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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199)

120화

응석받이 막내 황녀로 태어나 늘 황제의 사랑을 받았다. 태어나 단 한 번도 황좌에 관심을 가진 적 없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었다.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최소한의 지지 세력은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지금은 지안의 흉내를 내는데 충실해야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나는 성녀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지만, 소란이 일어나든 말든 말을 타고 지안을 찾으러 가고 싶지만……. 그보다는 신탁을 알리는 게 먼저였다.

대륙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지 않나.

이비엔은 미심쩍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황좌에 앉은 알레인을 바라보았다. 마침 에다의 고위 신관이 그의 머리 위에 황관을 씌우는 중이었다.

원래도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워낙 멍청한 짓을 일삼아서 오라비라고도 부르지 않았던 일황자. 그의 자신만만하고 거만한 얼굴을 보자 새삼 아버지의, 폐하의 죽음이 뼈아팠다.

폐하께서 살아 계셨다면 고민할 것 없이 신탁을 고하고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뭔가를 걱정할 필요도, 어떤 신탁이 내려오든 두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레인은 다르다. 모든 걸 이멜다에게 맡긴 무능한 황제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레인은 제국의 존립을 지킬 수 있을 만한 재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신탁을 알려야 하는 걸까.

‘역시 이멜다 에를랑겐뿐이겠지.’

기막힌 일이었다. 그녀와 손을 잡은 걸 무척이나 후회함에도 불구하고, 신탁을 공유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이멜다뿐이었다.

생각하던 중. 성대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황관을 쓴 알레인이 홀을 가로질러 나아가자. 이비엔은 강제로 그 뒤를 따라야 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붕 없는 마차였다. 테리온을 상징하는 황금 문양이 박힌 것으로, 즉위식에서 빠트릴 수 없는 퍼레이드를 위해 준비되었다. 중요한 행사 때나 간혹 쓰이곤 하는 이 황금 마차에는 오직 황제와 황후만이 탑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바로 그 예외를 깨뜨리고 황제와 성녀가 함께 이 마차에 오를 예정이었다. 본래는 이멜다가 탑승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녀는 암막 뒤에서 움직이는 게 자신의 성미에 더 들어맞는단 이유로 이를 지안에게 떠넘겼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능력자들에게 성녀가 황실의 편에 서서 기적을 베풀리란 걸 알리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성녀가 황제와 함께 마차에 올라 제도를 한 바퀴 도는 것만큼이나 좋은 선전이 어디 있겠는가? 보여주기식으로 딱 좋았다.

‘이대로 제도의 대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도중에 마법약의 효과가 다한다면…… 참 볼만하겠군.’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비엔은 떠밀리듯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이제 막 황제가 된 알레인과 성녀 노릇을 하고 있는 이비엔을 태운 채 천천히 출발했다.

내리쬐는 태양 빛 아래, 기사와 근위병들이 통제하는 대로에 황성의 마차가 등장하자 큰 함성이 울렸다. 모여든 제국민들은 새롭게 등극한 황제를 열렬히 환영했다. 능력자들은 황제의 옆에 보란 듯 서 있는 성녀를 보며 감격에 몸을 떨었다.

“황제 폐하 만세!”

“성녀님 만세!”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들었음에도 퍼레이드는 순조로웠다. 황실의 기사들이 통제를 잘해 준 덕분이었다.

다만 보통의 퍼레이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열띤 환호성 사이에 고통 어린 외침이 간간이 섞여들었단 사실이었다. 자꾸만 호위를 뚫고 달려드는 능력자들 때문에 마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했다.

앞을 가로막은 능력자들의 외침은 대개 비슷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당장 몇 시간 후에 폭주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성녀님! 한 번이면 됩니다. 신전에서처럼…… 그때처럼 손을 잡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성녀님! 성녀님!

다들 지안을 찾았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고, 누군가는 애처로이 애원했다. 성녀가 나타났으니 더는 능력자들의 폭주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한 제국민들 역시 이들의 편이었다.

이비엔은 묵묵히 그 말을 들으며, 이곳에 지안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간절히 쏟아지는 시선들. 처절한 애원과 바람. 지안이 끝끝내 자신의 세계로 도망치려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들 눈이 돌아가 있었다. 기사들에게 제압당하는 와중에도 피 끓는 목소리로 지안을 외쳐 부른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나니 더는 폭주의 고통을 견딜 수가 없게 된 것이리라.

발현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운 좋게 지안의 가까이에 머물 수 있었던 자신과 달리, 저들은 오랜 시간 두려움에 시달려 왔을 것이다. 해가 지날수록 배로 불어나는 고통을 단 한 번의 가감 없이 버텨야 했겠지.

이비엔은 착잡한 얼굴로 이 모든 걸 지켜보았다. 언제 행렬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열기였다.

그러던 순간, 칼날 같은 바람이 날아와 이비엔의 머리카락을 끊어냈다.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은 부자연스럽게 둥실 떠올랐고, 이내 누군가가 잡아채 달아났다.

