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절로 신음이 나왔지만, 고통은 잠시였다. 언제 이동 능력자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곧바로 아픔을 잊게 해 주었다. 넘어진 즉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까마귀를 찾은 지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일어났다. 다행히 머리 위를 날아다니거나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가 한 마리도 없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소리다.
넘어지면서 삐끗한 발목이 욱신거렸지만, 여기저기 피부가 쓸려 벗겨졌지만 상태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그보단 숨을 곳을 찾는 게 먼저였다.
마침 넘어지기 직전에 본 게 있었다. 스치듯 시야에 들어왔던 나무를 찾아낸 지안은 커다란 나무뿌리가 만들어낸 작은 동굴을 보고 반색하며 몸을 구겨 넣었다. 순간적으로 본 것이라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동굴이 있었다.
이제 보니 발목을 잡아챈 나무뿌리가 은인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몸을 숨길 곳을 발견하지 않았나.
안은 간신히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짐승이 사용하던 은신처인 듯 곳곳에 마른 이파리가 덮여 있었다. 약간 노린내가 났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수풀로 대충 앞을 가리니 꽤 그럴싸한 은신처라 지안은 그제야 쿵쿵 울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안 들켰겠지?’
불안한 얼굴로 수풀 너머를 집요하게 응시하던 지안은 문득 까진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과도한 긴장과 뒤늦게 몰려온 추위 때문인 듯싶었다. 한참 숲을 달릴 때는 몰랐는데, 물에 빠진 직후라 옷이 축축했다.
설상가상으로 기온마저 서늘한 편이었고, 젖은 옷은 효과적으로 체온을 앗아갔다. 하지만 갈아입을 옷도 없고, 한 벌뿐인 옷을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방법은 없다. 그냥 버텨야 했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보면 차츰 물기가 마를 것이다.
그래. 이대로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숨죽여 기다리면 된다. 삼황자 전하가 올 것이다. 지안은 부디 일리아스가 듣고 있기를 바라며 작게 중얼거렸다.
“전하. 저 좀…… 저 좀 데리러 와요.”
소리 내 말하니 울컥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정말로 곧이었다. 삼황자 전하와 공작이 오고 있었고, 황성에서 벗어나 북부로 갈 참이었다. 왜? 어째서 이렇게 돼 버린 걸까. 풀벌레 소리 사이로 간간이 억누른 울음소리가 섞였다.
“윽. 으흑……. 전하는 제가 어디 있는지 알잖아요. 나 여기 있어요. 흡. 제도 바깥의 숲인데……. 어, 어딘지 모르겠어요.”
훌쩍이며 눈물을 쏟아낸 지안의 입술이 달싹였다.
“……도와줘요.”
애처로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지안은 천천히, 오랫동안 울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그 울음은 작게 헐떡이는 숨소리로 변해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도움을 바란 지안의 바람대로, 마침 지안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있긴 있었다. 다만, 그는 일리아스가 아닌 아론이었다.
그가 이토록 지안을 빨리 발견해낸 이유는 단순했다. 한밤중의 수풀을 정신없이 헤치며 나아가느라 지안이 미숙하게 남긴 흔적 탓이었다. 풀이 누운 모양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론은 지안의 도주로를 뻔히 알 수 있었다.
찾아내는 것도 금방이었다. 나름 경계를 하는 건지 도망치다 말고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지만, 물까치 한 마리를 나뭇가지 뒤에 숨기는 것 정도야 아론에겐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폭주를 앞당기게 될까 봐 굳이 시도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는 이 숲의 모든 날짐승들과 시야를 공유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시야 공유가 가능한 건 어림잡아 스무 마리 이상. 시도해 보지 않아 짐작의 영역으로 그쳤을 뿐이지만…… 불가능하리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바로 그런 능력을 고작해야 새 한두 마리 다루는 것으로 그친 탓에, 전문 매사냥꾼도 아론이 다루는 날짐승만은 사냥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물며 그 상대가 지안이다. 추적에 이용한 새를 적절히 숨겨가며 다루는 것쯤이야 아론에겐 숨 쉬듯 간단했다.
새의 시야까지 빌린 이상 본격적인 추격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었다. 이동 흔적을 발견한 즉시 그녀가 몸을 숨긴 나무의 나뭇가지에 물까치를 앉혀 두기만 하면 그만이니.
그리고 바로 그 물까치를 통해 지안의 흐느낌을 고스란히 전해 들게 된 아론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겨야 했다. 기껏 구해 주었는데 뺨까지 얻어맞고 뒤이어 공격까지 받았다. 그러다가 이젠 삼황자를 찾기까지……. 기분이 더러웠다.
아론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나를 무슨 흉악범으로 아는군.”
물론 아론은 흉악범이 맞았다. ‘밤까마귀의 아론 베르그만’ 하면 적어도 뒷골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납치 역시 흉악범죄니 지안이 겁에 질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아론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흉악범이 아니었다. 죽이려고 납치한 것도 아니잖은가. 흉악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심각한 범죄는 따로 있었다. 인간의 짓이라 생각지도 못할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이 수두룩했다.
