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빛나는 황금 마차에서 내려온 알레인이 성녀를 거칠게 마차 아래로 끌어 내리며 소리쳤다.
“젠장. 이멜다. 이자는 성녀가 아니다! 황녀 이비엔 테리, 읍…!”
다음 순간 이멜다는 황제의 입을 다급히 틀어막았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나서서 대처한 것이다. 기사도 아닐진대 놀라운 순발력이 아닐 수 없었다.
알레인의 입을 뭉개듯 막아버린 이멜다는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하고선 경악했다.
‘성녀가, 성녀가 아니라고? 사라진 황녀가 사실은 성녀였다고?’
아니,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렇게 대놓고 떠들다니! 이멜다의 고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쓸모없는 입 닥치세요, 폐하.”
“으……으읍?!”
“에다의 성녀가 황실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려 즉위식에 저 여자를 대동한 걸 그새 잊으셨습니까? 제 계획을 다 망칠 셈이세요?”
빠르게 속삭인 이멜다는 오물을 밀어내듯 알레인의 얼굴을 제 손에서 떨쳐냈다. 손바닥에 남은 기분 나쁜 온기를 털어낸 그녀는 언제 황제를 밀쳤냐는 듯 부드러운 손길로 넘어지려는 그를 다시 붙잡아 세웠다. 그런 뒤 곧바로 이비엔을 향해 돌아섰다.
거칠게 마차에서 끌어 내려진 황녀를 향해 한껏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이멜다는 이비엔의 옷차림을 정돈해주는 척 다정히 소매의 구김을 펴고 어깨를 털었다. 성녀와 황제의 다툼을 중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 달랐다. 잔뜩 목소리를 낮춘 이멜다가 물었다.
“폐하의 말이 사실입니까?”
“…….”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저 아래에서부터 격분을 끌어올린 것 같은 목소리였다. 흔들리는 이멜다의 눈동자를 본 이비엔은 짧게 조소했다. 참으로 딱하지 않은가. 이미 확신하고 있으면서 묻다니. 천하의 이멜다 에를랑겐도 평정심을 잃을 때가 있었다.
“아마 그럴걸?”
이비엔의 목소리에 이멜다의 입술이 비틀렸다.
“……뜻밖이군요. 저는 그간 전하와 저의 지향점이 같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지금도 같아. 나는 여전히 지안이 제도에 남아 주길 바라고 있고,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지.”
“그런데, 왜, 이런 짓을?”
씹어뱉듯 질문하는 이멜다를 향해 이비엔은 차분히 웃어 보였다.
“간혹 스스로를 불사르는 선택이란 걸 알면서도 행해야 할 때가 있지. 내겐 지안을 놓아주는 게 그것이었어.”
“이해할 수 없군요. 호각을 바꿔치기한 사람이 전하란 건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체 왜?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셨죠?”
“잘 모르겠군.”
정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표면적인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지안이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 해서. 여기 있으면 이용당하기만 할 게 뻔해서.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더 단순했다.
그냥, 지안이 바라는 일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잘못을 만회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내 주었다.
분에 찬 이멜다가 말했다.
“그녀를 앞세워 황성의 위엄을 드높이는 데 찬성한 건 전하셨어요.”
“그랬지.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아무리 겁에 질렸다지만 네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아 버리다니……. 그래선 안 되는 거였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제안을 받아들인 건 전하셨습니다. 성녀가 놓아달라고 사정을 하든 설득을 하든, 전하라면 흔들리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요. 폭주라도 하고 싶으셨습니까? 이득과 손실을 계산하는데 누구보다 빠르신 분이 이런 멍청한 짓을 하시다니요.”
“멍청한 짓이라.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런데, 말해봤자 너는 몰라.”
“얼굴은 어떻게 한 거죠?”
“마법약을 먹었지. 곧 약효가 다 할 거라, 오늘 밤 연회에서 지안의 얼굴로 등장하는 건 무리일 거다.”
그러니 미리 핑계를 마련해두는 게 좋을 거야.
이어지는 이비엔의 목소리에 이성의 절반이 휙 날아갔다. 이멜다는 간신히 그 나머지를 붙잡고서 물었다.
“성녀는 어디 있습니까.”
“관심 꺼.”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나도 몰라.”
“전하!”
“정말로 몰라. 알았다면 진작에 지안을 찾으러 갔지, 내가 왜 여기 있겠어? 그리고 좀 진정하는 게 어때? 기껏 황제 폐하를 입조심시킨 보람이 없어지겠어.”
뻔뻔스러운 작태로 이멜다에게 주의를 준 이비엔은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주먹을 보고서 작은 승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여전히 모든 상황이 최악에 가까웠다.
