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하지만 입막음을 당할 가능성이 대폭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건 별수 없었다. 진료를 위해 손을 대는 것조차 질색하다니. 그렇게나 아끼는 여자라 이건가? 길드원들이 은근히 권유할 때도 늘 무관심하더니…… 따로 정부를 두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곱상한 여자가 취향이었을 줄이야. 자말은 속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이 올라 병색이 완연한 탓도 있겠지만, 암만 봐도 저 여자는 아론 베르그만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 * *
아론은 가라앉은 눈으로 지안의 잠꼬대를 들었다. 약효 덕분에 푹 잠든 게 분명한데도 지안은 끙끙거리다 말고 공작을 찾다가, 다시 삼황자를 찾길 반복했다.
나무뿌리 아래 어설프게 숨어서 울 때도 이랬다. 당시엔 화가 나서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바보 같은 잠꼬대를 계속 듣고 있자니 조금 이상했다. 무의식중에도 그들이 반드시 자신을 찾아내리란 확신을 가진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나.
마치 삼황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기라도 하듯 웅얼거리는 지안의 모습에 아론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무언가 의심스러웠다. 뭔가 마음에 걸리긴 하는데. 특정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아론이 알기로 그의 저택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층 저택 속에 비밀 공간을 만든 작업자는 모두 죽었고, 저택의 매입도 비밀리에 진행했다. 파비안조차 이 은신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방문자라곤 지금 자말이 유일한데, 그조차 이동능력으로 데려온 것이라 저택의 위치에 대해선 일절 아는 것이 없다. 저택의 정확한 위치나 그 안에 숨겨진 공간을 아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삼황자가 성녀를 되찾으러 올 일 따윈 없다. 만일 온다고 해도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갇힌 그녀를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저 잠꼬대는 헛된 희망에서 비롯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지안의 입술이 힘없이 달싹였다.
“공작, 공작님…….”
희미한 중얼거림에 아론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지안의 이마에 얹은 물수건을 갈아 냈다.
마음 같아선 수건을 이마에 올릴 게 아니라 저 입을 틀어막는 데 쓰고 싶었다. 뺨을 친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이라면 그녀도 기꺼이 동의하리라. 성녀만 아니었다면 진작 그렇게 하고도 남았다.
“젠장.”
우스운 건, 제가 어째서 화가 나는지조차 알 수 없단 것이었다. 아론은 제 성질대로 손에 쥔 물수건을 거칠게 대야에 던져넣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안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도……돌아가고 싶…….”
눈꼬리를 타고 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에 베갯잇이 젖어갔다. 아론은 별수 없이 열에 달뜬 지안이 제 염원을 띄엄띄엄 늘어놓는 것을 들어야 했다. 대부분 귀 기울여 들을 가치 없는 횡설수설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나마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게 전부였다. 환자의 잠꼬대답게 간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섞이긴 했다. 자유, 지구, 라영 언니, 가이드, 집, 공작님, 침대, 협회, 전하 같은 단어들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잠자코 이를 주워듣던 아론은 잠깐 사이 초췌해진 지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성에서 데리고 나올 때만 해도 막 물에서 꺼낸 물고기처럼 기운찼는데, 잠깐 사이 병든 병아리가 될 줄이야. 물에 빠지고 숲 좀 헤맸다고 이 꼴이라니 기가 막혔다. 바짝 손톱을 세우고 반항하던 여자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아론은 짜증 어린 손으로 술병을 열었다. 이래서야 목적했던 축복을 과연 받을 수 있긴 할지 의심스러웠다.
저택에 가둬 놓은 뒤 적당히 협박하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불시에 주먹질을 당하는 정도의 충격을 주었던 그녀의 힘이 칼로 근육을 갈라내는 격통을 줄 만큼 강해졌을 줄이야.
진작 알았다면 계획을 수정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자신이 납치되었단 사실을 알자마자 격렬히 반항해온 지안 탓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그는 분명히 느꼈다. 고통을 안겨주다 말고 불현듯 부드럽게 바뀐 기세. 짐짓 다정한 척 미소 짓던 얼굴. 언제 근육과 장기를 난도질했냐는 듯 온화하게 변한 그녀의 힘에 감싸 안기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때 제도를 눈처럼 뒤덮었던 바로 그 기운이었다. 저주와 같았던 고통을 걷어가고 부서지는 육신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그 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어 아론은 길게 숨을 들이켜야 했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지안의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했다.
‘아론, 여긴 어디야? 제도 안이야?’
‘나가고 싶어. 나가게 해 줄 거지?’
고작 그 몇 마디에 홀린 듯 순종하고 말았다. 우습게도 거절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 사로잡혔다.
