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불쾌한 얼굴로 지안의 곁을 지키고 있던 아론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날갯짓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주의를 끈 건 길드원이 날려 보낸 까마귀였다. 손바닥만 한 천장의 창을 통과하지 못해 난감해하던 까마귀는 아론이 자신을 올려다보자 기다렸단 듯 까악―! 까악―! 울음을 토해냈다.
그것을 본 아론은 창문을 조금 더 크게 만들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공간을 갈랐다.
순식간에 저택의 지붕으로 이동한 아론이 팔을 들어 올리자, 까마귀가 기다렸단 듯 그의 팔목에 앉았다. 그는 까마귀의 부리에 나무 열매를 물려준 뒤 발목에 매달린 쪽지를 펼쳐 들었다.
[황성에서 벗어나 북서쪽으로 도주 중. 기사단과 충돌. 다수 사망.]
한 줄의 간결한 내용이었지만 정황을 파악하기엔 그것으로 충분했다. 황성에 심어둔 길드원에게 삼황자와 공작의 동태를 실시간으로 전달하라고 명령해둔 참이었다.
성녀는 사라진 데다, 황성에 남아봤자 반역자로 몰려 죽임당할 일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 살기 위해서라도 곧장 황성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 기사단에게 들켜 추적당하게 된 것일 터.
다만 그들의 도주 방향이 북서쪽이란 게 마음에 걸렸다. 하필 이 저택이 있는 방향인 탓이었다. 더구나 기사들이 다수 사망했다니……. 그런 식으로 굴면 반역 누명이 더더욱 확고해질 거란 걸 잘 알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알 수 없는 찝찝함에 아론은 직접 공작과 삼황자의 움직임을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각한 즉시 공간을 가른 그는 순식간에 제도의 어느 건물 지붕에 올라선 채 파가디안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말을 탄 기사들이 바삐 제도를 벗어나는 걸 보니 그새 제도의 성벽을 넘은 모양이었다. 피 묻은 근처의 흙바닥을 잠시 내려다본 아론은 이능을 사용해 전투와 추격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까마귀를 날려 보냈다. 상황을 살피고 의심을 해소하는 데엔 날짐승의 눈 만한 것이 없었다.
까마귀와 시야를 공유한 후 잠시 기다리자, 성벽 너머 너른 벌판을 가로지르며 기사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공작과 삼황자의 모습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아낌없이 이능을 사용하는 삼황자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 창! 창을 가져와!
―젠장. 저거 붙잡으려면 같은 능력자여야 한다고!
―으악! 불! 불 조심해!
누군가 주의를 주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몇몇은 삼황자가 날려 보낸 화염구에 정통으로 맞아 낙마해야 했다. 꽤나 치열한 양상이었지만, 공작과 삼황자라면 별 어려움 없이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무력에서부터 격차가 컸다. 물론 추격에 나선 기사들의 머릿수가 족히 백에 달하는 만큼 결과를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론은 주의 깊게 일리아스와 악시온의 도주로를 지켜보았다. 북서쪽은 반역자가 도망치기에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아예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공작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라 이해했을 텐데, 애매하게 빗겨 난 방향이 신경을 긁었다.
“쯧…. 성녀의 말만 아니었다면 그냥 무시했을 것을.”
하지만 바로 그 무시가 되질 않았다.
―전하는 제가 어디 있는지 알잖아요. 나 여기 있어요.
바로 그 말. 혼잣말이라기보단 호소에 가깝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잠시 공작과 삼황자를 지켜본 아론은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쉼 없는 질주. 고스란히 남는 이동 흔적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움직임.
분명했다. 저들은 정확히 자신의 저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것도 최단 거리만 골라서.
하지만 속단하기엔 아직 부족했다. 잠시 고민한 아론은 공간을 갈라 저택으로 돌아간 후 지안을 들쳐 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지안과 함께 길드의 은신처에 들어와 있었다. 제도 밖 저택에서 제도의 은신처까지 단번에 이동을 감행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까마귀를 통해 공작과 삼황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마침 자신의 길드는 제도 안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이는 북서쪽의 반대편에 가까운 위치다. 이유 모를 찜찜함이 그저 착각이라면 삼황자와 공작은 그대로 북서쪽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뒤돌아서겠지.’
그렇게 생각한 즉시, 거짓말처럼 삼황자와 공작의 말이 멈춰 섰다. 뭔가 당황한 듯한 움직임에 아론은 까마귀를 낮게 날려 보냈다. 그러자 일리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위치가 바뀌었어!
―어딥니까.
―거의 반대편이다. 다시 돌아가야 해. 미치겠군. 기껏 기사들의 추격에서 벗어난 참인데…….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곧장 기수를 돌리는 삼황자와 공작의 모습에 아론은 서둘러 지안을 끌어안고 조금 더 남쪽으로 이동을 감행했다. 지난번처럼 지안이 삼황자의 이능에 감싸이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처럼 어처구니없이 그녀를 빼앗길 순 없었다.
게다가 삼황자가 말하는 걸 봐선…… 아무래도 그에게 추적의 이능이 있는 것 같았다. 희귀한 능력이지만, 그런 이능을 지닌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번거롭게 됐군.”
