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경직되는 그의 몸과 달리 파장은 정직했다. 지안은 아론의 파장을 가늠하며 가이딩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고는, 그대로 무게를 실어 그를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사람을 납치할 땐 언제고. 기함하는 표정이 볼만했다.
아론의 위에 올라탄 그녀는 그대로 그의 어깨를 힘주어 짚으며 본격적으로 기운을 쏟아냈다.
“아…!”
경직되어 단단했던 몸이 제 손 아래서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짐짓 다정한 손길로 뺨을 몇 번 쓸어준 지안은 아론의 동공이 반쯤 풀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단단히 굳어 있던 얼굴 또한 얼이 빠진 듯 물렁해져 있었다.
가이드를 많이 접하지 못한 에스퍼는 가이딩에 곧잘 취해 허우적거리곤 한다. 그리고 그때만큼 에스퍼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취약해지는 때도 없다. 그런 에스퍼의 약점을, 몇몇 질 나쁜 가이드들은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해먹곤 했다.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자면, 가이딩에 취한 에스퍼에게서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내 재산을 빼돌린 가이드가 처벌받은 전례도 있다.
그간은 이런 식의 접촉을 최대한 피해 왔다. 가이딩에 취해버린 이곳의 능력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단 생각에서였다. 잘해 봤자 가이드를 향한 집착만 더 커질 게 뻔했다.
하지만 더는 상관없다. 이미 납치당한 마당 아닌가.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있을까 싶은 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참다못한 이성이 파탄 날 지경이었다. 뭐든 못 할 짓이 없었다.
“아론. 여긴 어디야?”
속삭이듯 묻자 느릿하게 답변이 나왔다.
“……내 저택.”
풀린 눈으로 답해 온 아론은 연신 지안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본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조차 없는 얼굴이었다.
“제도 안이야?”
“아니, 제도 바깥의 휴양지인데……. 제도에서 그리 멀지 않아.”
그의 대답을 반복하듯 중얼거린 지안은 다시금 소리를 높여 그에게 물었다.
“나가고 싶어. 나가게 해 줄 거지?”
“원한다면…….”
홀린 듯 답한 아론은 부스스 일어나 지안을 덥석 껴안았다. 덕분에 조금 놀랐지만,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을 들이켜는 남자는 덩치가 무색하게도 떨고 있었다. 취할 정도로 쏟아 부어진 가이딩에 그대로 정신이 날아간 모양이었다.
지안은 아론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그의 파장을 가늠했다. 가이딩으로 의식을 흐려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능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수위를 조절하는 것도 중요했다.
“아론. 할 수 있겠어?”
은근히 재촉하자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긍정의 사인에 지안은 잠자코 그가 이능을 사용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럴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허덕이며 끌어안는 팔 힘만 더 강해질 뿐.
“아론?”
“할게. 할 테니까…….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칭얼대는 것 같은 애원에 지안은 미간을 좁히며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아니. 지금 해. 어서.”
입술 위로 달콤한 숨결이 닿았다가 사라졌다. 가이드가 강요하는데, 감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아론은 저도 모르게 이능을 사용했다.
문제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미처 장소를 특정하지도 못한 채 이동을 감행했다는 데 있었다. 지안은 콰르르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거센 물살에 강타당한 지안이 그대로 정신을 잃은 탓에, 아론은 곧바로 가이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얼음장 같은 찬물이 흐릿한 감각을 일깨웠다.
상황을 파악한 즉시 수면 위로 헤엄쳐 올라간 아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안을 찾았다. 거칠게 출렁이는 물살의 높낮이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지안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안은 나무토막마냥 물살에 둥둥 떠밀려 가던 중이었다. 허우적거리지도 않는 걸 보니 정신을 잃은 게 분명했다. 아론은 욕설을 내뱉으며 지안을 향해 헤엄쳤다.
“지안! 젠장!”
곧바로 지안을 물속에서 끄집어낸 아론은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하얗게 질린 지안을 눕히고 입을 맞춰 숨을 불어넣었다. 치료사인 자말이 물에 빠진 조직원을 이런 식으로 구하는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지안은 축 늘어진 채 미동이 없었다. 숨을 멈춘 그녀의 모습에 아론의 얼굴에서도 점차 핏기가 빠져나갔다.
“안 돼……. 안 돼! 정신 차려! 일어나!”
아론은 지안의 어깨를 잡아 거세게 흔들었으나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지안의 얼굴에 대고 악을 쓴 것도 잠시, 아론은 다시 한번 지안에게 입을 맞췄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그녀를 잃으려고 황제를 죽인 게 아니었다.
훅. 다시 숨을 불어넣자, 마침내 콜록이는 기침 소리가 났다.
콜록―!
울컥 물을 토해내는 모습에 안도한 것도 잠시, 곧바로 아론의 뺨에서 불이 일었다. 짝! 소리와 함께 지안의 손이 그의 뺨을 갈긴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빈사였던 여자가 무슨 힘이 나서 손을 휘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뺨을 때린 걸로는 모자란다는 듯 곧장 손톱을 세우는 지안의 모습에 아론은 얼굴을 찌푸리며 어설프게 휘둘러지는 손목을 잡아챘다. 쿨럭이며 물을 토해내면서도 열심히 반항하는 걸 보니 죽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젠장. 가만히 좀 있어!”
