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폭주라면 모를까, 아론이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방으로 돌아가기나 하시죠. 보아하니 밥도 다 먹은 것 같은데.”
“아직 다 안 먹었어요.”
“빈 그릇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렇긴 했다. 하지만 막 마을 초입에 들어선 능력자들이 헐레벌떡 여관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다. 시간을 좀 더 벌어야 했다. 레이크의 말을 무시한 지안은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른 뒤 먹지도 않을 음식을 더 주문했다.
“여기 수프 한 접시 더요!”
지안의 외침에 레이크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걸 본 지안은 레이크가 자신의 주문을 멋대로 취소해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예상외로 그는 혀를 찬 후 다시 검을 손질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주문한 수프가 막 지안의 앞에 놓여질 무렵. 기다렸던 능력자 무리가 여관에 들이닥쳤다.
잔뜩 흥분한 얼굴. 상기된 표정으로 여관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들은 거침없는 걸음으로 지안에게 다가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그들의 태도와 순간 반색하는 지안의 얼굴을 본 레이크는 잠시 저놈들이 지안의 지인이나 친인척이 아닌가 착각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안을 향해 곧장 다가오는 이들의 얼굴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동생이라도 찾은 것처럼 충격과 감동으로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몸을 떨더니 눈물을 흘리는 놈도 있어서 레이크는 몹시 심각해졌다. 의뢰주가 납치범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하필 납치 대상자의 가족을 이런 후미진 마을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속으로 혀를 찬 레이크는 지금이라도 지안을 기절시킨 후 도망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보다 지안이 테이블을 엎어버린 게 먼저였다. 몇 숟갈 뜨지도 않은 수프가 뜨거운 김을 뿜어내며 허공을 날았다.
“도와주세요! 이 사람 노예상이에요!”
졸지에 용병에서 노예상이 되고 만 레이크는 와그작 얼굴을 구겼다. 곧이어 난장판이 벌어졌다.
레이크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능력자들의 이능을 막아내는 사이, 능력자들은 곧바로 지안을 챙겨 여관 밖으로 빠져나왔다. 레이크는 누구나 인정하는 노련한 용병이었지만, 수적으로 너무 열세인 데다 감시와 보호를 해야 할 대상이 너무 비협조적이라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지안의 팔을 단단히 붙잡은 능력자 하나가 기쁨에 찬 얼굴로 외쳤다.
“제도에서 사라진 성녀가 남부에 있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어쩌다 소문이 난 건지 물으려고 지안이 막 입을 연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능력자의 목이 달아났다. 비현실적인 장면에 솜털이 곤두섰다. 이런 건, 이건 건 계산에 없었다. 소름이 전신을 지배했다.
“아악!”
뒤늦게 비명을 지르는 지안의 얼굴 위로 뜨끈한 피가 쏟아졌다.
뒤늦게 여관을 나온 레이크의 작품은 아니었다. 아론. 그자였다. 가까이서 그의 파장이 느껴졌다. 기운을 퍼뜨려 당장 당겨올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마저 비명을 내지르려던 목청이 뚝 멎었다.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용기가 샘솟으며 두려움을 물리쳤다. 피를 뒤집어쓴 것이 잠시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였다.
반대로 지안에게 유인당한 능력자들은 갑작스럽게 동료의 목이 달아나는 걸 보고 크게 당황했다.
“젠장! 다들 조심해! 능력자가 숨어 있다!”
경고하기 무섭게, 그의 가슴에 레이크의 검이 솜씨 좋게 틀어박혔다. 경계가 흐트러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허리춤의 단검을 집어던진 것이다. 어라? 하며 제 가슴을 더듬거린 그는 곧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것을 본 지안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해졌다. 비명을 지르거나, 두려워하거나, 겁에 질리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공포를 눌러 삼킨 지안은 온 힘을 다해 기운을 풀어냈다.
기회는 한 번. 단 한 번뿐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 탓일까. 지안은 저항하듯 흔들리는 아론의 파장을 순식간에 집어삼킬 수 있었다. 흩어낸 기운으로 아론을 똘똘 감싸 제압하고 나자 새삼 그가 얼마나 강한 능력자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 해도 에스퍼는 에스퍼. 지금 그는 뱀에게 휘감긴 쥐와 같은 신세였다. 자신의 기운에 감싸인 그가 부르르 떠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다.
저항하던 아론의 파장이 차츰 잠잠해지는 것을 확인한 지안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아론. 이리 와. 내 옆으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쯤 몽롱해진 눈을 한 아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항적인 기색이 남은 눈빛을 보니 완전히 잠식당하진 않은 것 같지만, 소용없다. 그는 이미 가이딩에 걸려들었고, 지안은 그를 포박하고 있는 자신의 기운을 거둘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코앞에서 능력자의 목이 달아나는 광경을 목격한 탓일까. 지안은 무섭도록 신중해진 채였다.
그 때였다.
“크헉!”
짧은 단말마에 고개를 돌린 지안은 레이크가 능력자 하나를 마저 처치해 버리는 걸 보았다. 일반인도 단련만 잘하면 능력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무시무시한 검놀림이었다.
이제 남은 능력자는 고작 두 사람. 그마저도 연달아 동료를 잃어서 그런지 선뜻 나서는 걸 망설이고 있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레이크의 흉흉한 표정을 본 지안은 곧바로 아론을 붙잡았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아론. 혹시 삼황자 전하가 어디 있는지 알아?”
