서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제도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 저 구해주신 거 고맙다고 말도 못 했네요. 인사하려고 돌아오시길 기다렸는데.”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네. 돌아오시면 선물로 드리려고 손수건도 만들었는데.”
그 말에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아르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당신이…… 삼황자 전하를 연모하는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황녀 전하께서도 당신에게 무척 잘 대해 주었고……. 그래서 분명, 오래지 않아 황실의 일원이 될 거라고…….”
더듬더듬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은 아르킨은 어처구니없어하는 지안의 눈빛을 보고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삼황자 전하는 좋은 분이시죠.”
말하면서도 지안은 스스로가 신기했다. 그 삼황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게 될 줄이야. 그러나 그 이상은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유보하듯 딱 거기까지만 말한 지안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폐하께서 돌아가신 건 알고 계세요?”
“무슨 말씀입니까?”
기함하는 아르킨의 모습에 지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제도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모르시는군요. 폐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시고 황태자 전하가 즉위하셨어요. 제가 납치된 건 황태자 전하의 즉위식 하루 전날이고요.”
“그 말은, 신전이 아니라 황성에서 납치를 당하셨단 말입니까?”
“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벌컥 화를 낸 아르킨은 지안이 굳어 버리자 서둘러 목소리를 낮췄다.
“……다들 기강이 해이해진 게 분명합니다.”
“그건…. 그보다 기사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차마 삼황자의 기사단이 황태자에게 넘어갔다고 말할 수가 없어, 지안은 질문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주제라 생각한 것을 던졌다.
그러나 아르킨은 지안의 의도와는 달리 대단히 당황했다. 실의에 빠진 채 폭주할 장소를 찾아 헤맨 지난 시간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그녀에게 들려줄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고심 끝에 아르킨은 바로 보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남부를 여행하고 다녔습니다. 이곳은 대체로 날씨가 따뜻하고 몬스터도 적으며, 땅이 비옥해 농작물이 풍부합니다. 수확철에는 축제도 빈번해 여행자들은 제국 내에서도 남부를 가장 손꼽히는 여행지로 꼽습니다. 구경거리도 많고, 부유한 상인과 농부가 많아 인심도 넉넉하죠. 그만큼 소매치기나 사기꾼도 많습니다.”
서두를 연 아르킨은 지안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리벳 인근을 지나쳤을 때, 가짜 성녀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짜 성녀요?”
“제도에서 기적을 행사한 성녀가 리벳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혹시 당신인가 하여 리벳에 방문했었습니다.”
“만났나요? 그 가짜 성녀.”
“네. 소문에 현혹된 능력자들을 등쳐먹고 있더군요.”
“세상에.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대로 리벳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네? 그 가짜 성녀를 고발하지 않고요?”
지안의 말에 아르킨은 잠시 당황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당시엔 너무도 실의에 빠진 탓에 미처 그 생각까지 하지 못했다. 아르킨은 얼마 없는 순발력을 발휘해 변명했다.
“그녀를 진짜라 믿는 능력자들이 워낙 많아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홀로 다수를 상대할 순 없는 노릇이고. 당시 저는 이능을 사용하는 걸 자제하던 처지라…….”
“하긴, 무모한 일은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죠. 잘하셨어요.”
각오했던 비난 대신 칭찬이 돌아온 덕분에 아르킨은 마음의 짐을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사정을 모르는 지안은 의문이 풀린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야 삼황자 전하와 공작님이 왜 리벳에 있었던 건지 알겠네요.”
거기에 더해 여관에서 유인당했던 능력자가 왜 그렇게 외쳤는지도 이제 이해가 간다.
‘제도에서 사라진 성녀가 남부에 있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어!’
아마 그 외침은 가짜 성녀로 인한 헛소문이 빚어낸 오해가 아니었을까?
어쨌건, 그 가짜 성녀는 지금쯤 공작님이나 삼황자 전하에 의해 된통 당했을 것이다. 아니지, 반역자 신세로 쫓기는 마당이니 그냥 못 본 척하셨을까?
이리저리 유추해 보던 지안은 자신이 정말로 여유를 되찾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시답잖은 생각에 시간을 할애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
고요한 가운데 단조로운 파도 소리가 너무도 평화롭게 들려와서 지안은 모처럼 그간의 시름을 잊은 채 가이딩에 집중할 수 있었다.
평화를 되찾은 건 아르킨도 마찬가지였다. 밀려드는 지안의 기운에 아르킨은 폭주의 고통을 잊은 채 어린아이처럼 잠들고 말았다.
* * *
그레브는 평소처럼 바람과 파도, 하늘을 차례로 살폈다.
바닷바람은 선선했고, 폭풍이 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도운 덕분에 항해는 놀라울 만큼 순조로웠다. 알타에서 파리온까지 이동하면서 거친 파도 한 번 만나지 않다니. 요번에 배에 탑승한 손님들은 제법 운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상한 건, 요 며칠 갈매기가 자주 보이는데도 계속 낚시를 허탕 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갈매기가 모여드는 곳이야말로 질 좋은 고기가 낚이는 곳인데. 낚싯대를 드리우는 족족 허탕이라니……. 그레브는 실망한 기색으로 낚싯대를 거두었다. 배의 후미에는 그런 그를 약 올리듯 갈매기 하나가 앉아 끼룩대고 있었다.
미끼와 찌 따위를 대충 정리한 그레브는 배를 긁으며 선실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을 노린 듯, 날개를 활짝 펼친 갈매기가 열린 문을 향해 날아들었다.
뒤늦게 그것을 본 그레브는 기겁하며 선실의 문을 닫으려 했지만, 갈매기는 이미 그의 어깨를 지나친 참이었다.
“쩝. 이렇게 된 거, 잡아서 모처럼 고기나 먹어야겠군.”
혀를 찬 그는 그물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했다. 잘만 양념하면 물고기 대신 갈매기 고기도 꽤 괜찮았다.
그 순간, 그의 생각에 동조라도 하듯 무서운 속도로 뻗어 나온 검이 선실 안으로 들어선 갈매기를 꿰뚫었다. 갈매기는 꿱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검과 함께 선실의 천장에 박혀 버리고 말았다.
검을 집어던진 건 아르킨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험악해진 그레브의 눈빛을 본 아르킨은 말없이 호주머니를 열어 선실의 천장에 난 구멍을 변상했다. 그러고 나서야 천장에 박힌 자신의 검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불을 마친 아르킨은 뒤돌아 머리끝까지 모포를 푹 뒤집어쓴 지안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짐짝 위에 모포를 대충 던져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있는 건 짐이 아닌 지안이었다. 머리카락 한올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 없었고, 위장도 제대로였다. 날짐승이 선실 안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들키지 않았다.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 비슷한 것을 뱉어낸 아르킨은 선실의 문을 단단히 닫아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