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침대보에 파묻힌 얼굴을 들기도 전에 이동 능력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가려고?”
순간 가슴이 섬뜩해졌으나, 순발력이란 바로 이런 순간에 발휘되는 법이다. 지안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신경질적이고 뻔뻔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화장실!”
정말 용무가 급한 건 아니었지만 급조한 변명이라도 해서 의심을 피해야 했다. 아론은 다시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쿵쿵거리며 문밖을 나서는 지안을 붙잡아 세운 뒤, 그녀의 어깨 위에 새 한 마리를 얹어 주었다. 살아있는 새의 발이 어깨를 움켜잡는 감각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 간질간질하고 귀여웠다.
“다녀와.”
뒤늦게 떨어진 허락에 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그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다. 제깟 게 뭔데 다녀오라 말아라 허락을 하나! 지금이라도 이놈을 가이딩으로 후려친 다음 도망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 발치에 신발이 던져졌다.
“아무리 급해도 신발은 신고 가고.”
“어두워서 안 보였어.”
퉁명스럽게 대답한 지안은 신발에 발을 집어넣고선 잠시 놀랐다. 구김 없이 빳빳한 천을 보아 새것이 분명한데, 착화감이 생각 외로 푹신하고 편안했다. 도주에 용이하겠단 생각을 하며 그대로 여관의 화장실로 직행한 지안은, 곧장 화장실을 지나쳐 여관의 뒷문을 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여관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
하지만 이대로 도망쳐 봤자 다시 침대 위에 처박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동 능력자의 새가 감시역으로 어깨 위에 착석하기까지 한 상태 아닌가. 지안은 새벽이 밝아오는 여관 밖의 풍경을 노려보다가 그대로 뒤돌아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 기다렸단 듯 가벼운 조롱이 돌아왔다.
“멍청하게 그대로 도망칠 줄 알았는데.”
“그래서 불만이야? 다시 도망쳐 줄까?”
사납게 받아치는 말에 아론은 기가 막혀 입을 다물었다. 기껏 다 죽어가는 걸 살려놓았더니 은혜도 모르고 입버릇이 고약했다. 삼황자와 공작 앞에서는 그토록 사근사근히 굴었으면서. 성녀인 주제에 신분을 가린다 이건가? 생긴 것에 비해 퍽 속물적이었다.
아론은 얼굴을 구긴 채 뭐라 쏘아붙이려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지안의 말이 더 빨랐다.
“날 간호한 거, 당신이지? 도망치려다 말고 생각해 보니 내가 고맙다는 말을 안 한 것 같아서.”
그 말에 막 표출되려던 불만이 그대로 사라졌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돌아온 건가?”
“겸사겸사. 여기가 어딘지도 물어볼 겸. 다시 침대에 처박히기 싫기도 했고.”
“남부 다프탄데르 백작령 인근이다.”
그 말에 지안은 크게 상심했다. 남부라면 북부의 반대 방향 아닌가! 저렇게 단순히 말하지만 북부에서 얼마나 멀어졌을지 감도 안 잡혔다.
이렇게 된 이상, 물에 처박히든 용암에 처박히든 저 이동 능력자를 구슬려 북부로 향하게 만드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생각과 동시에 지안은 슬그머니 기운을 내뿜었다.
하지만 아론은 이미 이에 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기에 퍼진 가이딩 기운을 느끼자마자 그는 그대로 이능을 사용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뭐야. 지금… 도망간 거야?”
덕분에 당황한 건 지안이었다. 아론을 가이딩으로 사로잡기도 전에 그가 허공을 가르고 사라진 탓이었다. 잘됐다는 생각도 잠시, 웬 남자가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론이 고용한 용병. 레이크였다.
* * *
레이크는 일반인이었다. 차라리 능력자라면 가이딩으로 구슬려 보기라도 할 텐데. 하필 일반인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여기에 더해 지안을 더 환장하게 만든 건, 이동 능력자가 당최 나타나지 않고 있단 사실이었다.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도 잠에서 깬 첫날 이후로 그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새를 남겨둔 걸 보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정황상 근처에서 감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가이딩을 목적으로 사람을 납치한 주제에 모습을 감추다니. 설마 이럴 줄이야. 아무래도 그는, 가이딩에 취해 홀리듯 이동 능력을 사용하게 된 것을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첫날까지만 해도 그가 사라진 것쯤 아무 문제 없었다. 이동 능력자에게 고용된 용병은 성격이 좀 험악하긴 했으나 다소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어쨌든 한 장소에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삼황자 전하가 자신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다른 여관에서 눈을 뜨게 된 이후로, 첫날의 안일한 생각은 단번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건 딱 3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디로 이동될지 몰라 잠드는 것도 두려워졌고, 초조함마저 극에 다다랐다.
그도 그럴 게, 이 미친놈이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지안에게 크나큰 불안을 안겨 주었다. 정확히는, 이동 능력자가 삼황자 전하의 특성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서 이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이 예측이 들어맞을까 봐 겁이 났다.
‘그럴 리 없어.’