최소한 의지나마 할 수 있었던 선황 폐하가 죽었다. 지안은 어디에 있는지, 오라버니와 공작이 흔적이나마 찾았는지 어떤지 알 수조차 없는 데다, 신탁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봤자 높은 확률로 믿지 않을 게 뻔하지 않나. 황녀의 미친 소리 정도로 치부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더는 나빠질 일도 없어서 그런 걸까. 마음이 무서울 정도로 홀가분했다. 지안을 놓아주겠다고 결심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건 곧 죽음을 각오한다는 거니까.
그래서 그런지, 황녀로서의 체면과 처지 같은 것들을 고민해 온 지난날이 몹시 하찮게 느껴졌다. 제게 정말 죽음을 불사하는 각오가 있긴 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평소라면 조금쯤은 섬뜩하게 느꼈을 이멜다의 눈빛도, 협박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오늘 하신 선택,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경고를 남긴 채 이멜다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뒤돌아선 즉시, 황녀가 자신을 붙잡아 왔다.
“잠깐 기다려 봐, 이멜다.”
“뭐죠?”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이멜다는 찌푸린 얼굴로 황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질문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만일 세상이 망한다면, 이유가 뭘까?”
기막힌 질문에 이멜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황녀는 지금 나를 약 올리는가? 도무지 대답할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질문의 맥락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시하기엔 어쩐지 눈빛이 무거웠다.
“내가 기껏 상상할 수 있는 건 능력자들이 줄지어 폭주한다거나, 아니면 북부의 몬스터들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다거나, 그도 아니면 전염병? 고작 이런 것들뿐이어서 네게 묻는 거야.”
지안도 없고, 세상도 곧 망한다니…… 이참에 황족 노릇이나 제대로 해 볼까 해서.
이어지는 뒷말에 이멜다는 기가 찬 얼굴로 이비엔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황녀의 안중에 자신은 이미 없었다.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한 질문인지 황녀는 침울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멜다는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갔다. 황성의 바로 코앞까지 빽빽이 들어찬 능력자들이 간절한 얼굴로 목이 터져라 저마다의 고통을 호소하는 중이었다. 간신히 질서가 유지되고 있긴 했지만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다. 누군가 선동하거나 과열된 분위기가 격발되기라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될 것이다.
‘질서 유지를 핑계로 병사들을 좀 더 배치했어야 했나?’
아니, 아니다. 고작 사병들을 좀 푼다고 해결될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이멜다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본래라면 이쯤에서 성녀에게 능력자 한둘쯤을 축복하라고 해 공표를 확실히 했을 것이나……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 *
비몽사몽한 채로 눈을 뜬 지안은 몸을 뒤척이다 말고 이마를 짚었다. 뭔가 축축한 게 이마에 올려져 있다 했더니 물수건이었다. 곧이어 차례대로 바로 옆에 놓인 대야와 의자에 기대 잠든 납치범과, 낯선 여관방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슴푸레한 게 새벽인 것 같았다.
느릿하게 돌아가던 사고는 차츰 빠르게 명료해졌다.
나는 어째서 여관방에 있는 걸까. 분명 나무뿌리 아래의 동굴에 숨는다고 숨었는데, 눈을 떠 보니 침대 위다. 정황상 결국 발각당한 모양이었다.
잘 생각해 보니 정신을 놓았다 차렸다 하며 앓던 중.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긴 했다. 보아하니 나를 간호라도 해 준 모양인데……. 전혀 고맙지 않다.
누운 채로 아론을 힐끔거린 지안은, 그가 한 번도 눈을 뜨지 않는 것을 보고 다소 안도했다. 아무래도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회는 이때였다. 결심한 즉시 지안은 천천히 움직여 침대에서 벗어났다. 운이 좋으면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나 들키면 화장실을 가려 했다고 하지 뭐.
기듯이 침대에서 내려온 지안은 자세를 낮춰 천천히 아론을 지나쳤다. 신발 같은 것을 챙겨 신을 정신은 없었다. 그보단 나무 바닥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움직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문고리를 천천히 잡아 돌린 지안은 문이 잠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쾌재를 불렀다.
천천히 문고리를 돌리자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끝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지안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조용히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문틈 사이로 이동 능력자를 한 번 더 살폈으나, 그는 의자에 기대 잠든 자세 그대로였다.
‘진짜로 잠들었나 봐. 다행이다.’
안도한 지안은 그대로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계단에 막 발을 디디려던 찰나, 무언가 발을 턱 걸었다. 영락없이 계단 위로 굴러떨어질 위기였다.
“헉!”
놀라 두 팔을 든 그 순간, 공간이 쩍 갈라졌다. 지안은 순식간에 침대 위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