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지안! 왜, 왜 우는 거지? 왜 혼자인가? 황녀 전하는 어딜 가고…… 대체, 무슨 일이…….”
반가워하다 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공작과 달리 일리아스의 얼굴은 참혹히 굳어 있었다. 특성 탓에 지안이 사라진 걸 알아챈 것이다. 눈앞에 지안의 얼굴을 한 이가 있었지만, 얼굴만 같을 뿐 지안이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넌 누구지?”
일리아스의 질문에 이비엔의 입술이 달싹였다. 사실을 말하려니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말해야만 했다. 그래야 지안을 되찾을 것 아닌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공작이 손끝을 덥석 잡아 왔다. 바로 그 순간 이비엔은 악시온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해지는 걸 목격했다.
“……너는 지안이 아니군.”
확신을 담은 사나운 뇌까림에 이비엔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지안의 앞에서 늘 유순하던 공작만 보아온 탓이었다. 돌변하는 그의 모습에 잠시 두려움마저 일었다. 이대로 우물쭈물 망설이다간 공작이 곧바로 검을 뽑아 들 것 같았다. 이비엔은 서둘러 실토했다.
“맞아. 난, 나는 지안이 아냐.”
“역시 그렇군. 잠깐, 이 목소리는…….”
“흐윽… 지안, 지안이 납치당했어. 방금까지 나랑 같이…… 나와 있었는데 갑자기… 갑자기….”
흐느끼는 이비엔의 목소리에 공작과 일리아스의 얼굴이 담금질을 한 쇠처럼 굳었다. 지안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지안이 아닌 이비엔이었다.
“설명해라, 이비엔! 어째서 네가 지안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지안이 납치당했다니 무슨 말이냐. 방금 전만 해도 그녀가 여기 있는 걸 알 수 있었단 말이다!”
강하게 어깨를 붙드는 일리아스의 손에 이비엔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동… 이동 능력자가…….”
그 말에 무언가를 예감한 듯 공작과 일리아스의 얼굴이 나란히 일그러졌다.
열쇠를 들고 감옥에 찾아든 이비엔은 분명 이동 능력자가 죽었다고 말했다. 추적에 성공했으며, 사살했다고. 그렇게 전달받았다. 그랬는데 사실은, 죽지 않았던 건가?
“그가 살아 있었어.”
힘없이 중얼거린 이비엔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 * *
쓰러진 채 흐릿한 눈을 깜빡이던 아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전신을 난도질하던 고통을 버티다 기절한 것이 기억난 탓이었다.
전신을 반쯤 가르던 감각이 여전히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해,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헉! 소리를 내며 목을 움켜쥔 채 숨을 들이켜야 했다. 급하게 공기를 들이마신 입속에선 짭짤한 피 맛이 났다. 고통을 견디려 이를 악문 여파였다.
삼켜지지 않는 침을 애써 삼킨 아론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확인했다. 성녀는? 지안은? 그녀는 어디 있지?
서둘러 건물 안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지안을 발견했다. 그녀는 자신을 등진 채로 돌벽에 손바닥을 댄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간혹 멈춰 서서 벽을 주먹으로 두들겨 보기도 하고 바닥에 발을 굴리기도 했다. 출구를 찾는 것 같았다.
아론은 소용없다고 말하는 대신 숨죽인 채 지안을 지켜보았다. 노예 경매장에서 처음 조우했던, 어딘가 어수룩하고 물렁했던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경계하듯 날 선 무형의 기운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변화의 간극을 아론은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간 공작과 삼황자의 비호 아래서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던 게 아니었나? 후작 영애와 손을 잡은 황녀조차 그녀를 극진히 대했다.
실제로 아론이 아는 지안은 이처럼 무섭게 돌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간 그가 관찰해온 바로는 늘 겁이 많았고,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걸 어려워했다. 황성의 하녀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심히 겉돌던 지안의 모습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성녀의 변화는, 나 때문인가?
추론을 이어가던 아론은, 돌연 지안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몸을 경직시켰다. 서늘한 성녀의 표정을 보건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숨통을 끊어 끝을 보려는 것 같았다.
선량한 사람의 돌변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이고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아론은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날 죽이면 당신은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굶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좀 참지 그래?”
그 말에 지안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헛웃음 지으며 고개를 모로 젖혔다. 가늘게 뜬 눈으로 아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협박을 들었다는 듯 피식거리는 지안의 모습에 아론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런 그를 향해 지안이 되물었다.
“내가 굶어 죽는다고?”
소리 내어 말하니 더 웃겼다. 굶어 죽긴 누가 죽는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만 해도 삼황자 전하가 날 구하러 올 것이다.
잠시 계획이 틀어지긴 했지만, 이동 능력자를 쓰러뜨린 후 차분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좌절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재각성 덕분인지 이동 능력자를 제압하는 게 제법 간단하기도 했고……. 저 이동 능력자의 처리는 공작님이나 삼황자 전하가 해 줄 것이다. 간단히 결론지은 지안은 웃음을 거두며 물었다.
“여긴 제도 안인가?”
“글쎄.”
성의 없는 대답에 지안은 미간을 구겼다.