“콜록! 이! 이 변태 새끼가!”
“하아. 좀 닥쳐! 물에서 건져 준 거 보면 모르나? 널 살리려고 한 것뿐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시도 마.”
희번뜩 빛나는 아론의 눈동자에 지안은 무어라 외치려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그저 목소리만 조금 낮췄을 뿐인데 피부의 솜털이 오소소 일어나고 있었다.
“우린 운이 좋아서 물 위에 떨어진 거다. 재수가 없었으면 꼼짝없이 땅속에 생매장될 뻔했어. 더 재수가 없었다면 끓는 용암 위에 떨어졌을 거다.”
“…….”
“알아? 넌 방금 죽을 뻔했어! 아니, 반쯤은 죽어 있었지.”
“너한테 살려달라고 안 했어.”
적의 어린 말에 아론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예상했던 대답이긴 했으나 막상 들으니 속이 쓰렸다. 그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한숨을 내뱉었다.
“되살린 보람이 없군.”
허탈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목소리에 지안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가물거리던 의식 너머로 힘껏 숨이 불어 넣어진 감각이 조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몹시 인정하기 싫지만, 살려주려 한 사람의 뺨을 내리친 꼴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정신이 들자마자 그와 입을 맞대고 있는 것에 놀란 탓이다. 게다가 그는 납치범이었다. 적의가 한껏 높아진 상황에서 그런 짓을 당한다면, 심지어 그 상대가 에스퍼라면 누구든 반항할 것이다.
지안은 숨죽인 채 아론을 탐색했다. 물에 처박혀 죽을 고비를 넘기는 짓을 다시 하고 싶진 않았다. 가능하면 말로 해결이 되면 좋겠는데. 가능할까?
그러나 이어진 아론의 말이 잦아들던 경계심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정신 차렸으면 그만 일어나.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어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안은 힘껏 기운을 끌어올려 그대로 아론의 가슴팍에 찔러넣었다. 돌아간다니. 기껏 그 방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다시 잡혀들어갈 순 없었다.
그 의지에 호응하듯, 지안의 기운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창살이 되어 아론의 가슴을 꿰뚫었다. 덕분에 또 한 번 근육을 가르는 듯한 고통과 직면하게 된 아론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어야 했다.
“큭?!”
간신히 손을 뻗어 지안을 붙잡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재차 날아든 지안의 기운이 아론의 어깨를 겨냥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어깻죽지를 내리긋는 서늘한 감각 다음에는 몸에서 팔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 듯 극렬한 고통이 뒤따랐다. 떨리는 손가락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기껏 붙잡은 옷깃마저 스르륵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그때를 노려 힘껏 아론을 밀쳐낸 지안은 사냥개에게 쫓기는 토끼라도 되는 양 수풀 너머로 달려갔다. 정말이지, 살려낸 보람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행태였다. 아주 잠깐, 고통보다 분노가 더 강하게 전신을 지배할 정도였다.
그러나 도망치는 지안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아론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지안이 방사 가이딩을 계속해서 유지한 채였기 때문이었다.
“멈춰…!”
지안이 멀어질수록 격통이 조금씩 희미해졌지만, 아론은 이 사실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지안의 기운이 뚝 끊어져 버렸다. 허공을 감돌던 차갑고 날 선 기운이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아, 하아…….”
가이딩에서 풀려난 아론은 다급히 숨을 몰아쉬다 말고 와그작 인상을 구겼다. 전신을 난도질하던 고통에서 벗어났으니 다행이어야 하는데, 외려 기분이 더러웠다. 물에 빠져 반 죽다 살아난 주제에 힘이 펄펄 넘쳐 도망치는 것도 아니꼬웠다.
아론은 곧바로 근처의 날짐승을 불러내 시야를 공유했다. 이능에 걸려든 건 물까치였다. 시야 공유에는 까마귀가 제일 좋지만, 아쉬운 대로 물까치도 상관없다. 욕설을 내뱉으며 새를 날려 보내자. 곧 숲의 지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에 숨어 있든, 어디로 도망가든 찾아낼 것이다. 찾아낸 다음엔…….
“……내 뺨을 친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음산히 중얼거린 아론은 곧바로 지안의 뒤를 쫓았다.
* * *
어둠이 내린 숲은 몹시 어두웠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당장이라도 이동 능력자가 나타나 손을 뻗어 올 것 같은 두려움이 지안을 갉아먹었다. 악몽이 따로 없었다.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숲을 헤매다 노예상 무리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날의 불운이 또다시 반복되는 것 같았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한밤중의 숲. 길이 나지도 않은 곳을 필사적으로 헤치며 달리느라 지안의 손과 팔은 이미 긁힌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높이 자란 풀 외에도 복병이 하나 더 있었다.
“악!”
발목을 잡아챈 나무뿌리에 지안은 요란히 넘어지고 말았다. 달리던 속도 그대로 땅 위에 고꾸라진 지안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밀려드는 아픔을 삼켰다. 손바닥이 죄 까진 건 물론이요, 아주 제대로 엎어진 탓에 지면과 부딪친 턱이며 무릎이 쓰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