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아르킨은 막 싹튼 마음을 스스로 짓밟은 채 남부의 인적 드문 해안마을에 당도했다. 제도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 만한 후미진 곳만 골라 이동하며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무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한적한 마을만 골라 이동해도 간혹 바람보다 더 빨리 당도한 소문을 듣게 될 때가 있었다. 그 소문은 주로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성녀에 대한 것이었다.
아르킨은 단번에 그 성녀가 지안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제 와 제도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돌아간들 살려달라고 매달릴 염치도 없었다. 삼황자 전하의 품속에서 행복을 만끽할 지안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흘러 흘러 도착한 곳이 바로 알타였다. 남부 끝자락의 조그만 해안마을. 아주 작은 항구와 해안 절벽을 끼고 형성된 이곳은 주민이 백 명은 될까 싶을 정도로 적었다. 마침 변방에 무인도가 있어 삶을 마무리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르킨은 홀린 듯한 얼굴로 지안을 응시했다. 그녀와 마주하고 있으니 거짓말처럼 삶에 대한 욕망이 샘솟아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메말라 있던 심장에 누군가가 뜨거운 물을 들이부은 것 같았다.
“기사님?”
지안의 목소리에 아르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내게 무엇을 물었더라? 아. 그래. 요양.
“보시다시피 몸은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왜 복귀하지 않으셨어요?”
이어진 물음에 아르킨은 처음으로 자신이 폭주를 앞둔 인간이라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언제 폭주할지 저조차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럴싸한 변명에 만족감을 느낀 것도 잠시, 아르킨은 뛸 듯이 놀라야 했다. 지안이 자신의 손을 덥석 붙잡아왔기 때문이었다.
이전보다 더 강력해진 기운 앞에 아르킨은 순식간에 무력해졌다. 달팽이보다 더 연약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손을 붙잡은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아프지 않았다. 익사 직전에서야 겨우 구조당한 것처럼 숨이 가빠져 왔다.
그와 동시에, 아르킨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집착 어린 감정을 발견했다. 예전에 짓밟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사실은 심장에 뿌리를 드리운 채 쑥쑥 자라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지안이 살짝 웃어 보였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다정했다.
“제가 있는 한, 폭주할 일은 없으실 거예요. 장담할게요.”
오래전에 잘라냈다고 생각한 감정이 다시 싹을 틔우는 데는 그 한마디만으로 충분했다. 심장이 거칠게 울렁였다. 이대로 있다간 대뜸 고백이라도 해 버릴 것 같았다. 앞뒤 없는 말을 쏟아붓듯이 내뱉는 참사를 막기 위해 아르킨은 아무거나 떠오른 대로 질문을 던졌다.
“북부에는 왜 가십니까?”
무심코 질문한 그는 지안이 북부 출신이란 것을 뒤늦게 기억해내고선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비슷해요.”
“이동 능력자에겐 어쩌다 쫓기게 된 겁니까? 삼황자 전하가 당신을 놓아 주었을 리는 없고…….”
“납치당했어요. 빠져나와 도망치던 중에 기사님과 만나게 된 거고요.”
그 말에 아르킨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납치? 단순히 쫓기고 있던 게 아니었군요.”
“맞아요. 제가 마음이 급해서 설명을 충분히 하지 못했네요. 원래는 삼황자 전하와 공작님과 함께 북부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중간에 이동 능력자에게 납치당하는 바람에 북부에서 한참 떨어진 남부로 오게 되었어요.”
말하며 지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많은 것들을 제외시킨 함축적인 대답이었지만, 다시 하라고 해도 이만큼 효과적으로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도망친 겁니까?”
지안은 대답 대신 자신의 기운을 뾰족이 다듬은 후 아르킨의 손바닥을 살짝 찔렀다. 그것만으로도 아르킨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다소 놀란 모습을 확인한 지안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제 능력으로 기절시켰어요.”
“…….”
“그런데 언제 깨어날지 몰라요. 심지어 그자는 다중 능력자라 새를 다뤄서 주변을 탐색하는 데다, 시야까지 공유하거든요. 감시에 무척이나 탁월한 이능이에요. 저도 이런 것까지 알고 싶진 않았는데……. 어쨌든 기사님도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상대하기 까다로운 능력이군요. 가능하면 선실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죠. 어서 이 배의 주인이 돌아오면 좋겠네요.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할 수 있겠죠?”
“그럴 겁니다.”
아르킨의 장담을 들은 지안은 그제야 긴장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며칠간 송곳처럼 날카로웠던 신경이 조금 무뎌진 기분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한결 여유를 되찾은 지안이 말했다.
“혹시 삼황자 전하께 연락할 방법이 있을까요? 제가 무사히 빠져나와 파리온으로 향하고 있단 걸 전하께 알려야 할 텐데.”