지안의 질문에 흐려져 있던 아론의 눈이 섬뜩히 빛났다. 거세게 저항하는 걸 보아 삼황자 전하의 위치를 아는 게 분명했다! 지안은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아론의 목을 끌어안았다.
“알아?”
가이딩 강도를 올리며 다시 묻자 아론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어디야? 속삭이듯 물으니 그의 입에서 낯선 지명이 흘러나왔다. 리벳.
“아론. 나를 리벳으로 데려다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이 갈라지며 지안과 아론을 집어삼켰다.
홀로 남겨진 채 능력자 둘을 재차 도살해 버린 레이크는 방금 전까지 지안이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 * *
지안이 도착한 곳은 낯선 해안가였다. 눈앞에 보이는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바다에 놀란 것도 잠시. 지안은 이곳이 리벳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의 바다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근 어디에서도 삼황자와 공작의 파장을 찾아내지 못한 게 결정적이다.
판단을 마친 지안은 아론을 붙잡고 소리쳤다.
“여긴 리벳이 아니잖아!”
항의하자 아론의 입술이 달싹였다. 흐리던 그의 눈에 천천히 이지가 들어차는 모습이 지안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이어 싱긋 웃는 얼굴에 지안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이동을 하던 순간, 혹시나 지난번처럼 물살에 휩쓸릴까 봐 가이딩의 고삐를 조금 느슨히 쥔 게 실책이었다.
뻗어온 그의 두 손이 강한 악력으로 지안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내가 널, 그렇게 쉽게 빼앗길 것 같나?”
본래라면 섬뜩하게 들렸을 협박이었겠지만, 그런 건 제정신인 사람에게나 통하는 법. 아론에겐 안타깝게도 지안은 이성을 반쯤 놓아버린 채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고 그 피를 뒤집어쓴 이에게 제정신이길 요구해선 안 된다. 그런 와중에 저런 협박까지 듣고 나니 지안은 정말로 눈이 훼까닥 도는 기분이었다.
“너 때문에! 애꿎은 능력자들을 끌어들여 죽게 만들었어! 세 명이, 세 명이 죽었어! 한 명은 네가! 두 명은 레이크가!”
그 외침과 함께 뻗어 나온 기운이 아론의 내장을 뒤흔들었다. 지안은 신음하는 아론의 멱살을 움켜쥔 채 고함을 지르며 울었다. 울분과 함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너만 아니었어도 난 북부에 거의 다 도착했을 거야! 너만, 너만 아니었으면! 난 돌아갈 수 있었을 거라고! 알아?”
미친 사람처럼 한바탕 소리친 지안은, 언제 흥분했냐는 듯 곧장 차분해졌다. 동시에 아론은 자신의 내장을 거칠게 파고들던 지안의 기운이 일순간 호수의 표면처럼 잠잠해진 걸 느꼈다. 돌변에 가까운 변화에 그는 긴장 어린 눈으로 지안을 관찰했다. 마치 뭔가를 결심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다음 순간, 지안의 입술이 아론의 입술 위에 닿았다.
“…!”
그간 접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끈적한 농도의 힘이 타액과 함께 혀 위로 녹아들었다. 순식간에 정신이 흐려지고 폐가 확 조여들었다. 불 위의 버터가 된 것처럼 전신이 녹아 흐물거리고, 터질 듯 뛰기 시작한 심장의 고동이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벼락같은 감각의 끝에서 아론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론이 기절하자 지안은 거칠 것 없이 그의 품을 뒤져 돈주머니를 찾아냈다. 허리춤의 단검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홀린 듯 검집에서 단검을 뽑아 든 지안은 무방비한 채 쓰러져 있는 아론을 응시했다. 이대로 심장을 찌르면……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바로 옆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기만 해도 이자는 죽는다.
눈앞에서 애꿎은 능력자의 목이 달아났던 걸 생각하면 지금 숨통을 끊어놓는 게 가장 현명한 대응일 것이다. 이건 기회였다. 당장 그를 해치워 버리면 된다. 마침 인적도 드물고, 사방 어디에도 목격자가 없다. 누구도 내가 이자를 죽인 걸 모를 것이다. 지안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아론의 로브를 힘껏 그러쥐었다.
‘그래. 이대로 절벽 아래에 밀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거야.’
그렇게 결심하던 순간, 지안의 손등 위로 아론의 뺨이 닿았다. 그가 고개를 가누지 못해 생긴 가벼운 접촉이었다. 거기까진 아무 문제 없었다.
그러나 손등 위로 그의 뺨이 문질러지고, 뒤이어 미지근한 온기가 전해지자 거짓말처럼 흥분이 가라앉았다. 피부에 닿아온 사람의 체온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살인을 실행하려는 스스로의 모습에 소스라친 것도 잠시. 치열한 고민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웠다. 뭣보다 이 이동 능력자는…… 물에 빠져 정신을 잃은 날 구해주기까지 했는데……. 살의와 선의가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며 갈등을 낳았다.
짧은 전투 끝에 승리한 건 ‘살인은 나쁘다’는, 도덕책에나 나올 법한 명제였다. 자신이 선한 인물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죽이고 멀쩡할 자신이 없기에 내려진 결정에 불과했다.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인 후의 죄책감을,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람을 죽여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지안은 픽 웃으며 아론의 멱살을 놓았다.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마치자 내내 부재중이던 이성이 일부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울컥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