그에 반해 자신은, 밥 먹듯이 더러운 짓을 일삼긴 했지만 사람 장사는 하지 않았다. 일반인 역시 되도록 건들지 않았다. 기껏해야 약을 유통시키고, 보호세를 걷고, 길드를 운영하는 게 전부니 이만하면 꽤 건전하다고 해도 좋았다. 파비안이 알았다면 기준이 너무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겠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아론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겁에 질려 우는 여자를 달래는 재주가 자신에게 없다는 걸 아는 탓이었다. 차라리 펄펄 날뛰면서 뺨을 내려칠 때가 더 나았다.
당장 데려가려고 해 봤자 알 수 없는 힘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댈 게 뻔하니……. 한껏 경계하는 성녀의 앞에 나타나기보단 차라리 그녀가 울다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저택으로 옮겨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론의 예상대로 울음은 점차 잦아들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억눌려 있던 흐느낌은 차츰 고른 숨소리로 변해갔다.
다만 아론의 예상과 다른 것이 있다면, 지안이 울다 잠든 게 아니란 사실이었다. 단시간 내 혹사당한 몸도 그렇고, 실시간으로 체온을 앗아가는 젖은 옷감 때문에 까무룩 실신하고 만 지안의 이마는 달궈진 냄비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스르륵 미끄러져 수풀 사이로 튀어나온 지안의 손을 본 아론은 이만하면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하며 공간을 갈랐다.
그의 예상대로 나무뿌리 아래에 몸을 웅크려 넣은 지안은 두 눈을 꼭 감은 채였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 생채기 난 손과 잠깐 사이 피딱지가 앉은 얼굴에 아론은 못마땅한 눈으로 지안을 나무뿌리 아래에서 끄집어냈다.
“쯧. 쓸데없이 번거롭게 만들기는….”
투덜거리며 힘없이 축 늘어진 지안의 몸을 들어 올린 그는,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체온이 너무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한밤중에 다짜고짜 들이닥친 아론에 의해 자다 말고 불려 나온 자말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야 했다. 종종 이런 식으로 아론에게 호출당한 적이 있었기에 자말은 분명 길드장이 또 누군가를 고문하다 말고 자신을 불러낸 것이리라 짐작했다.
이삼 년쯤 전, 밤까마귀 길드에 도전한 길드원들을 아론이 보란 듯 만신창이로 만들었을 때. 자말의 역할은 고문받는 자들이 죽지 않도록 적당히 출혈을 막고 치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치료받을 대상은 웬 일반인이었다. 꽤 곱상하고 어린, 한눈에 봐도 고생이란 건 전혀 모르고 자란 것 같은 여자.
어디 대차게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손바닥과 턱, 무릎에 생채기가 나 있긴 했지만, 이외엔 말끔했다. 피부엔 윤기가 흘렀고 머리카락에는 비단 같은 광채가 흐르는 게……. 못해도 어딘가의 귀족 영애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이마에는 물수건이 고이 올려져 있었다. 고문은커녕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도 않은 멀쩡한 상태라, 자말은 아론이 왜 자신을 불러왔는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어진 아론의 지시는 명확했다.
“치료해.”
흉흉한 명령에 자말은 잠자코 지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세히 살피니 손바닥이나 무릎 등의 생채기엔 이미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 덧나지 않도록 관리만 잘하면 그만일 상처였다.
하지만 고작 이런 걸 가지고 길드장이 나를 호출했을 리 없지. 자말은 지안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뻗은 즉시 도로 튕겨져 나왔다. 아론이 이를 쳐낸 것이다. 자말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뭡니까 대체? 왜 그러십니까.”
“손대지 말고 진료해.”
“아니,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치료하라면서요.”
“증상은 하나뿐이야. 열이 떨어지지 않으니 약 가져와. 나머진 내가 한다.”
자말은 그제야 지안의 이마에 올려져 있는 물수건이 아론의 작품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길드장이! 그 아론 베르그만이! 제 손으로 직접 다른 사람을 간호하다니! 자말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지안과 아론을 번갈아 보았다.
한참을 침묵한 그는 주섬주섬 제 가방을 뒤지며 물었다.
“약이야 있다만……. 그, 길드장의 여자라도 됩니까?”
호기심을 못 이기고 슬쩍 질문을 흘리자, 아론의 눈초리가 빠르게 살벌해졌다.
“자말.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
“궁금해하지 마. 묻지도 말고.”
아론의 경고에 자말은 재깍 입을 다문 채 제 짐가방 속에서 약을 꺼내 들었다. 약을 받아든 아론이 물었다.
“부작용은 없겠지? 얼마나 먹이면 되나.”
그냥 여자의 입에 대고 대충 약을 흘려 넣을 줄 알았던 자말은 떨떠름한 얼굴로 아론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야 했다.
“두 스푼 정도면 됩니다. 부작용이랄 건 딱히 없는데……. 약효가 좀 세서 먹으면 한동안은 정신을 잘 못 차릴 겁니다. 수면제 대용으로도 종종 쓰이는 약이라.”
주의 깊게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수저 가득 약물을 채워서 지안의 입에 흘려 넣었다. 하지만 기껏 입 안에 넣어 준 것이 무색하게도 잠시 후 입가를 타고 약이 흘러내렸다.
“삼키질 못하는군.”
“수저로 혓바닥을 누르면서 먹이면…….”
자말은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다. 다시 약병을 집어 든 아론이 그대로 약을 제 입에 머금은 채 지안에게 입 맞췄기 때문이었다. 경악성을 삼킨 그는 정말로 자신이 사지 멀쩡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