지안의 말에 아르킨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러나 워낙 미세한 차이라 지안은 미처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짧은 순간 아르킨은 치열하게 갈등했다. 소식을 전할 방법이 있긴 했다. 어쨌거나 한때 삼황자의 측근이었던 만큼, 유사시의 연락 수단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저렇게 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데…… 차라리 저 혼자 답답해 죽고 말지. 절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마법을 이용한 통신구가 하나 있습니다. 일회용이고, 통신이 가능한 시간이 십여 분에 불과하긴 하지만…… 삼황자 전하가 통신구를 버리지 않으셨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거! 그거 제가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지금 가지고 계세요?”
안 된다고 하면 울 기세였다. 아르킨은 순순히 품속에서 통신구를 꺼내 지안에게 건네주었다. 사용법까지 친절히 알려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누구든 옆에서 그를 지켜보았다면 아르킨에게서 낭패감을 확인할 수 있었겠으나 구경꾼은 아무도 없었고, 지안은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통신구를 작동시키느라 바빴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좋아하는 모습에 아르킨은 오래 후회할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보니 통신구가 있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래. 전서구 같은 걸 구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렸을 테고, 새를 다룬다는 이동 능력자에게 걸렸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이걸로 됐다. 잘된 일이다.
아르킨이 자조하듯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사이, 지안의 손에서 통신구가 작동했다.
“여보세요? 전하. 제 목소리 들리세요?”
답변은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급하게 짐을 뒤지거나 풀어헤치는 듯한 거친 소리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익숙한 목소리가 통신구를 통해 튀어나왔다.
―지안!
―지안!
공작과 삼황자의 목소리에 지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데 섞여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자 오랜 긴장이 탁 풀어졌다.
“흐윽……전하. 공작님…….”
―어디야! 어딘지 말해!
일리아스의 물음에 지안은 울먹이는 얼굴로 아르킨을 쳐다보았다. 아르킨이 짧게 대답했다.
“알타입니다.”
“전하. 들으셨어요? 알타래요.”
―알타? 어딘지 찾아보겠다. 그보다 너 지금 아르킨과 있는 건가?
“네. 이동 능력자를 기절시키고 도망쳤다가 오늘 막 만났어요. 통신구도 빌려주셨고요.”
―지금 당장 찾으러 가겠다.
―지안, 다친 곳은? 무사한가? 계속 그대를 찾고 있었다.
번갈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절로 목이 메었다. 그러리라 생각은 했지만, 계속 날 찾고 있었구나. 지안은 그제서야 자신이 공작과 삼황자에게 무척이나 의지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전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은 목소리로 지안은 간신히 괜찮다고 답했다. 누구든 그 모습을 보았다면 심장이 돌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서야 안쓰러움을 아낌없이 드러냈을 것이다. 그건 아르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목이 잠길 정도로 감격에 겨워하고 있는 지안에게 그가 짧게 충고했다.
“마법 통신구 이용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충고는 효과적이었다. 순식간에 이성을 되찾은 지안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전하. 공작님. 지금 리벳이시죠? 기사님과 함께 항구도시 파리온으로 갈게요. 거기서 만나요, 우리. 합류한 뒤엔 북부로 직항하는 배로 갈아타고요. 아! 저는 후미를 파란색으로 칠한 배에 타고 있어요. 기억해 두세요. 파란색 칠을 한 배예요.”
―파리온이라면…… 어딘지 알겠군. 리벳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도착하는데 이틀이면 되겠어. 배편은 있나?
“있어요. 곧 출발해요. 다만 파리온에 도착하기까지 일주일은 걸린다고 들었어요.”
―다행이군. 잘 들어. 절대로 선실에서 나오지 마라, 지안. 갈매기 한 마리도 의심해야 한다.
“알아요. 그렇게 할게요. 그럼 우리…… 파리온에서 만나요.”
―무사해야 해. 무사해야 한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당부를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겼다. 지안은 수명이 다한 통신구를 아르킨에게 돌려주며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너무 흥분해버린 탓인지 눈알이 시큰시큰했다. 뒤늦은 눈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아닙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묘한 씁쓸함을 감추며 아르킨은 설핏 웃어 보였다.
* * *
지안의 걱정과 달리 그레브는 금세 돌아와서 배에 물건을 적재한 후 닻을 올렸다. 아르킨은 분주히 출항을 준비하는 그를 돕기 위해 잠시 선실 밖으로 나갔다.
빛 한 줌 스며들지 않는 비좁고 초라한 선실 구석에 자리 잡은 지안은 항해 준비를 마친 배가 흔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일이 너무 순조롭게 풀려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순조로운 건 아닌가? 눈앞에서 사람 목이 달아나는 걸 봤으니?
생각과 동시에 웃는 낯 그대로 목이 잘린 능력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다짜고짜 자신을 챙겨 여관 밖으로 끌고 나갔던 남자. 이름도 모르고, 그리 성실한 부류의 사람인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을 정도로 저희에게 죄를 지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단숨에 살해당할 줄 알았다면 섣불리 기운을 풀어 여관으로 유인하지 않았을 텐데……. 나머지 두 능력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레이크가 다 죽였을까?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한 지안은 더 생각하길 관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