이쯤 되니 그녀의 정체가 성녀가 아닌, 전설 속 세이렌이라 해도 덮어놓고 믿을 판국이었다. 그만큼 강렬했다.
‘또다시 그런 식으로 내게서 바라는 것을 획득하려 든다면…….’
거부할 수 없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아론은 우울한 얼굴로 잠든 지안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성녀는 위험했다. 더는 기존의 계획으로 다룰 수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사냥감을 쫓듯 그녀를 추적했고 기어이 포획했지만, 어쩌면 사냥감은 그녀가 아닌 자신일지도 몰랐다. 만일 그녀가 또다시 같은 시도를 다시 해 온다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버티거나 저항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으리라. 부드럽게 밀려 들어오는 힘에 항거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사람을 얻었는데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한숨 쉰 아론은 다시 한번 지안의 이마에 올린 물수건을 갈아 내며 눈물이 말라붙은 지안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 * *
심장이 바닥을 뒹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일리아스는 단 하룻밤 사이 생생히 체득하게 되었다.
황자의 신분을 박탈당했을 때도, 기사들의 경멸 어린 감시를 받을 때도 멀쩡했던 심장이 긴장과 염려로 바싹 졸아들었다. 온몸의 피가 발아래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감옥에서 벗어나 눈앞의 첨탑으로 향할 때만 해도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다시 만나자마자 지안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네가 바란 대로 북부로 가겠노라고. 네가 살아왔던 세상으로 나 역시 갈 것이라고. 그렇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간 함께 가지 않겠냐는 지안의 말을 들으며 얼마나 몸이 달았던가. 얼마나 벅차올랐던가.
그러나 기습하듯 지안을 납치한 이동 능력자로 인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동 능력자를 찾아 죽였다는 이비엔의 말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아니, 어쩌면 황성 내에 지안이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을 놓은 자신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지안의 위치를 언제든 알 수 있다는 이유로 방심했다.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때때로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바빴다. 미지의 세상에서 지안과 함께 머무는 단꿈을 꾸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역의 누명을 벗는 것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안과 함께 떠나는 것뿐이었으므로.
그러나 이 모든 건 지안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이었다.
“되찾으러 간다.”
내 탓이라 오열하는 이비엔을 달랠 겨를도 없었다. 일리아스는 이비엔을 뒤로 한 채 뛰쳐나가 미리 준비해 둔 말 위에 올랐다. 일리아스를 뒤쫓아 온 악시온이 물었다.
“이전처럼 지안을 불로 감쌀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있어. 다만…… 위치는 대강 알겠군. 지안은 제도 바깥에 있다. 아주 멀진 않아. 하지만 만일 이동 능력자가 또 한 번 더 멀리로 이동을 감행한다면…… 이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목소리는? 목소리는 들립니까? 뭐라고 합니까!”
“젠장. 그것도 안 들려. 기절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상태이거나.”
미처 말하지 못한 삼황자의 짐작을 내뱉은 악시온은 곧장 제 몫의 말 고삐를 움켜쥐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황성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방향을 잡은 건 일리아스였다. 질주하는 말을 재촉하며 그는 이를 갈았다. 코앞에서 지안이 납치당했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다행히 정신을 집중하자, 이동 능력자에게 응수하는 듯한 지안의 음성이 끊어질 듯 말듯 간간이 들려왔다. 그러나 대부분은 토막 난 잡음에 가까워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간혹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올 때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가슴을 푹 주저앉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너한테 살려달라고 안 했어.
―악!
―전하. 저 좀…… 저 좀 데리러 와요. 윽. 으흑……. 전하는 제가 어디 있는지 알잖아요. 나 여기 있어요. 흡. 제도 바깥의 숲인데…… 어, 어두워서… 어딘지 모르겠어요……. 도와줘요.
지안이 처한 상황을 짐작하기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리아스는 이를 갈며 말의 옆구리를 거듭 걷어찼다.
하지만 아무리 거침없이 달려 나가도 지안은 여전히 멀리 있었다.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심장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울지 말라고 달래고 싶었다. 간절히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다.
일리아스는 닿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고삐를 죄었다.
“가고 있어. 가고 있다고…!”
그러니 기다려. 마지막 말을 삼키는 일리아스의 눈 위로 광채가 흘렀다.
언제 앞으로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데도 말이 아닌 달팽이를 탄 것 마냥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더더욱, 일분일초도 지체할 수 없었다. 위치나마 감각할 수 있는 지금 거리를 좁혀야 했다.
이 희미한 연결마저 끊긴다면 지안을 영영 잃어버릴 터. 이동 능력자가 제국의 끄트머리까지 도망치기 전에 지안을 되찾아와야 했다. 더도 덜도 말고 화염의 이능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만. 거기까지만 가닿으면 된다.
반드시, 반드시 되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