지안은 애써 최악의 상황을 모른척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견고한 감옥을 놔두고 여관을 전전할 리 없지 않나. 이동 능력자를 넌지시 떠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어쨌든 눈 뜨고 당할 순 없는 노릇이라, 지안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마다치 않았다. 마을의 치안대나 여관의 종업원, 경비병을 붙잡고 도움을 요청한 것만 해도 수차례였고, 줄줄이 실패해서 그렇지 밤중에 몰래 빠져나가려 시도하거나, 잠을 자지 않으려고 허벅지를 비틀어 꼬집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거기에 더해 지난 3일간 도망치려 시도한 횟수를 헤아리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정도였다. 하지만 뭘 시도하든, 번번이 어디서 보고 있는지 모를 이동 능력자의 이능에 의해 침대에 처박히거나 지푸라기 위에 내던져졌다. 그렇게 힘만 빼고 여관방의 침대 위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참다못한 지안은 레이크의 양심에 호소해 보기로 했다.
다만…… 말을 꺼내기에 앞서 용기가 좀 필요했다. 그는 누가 봐도 남다른 덩치와 험상궂은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이었고, 성격과 외형이 정확히 일치했다. 때문에 그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말을 꺼낼라치면 노예상에게 매칭률 검사기를 돌려달라 호소하다가 얻어맞은 기억이 절로 떠올랐다.
그때처럼 조롱당하고 무자비하게 얻어맞지 않을까 겁이 났다. 게다가 3일간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말도 안 붙였던 상대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그는 이동 능력자에게 고용된 감시자였다.
하지만 흔들어 볼 사람이 그밖에 없었다. 몇 차례의 고민 끝에 지안은 사람이 가장 너그러워진다는 식후를 노렸다. 좁은 방 안이 아닌, 넓게 트인 식당에 있다는 것도 안심과 함께 약간의 용기를 주었다.
“레이크.”
“안 됩니다.”
지안은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아니……. 제가 무슨 말을 꺼낼 줄 알고 안 된다고 하시는 건데요.”
“모르시나 본데, 세상에 용병만큼 눈치 빠른 놈들은 없습니다. 그렇게 주저하는 얼굴로 말을 거는 걸 보면 분명 제가 들어드리기 곤란한 용건이겠지요.”
허를 찔린 기분이었으나 지안은 침착하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말하기도 전에 거절당한 처지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할 순 없다.
“곤란한 부탁 하려는 거 맞아요. 그런데 지금 레이크는 범죄에 이용당하고 있어요.”
진지하게 꺼낸 말이었건만, 돌아온 건 콧방귀였다.
“제가 그런 것도 모르고 의뢰를 맡았을 것 같습니까? 내게 도움이라도 청하려는 모양인데. 관두십시오. 나는 돈을 받고 고용된 입장입니다.”
“그런….”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태도에 질린 것도 잠시. 감각 안으로 낯선 에스퍼의 파장이 걸려들었다. 불시의 행운에 눈을 빛낸 지안은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
느껴지는 파장은 총 다섯. 가까워지는 속도를 보아 말 같은 이동 수단을 가진 것 같았다. 마침 방향도 이 마을이 있는 쪽이었다. 삼황자 전하나 공작님의 파장이 아닌데도 반가움에 눈물이 다 나려 했다.
그간 자신은 후미진 마을과 허름한 여관만 골라 이동당했다. 이동 능력자가 이처럼 한적하고 인구밀도가 적은 곳만을 고르고 골라 이동한 건, 아마 독점을 위해서. 혹은 다른 능력자들과 날 두고 다툼을 벌이게 될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쨌건, 분쟁이 일어나면 도망치기 용이해진다.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지안은 곧바로 방사 가이딩을 펼쳐 능력자들을 제가 있는 쪽으로 유인했다.
저들이 이동 능력자를 해치울 만큼 강하지 않아도 좋고, 노예상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악인이라도 좋았다. 중요한 건 능력자인 저들이 가이드인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파장으로 보아 상위 능력자는 아닌 것 같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감시역인 레이크쯤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쟁이 일어나는 그때가 기회였다.
레이크 혼자만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분명 이동 능력자가 나타날 것이다. 그가 개입하는 순간을 노려야 했다. 이동 능력자를 가이딩으로 사로잡은 후 북부로 이동하길 종용하는 거다. 만일 이 시도가 먹히지 않는다면…… 그가 죽건 말건, 각인 후 파괴하는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한 지안은 자신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심해야 했다. 만약 정말로 그래야 할 상황이 닥치면?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미 방사 가이딩으로 기운을 흘린 뒤다. 능력자들의 파장 역시 미친 듯한 속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차오르는 긴장에 침을 삼킨 지안은 묵묵히 검을 손질하는 레이크에게 다시 한번 매달렸다.
“레이크. 정말로 저를 도와주실 생각,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당신을 고용한 고용주가 죽거나 의뢰를 취소해도?”
의미심장한 지안의 말에 레이크는 검을 손질하는 걸 멈추고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의뢰주, 밤까마귀 길드의 주인을 떠올렸다.
말하는 걸 보아 여차하면 아론을 죽이는 것도 불사하려는 모양인데……. 말만 그럴싸하지, 비실비실 힘도 없는 아가씨가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설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 아가씨는 날붙이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