“또 기절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굴어.”
“……이제 보니 꽤 폭력적인 성녀님이었군.”
성녀란 지칭이 거슬렸으나 일일이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도 지쳤다. 지안은 한숨 쉬듯 말해야 했다.
“여긴 어디지? 황성에서 먼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그는 답할 마음 없는 얼굴로 자신을 탐색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다려 봤자 시간만 질질 끌게 될 것 같고……. 이대로 그가 사라져 버리면 장소를 캐물을 수 없으니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다. 판단을 마친 지안은 망설임 없이 아론의 어깨에 자신의 기운을 박아넣었다.
“윽!”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웠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이멜다인가 뭔가 하는 후작 영애에게 협박당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황녀 전하의 배신도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에스퍼에게 가졌던 연민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지지 않았나.
남은 것이라곤 분노와 악뿐이었다.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결심 역시 확고해졌다. 주저하던 마음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협회에서 악명 높던 가이드처럼 굴어도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에스퍼 살해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난폭하게 기운을 휘두를 때마다 저열한 희열이 돌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에스퍼를 쥐락펴락하고 있자니 작은 해방감마저 들었다. 매번 물씬 피어올랐던 죄책감도 더는 없었다. 외려 재미있었다. 마구잡이로 기운을 휘둘러 이동 능력자의 몸에 꽂아 넣을 때마다 재깍재깍 반응이 왔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거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살이 갈라지거나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니잖은가. 꽤 아프긴 하겠으나 그가 자신에게 저지른 짓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게다가 이러나저러나 가이드의 기운에 닿아 폭주가 늦어질 테니 그에게도 잘된 일일 것이다.
“컥! 허윽!”
“제도 안인지 밖인지 정도라도 말해.”
그 정도라도 알아야 언제쯤 삼황자가 자신을 찾으러 올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론은 입을 악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꽤 아플 텐데도 간헐적인 떨림 외에는 신음 하나 없다.
지안은 말없이 고통을 삼키는 아론을 잠시 지켜보았다. 시시각각 바뀌는 혈색도 그렇고,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는 걸로 보아 분명 힘겹게 버티는 걸 텐데. 왜 입을 열지 않는 걸까. 이것도 가이딩의 하나라서? 그래서 그런가?
의문하던 지안은 날카롭게 방출한 기운을 깔끔히 갈무리했다. 그러자 헉! 소리와 함께 아론이 비틀대며 바닥을 짚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자신이 짓밟은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답.”
재촉했지만, 흐트러진 숨소리 외엔 돌아오는 게 없었다. 아득― 이를 악무는 걸 보아 대답해 줄 마음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지안은 고민 끝에 부드럽게 기운을 풀어냈다. 태풍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없다면, 햇빛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그래. 뭐,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생각과 동시에 지안은 손을 뻗어 아론의 턱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칼날에서 미풍으로 돌변한 기운. 입술을 쓱 문지르는 엄지손가락에 그는 가볍게 전율해야 했다. 고양이의 앞발에 짓눌린 쥐가 된 기분이었다. 분했고, 무력했고, 그보다 몇 배는 아찔했다.
“당신, 이름이 뭐야?”
“……아론. 아론 베르그만.”
“나를 가둔 이유는? 혹시 사주를 받았다거나?”
“당신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배후 같은 건 없어.”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 당신 말고도 또 있나?”
아론은 순순히 고개를 내저었다. 부드럽게 살갗을 어루만지며 파고드는 기운에 전신이 후들거렸다. 턱에 닿아온 성녀의 손가락을 핥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다음 순간, 지안의 손이 그의 멱살을 쥔 채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힘이 모자란 탓에 아론을 일으켜 세우진 못했다.
지안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본 아론은 순순히 그녀의 뜻에 따라 일어났다. 조금 비틀거려야 했지만 서 있는 데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고통이 물러난 자리마다 새살이 돋듯 간질거릴 뿐.
다만, 멱살이 잡힌 채 끌려가는 기분이 묘했다. 기껏해야 가슴 어림에 올까 싶은 여자에게 순순히 붙들려 끌려가다니. 나를 아는 누구든 이 장면을 보았다면 놀라며 눈을 비비지 않을까.
심지어 성녀가 자신을 이끈 장소는 침대 위였다. 지안이 밀치는 대로 침대가에 털썩 주저앉은 아론은 묘한 얼굴로 지안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
그리고 이어진 지안의 행동에 그는 경악을 토해야 했다. 손을 뻗어온 성녀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고 있었다.
쇄골 부근과 가슴팍에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아랫배가 저릿해져, 아론은 서둘러 지안의 손을 잡아채야 했다. 부정할 수도 없는 선명한 열락이 옷 아래서 지글거리며 끓었다. 그대로 놔두었다간 자신이 먼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당혹스러웠다.
“뭐 하는 짓이지?”
대답 대신 농밀한 기운이 훅 전신을 덮쳐 왔다. 아론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지안은 손바닥을 펼쳐 그의 뒷목을 느릿하게 쓸어올렸다.
“왜? 무서워? 이런 건 처음이라 신기한가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