범인은 그리 오래 도주하지 못했다. 상황을 목격한 주변의 능력자에게 곧바로 제압당했기 때문이었다. 격분한 능력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범인을 향해 이능을 사용하거나 발길질을 했다. 감히! 미친놈아! 무슨 짓을 한 거야! 난리도 아니었다.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소란한 와중이었음에도 이비엔은 끄윽― 숨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먼 거리였지만, 축 늘어진 능력자의 손에 끝내 단단히 붙잡혀 있는 한 줌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광경에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보다 못한 알레인이 입을 열었다.

“못 봐 주겠군. 이래서야 오늘 내로 제도를 다 둘러볼 수나 있을지……. 내키지 않더라도 누구 하나 본보기로 축복해 주면 안 되겠나?”

알레인의 말에 이비엔은 픽 웃어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었다.

“난 못해.”

“그러고도 성녀라 할 수……. 잠깐, 지금 그 목소리는…!”

“놀란 건 알겠는데 표정 좀 관리하지 그래. 내가 성녀가 아니란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폭동이 일어나고도 남아. 뭐, 즉위식을 망치고 싶은 거라면 계속 놀라도록 하고.”

이비엔의 말에 나지막이 욕설을 지껄인 알레인이 말했다.

“넌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이비엔.”

“그러게. 난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씁쓸히 대답한 이비엔은 좌중을 둘러보며 한탄했다. 이곳에 지안이 있었다면 기운을 퍼뜨림으로써 단숨에 혼란을 진정시켰을 것이다.

그다음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안은 구원자가 된 채로 영영 위스로데 대륙에 발이 묶이고 말았을 것이다. 아마도 지안은…… 바로 이 상황을 목도하는 걸 피하기 위해 그토록 북부행을 고집한 것이리라.

이비엔은 경악한 알레인을 외면한 채 귓불을 더듬었다. 귀 언저리에 화끈한 통증이 인 탓이었다. 아무래도 머리카락이 잘리던 순간 귓전의 피부가 함께 베인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피가 묻어난 손가락을 보며 이비엔은 짧게 절망했다. 지난 수백 년간, 오데르겐 공작가가 가이드의 존재를 비밀에 부쳐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 *

즉위를 알리는 황제의 행렬은 전진과 중지를 반복한 끝에 겨우 제도를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시간이 예정보다 배는 더 걸렸지만 끝내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호위가 뚫리는 일도 없었다. 정예 중의 정예로 기사들을 배치한 효과가 톡톡히 발휘된 것이다. 이만하면 흡족한 결과였다.

이멜다는 흰 차양을 친 금빛 마차가 천천히 황성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며 흐뭇이 웃었다. 행렬의 뒤를 구름처럼 따르는 능력자들을 적재적소에 재배치할 생각을 하니 다소 골치가 아팠지만……. 성녀라는 구심점이 생긴 이상, 오합지졸처럼 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능력자들을 단번에 황실 아래로 복속시킬 수 있으리라.

물론 몇몇 문제가 남아 있긴 했다. 능력자들과 성녀가 가까워질 일이 없도록 안전장치를 꾸며야 했고, 전날 밤 제도를 빠져나간 삼황자와 공작도 제거해야 했다.

인외의 무력을 지닌 공작과 화염을 다루는 삼황자를 제거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행렬을 뒤따르는 능력자들의 수를 보니 예상외로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보통의 기사라면 모를까. 비등한 능력자라면 공작과 삼황자도 상대하기 버거울 터.

잘만 하면 여러 문젯거리를 한 번에 치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간 능력자들이 일으킨 제국의 병폐를 없애는 것도, 그들의 폭주로 인해 흉흉하던 민심도 한 번에 해결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폭주하지 않는 능력자’가 생긴다.

그간 능력자들은 천대받을지언정 마법사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고, 금화 역시 어마어마하게 요구했다. 스스로의 수명이 짧은 걸 아는 만큼 앞뒤 안 가리는 자들이 많았으며, 그만큼 성질이 거친 자들이 태반이라 다루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괴팍하기로는 마법사가 제일이라면, 난폭하기로는 능력자가 제일이었다.

게다가 자칫 폭주하기라도 하면 웬만한 영지나 마을 하나쯤은 송두리째 몰살시켜 버리니, 그야말로 온 대륙의 골칫거리였다. 이능이라는 장점만큼 단점 역시 몹시 도드라져 제국민들은 대부분 이들을 기피했다.

삼황자를 필두로 한 몇몇 능력자들과 그들이 가진 잠재력을 알아본 소수의 귀족들이 바로 그 비난과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능력자의 폭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들을 저주했고, 심하게는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제국민들이 단체로 난민으로 전락하여 마을 전체가 능력자라면 치를 떠는 일도 빈번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간 능력자들의 인기가 반짝 높아질 때는 대개 전쟁이 터질 때나, 처리하기 힘든 몬스터가 나타날 때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사정이 다르다. 성녀가 있는 이상, 안전하게 능력자를 부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이득보다 더욱 중요한 건…… 카리나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단 점이다.

에다의 성녀가 있는 이상 카리나는 죽지 않는다. 바로 이 명제가 이멜다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는 행렬을 마치고 돌아온 알레인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이비엔의 정체를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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