하지만 약간의 번거로움으로 의혹과 찜찜함을 해소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서둘러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삼황자에게 추적의 이능이 있는 줄도 몰랐을 테고, 그의 기습에 당해 다시금 불에 감싸인 성녀를 봐야 했을 것 아닌가.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돋아 아론은 지안을 더욱 단단히 껴안았다. 황성의 권력자들에게서 그녀를 빼앗은 지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이제야 간신히 손에 넣은 참인데 맥없이 잃을 순 없었다.
노예 경매장에서 지안을 본 순간부터 오늘이 오기만을 고대해왔지 않나. 그런 그녀를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잔뜩 신경이 곤두섰다.
뜻밖의 상황에 이를 간 아론은 안심하지 못하고 몇 번을 더 이동했다. 삼황자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세 번쯤 공간을 갈랐을 때. 아론은 깨달았다. 이동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폭주의 위험이 잇따랐는데…… 평소와 달리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진 않았다. 지안. 그녀 때문인가.
평생을 괴롭혔던 이능의 격통이 고작 이 작은 여자 하나로 씻은 듯 사라지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아론은 조금 더 단단히 지안을 들쳐 안았다. 그것만으로도 시시때때로 발작처럼 찾아들던 폭주의 고통이, 죽음의 그림자가, 바람을 만난 재처럼 사라졌다.
“으음…….”
열이 올라 신음하는 목소리에 심장이 부드럽게 고동쳤다. 마치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아픈 사람을 상대로 떠올릴 만한 생각은 아니다만, 기적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지만 지금 자신이 누리는 평온함은 그녀가 깨어나면 곧바로 사라질 안식이었다. 먹여 두었던 약 기운이 다하면 곧 정신을 차릴 테고, 그즉시 격렬히 반항해올 게 뻔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약을 더 먹여서 계속해서 잠들어 있도록 만드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까. 아론은 난감한 눈으로 미동 없이 늘어진 지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와 그녀를 납치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선택지 따윈 없었다. 자신에게 납치란, 자연스러운 선택지였다. 사실상 유일한 방안이기도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친숙해진 건 폭력이고, 능숙해진 건 살인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거라면 모를까, 평범하게 접근하고 평범하게 친분을 쌓는 것에는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회의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엉터리 같은 우연으로든, 잘 만든 계획으로든, 한낮의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서 그녀와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땅 아래로 물이 스미듯 접근하고, 평범한 일상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만약’이란 이름을 빌린 가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것이 바로 후회라는 걸, 아론은 뒤늦게 깨달았다.
깨달았으나 인정할 수 없었다. 빈민가의 뒷골목에서 자라온 그에게 친분이란 계란 껍질보다 더 얄팍하고 연악한 것이었다. 잠깐 모습을 드러낸 후회는 곧바로 잡념이란 이름이 되어 아론의 기억 한 곳에 묻혔다.
벌레를 밟듯 제 안의 후회를 지워낸 아론은 냉담한 눈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구잡이로 이동한 탓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건축양식을 보아하니 남부 백작령에 속한 마을 중 하나인 듯했다. 규모가 조촐하긴 했으나 찾아보면 여관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는 제도와의 거리를 잠시 가늠해본 뒤, 자신이 꽤 시간을 벌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곧장 여관으로 향했다. 이틀을 꼬박 달린다 해도 삼황자와 공작이 이곳에 도착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지리상으로 불가능했다. 삼황자의 이능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지도 못할 것이다.
계산을 마친 아론은 곧장 여관방을 잡은 후 침대 위에 지안을 내려놓았다. 이대로 축 늘어진 성녀의 옆에 누워 그대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혹시 모르니 밤새 삼황자와 공작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
* * *
이비엔은 울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덩그러니 홀로 첨탑에 남겨진 기분이 처참했다. 그러나 오래 좌절하는 건 자신의 성격이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이나,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희망도 남아 있었다.
그래. 이동 능력자가 지안을 납치하긴 했지만, 공작과 오라버니가 곧바로 그 뒤를 쫓지 않았나. 두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안을 되찾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섣불리 좌절하기엔 일렀다.
이비엔은 서둘러 눈가를 닦았다. 한바탕 실컷 울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회가 물러난 자리에는 조금씩 각오가 들어찼다. 지금 당장 자신이 해야 하는 건…….
‘이멜다를 속여야 해.’
당장 무언가를 하기보단 기존의 계획을 따르며 자리를 지켜야 했다.
첨탑을 감시하던 기사들은 오라버니와 공작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이 지안을 찾아 황성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신뿐이었다.
지안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상, 이멜다는 삼황자와 공작이 성녀를 챙겨 도주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아무런 방해 없이 지안을 추적할 수 있도록, 마법사가 준 약물의 효과가 다할 때까지만이라도 이멜다를 속여야 했다.
처음부터 지안을 북부로 보내기 위해 저지른 일 아닌가. 바라던 결과도 얻지 못했고, 마주 웃어 주는 지안의 모습도 보지 못했지만, 초라한 사과나마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