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보시다시피. 황녀를 속이느라 조금 애먹었지.”
활짝 웃어 보인 아론은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지안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지안은 질색한 얼굴로 몸을 한껏 뒤로 젖혔지만, 붙잡힌 채라 자신의 뺨에 아론의 코끝이 스치는 걸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등 뒤로 오싹 소름이 돋고, 몸이 절로 진저리를 치며 떨렸다.
그러나 기겁하는 그 반응마저 기껍다는 듯, 아론은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가 자신의 품 안에 있었다. 그 사실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단순히 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켜켜이 축적된 고통에서 한 겹 벗어나는 듯했다. 피로한 몸이 따뜻한 물속에 잠긴 듯 나른하고 평온했다. 아론은 지안을 힘주어 안았다.
그 악력을 느낀 지안이 서둘러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바위를 밀 듯이 단단할 뿐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 품안에서의 무의미한 저항이 귀여워 아론은 못내 웃으며 지안을 약 올렸다.
“이런, 내 가슴을 만져보고 싶었다면 말을 하지 그랬나. 얼마든지 내주었을 텐데 대뜸 손부터 먼저 대는군.”
“……뭐?”
“성녀님 말씀이라면 옷 따위야 바로 벗어줄 텐데. 뭣 하러 이런 몸부림을 치지? 나야 귀여워서 좋지만.”
“이익!”
아론의 도발에 그대로 넘어간 지안은 냅다 주먹을 쥔 채 아론의 가슴에 내다 꽂았다. 스스로에게 이토록 폭력적인 면이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거나 놀라워할 겨를도 없었다. 마치 압력을 견디다 못한 머리 뚜껑이 열려버린 기분이었다.
아론은 말없이 지안이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리는 걸 지켜보았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이 제 가슴에 꽂힐 때마다 퍽! 퍽! 요란한 소리를 냈다. 꽤 손이 맵긴 했다. 하지만 기왕 폭력을 쓸 거면 얼굴을 가격해야지. 기껏 주먹을 쥐고서 가슴이나 어깨 따위를 내려치면 어떡하나.
서툴고 정신 사납게 휘둘러지는 지안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아 제지한 아론은, 나중에 제대로 주먹질을 가르쳐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을 얻으려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날 데려다 놔. 다시 그곳으로…… 황녀 전하의 옆으로 데려다 놓으란 말이야!”
“에를랑겐 후작 영애와 손을 잡은 황녀를 벌써 용서하는 건가?”
아픈 곳을 찌르는 아론의 말에 지안은 멈칫 몸을 굳혔다. 어떻게 그 사실을……. 까마귀를 이용해 황녀 전하를 쭉 감시해 온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이자가 황녀 전하의 최근 행보를 꿰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지안의 모습에 아론이 빈정댔다.
“이런, 정말 용서라도 했나 보지? 성녀님답게 자애롭군. 그 마음을 십분 발휘해서 나도 좀 용서하지 그래. 나도 당신을 납치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거든.”
“말 같잖은 소리 마.”
“신관들이 고서인지 뭔지를 해석하는 걸 들었는데, 흥미롭더군. 그간 능력자들이 왜들 그렇게도 멍청히 박해를 견뎌온 건지 궁금했는데.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어.”
제 할 말만 지껄이는 아론의 모습에 지안은 잠시 그에게서 신경을 끈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첨탑에도 창문 하나 정도는 있었는데, 여긴 사방이 벽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 출입구로 보이는 문이 하나 있긴 했다. 기운을 날카롭게 벼려 가슴을 찌르고 달아나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재각성 이후 에스퍼에게 확실한 고통을 줄 수 있게 되지 않았나.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을 실현하기도 전에, 지안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알아차린 아론이 말했다.
“저긴 욕실이다.”
“뭐?”
“출구를 찾는 모양인데. 출입구는 없어.”
“거짓말 마.”
“흐음. 정말인데. 천장을 봐.”
턱을 가볍게 긁어 올리는 손길에 지안은 사정없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본 천장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 나 있었다. 크기는 기껏 해 봤자 성인의 손바닥만 할까. 얼굴 하나 내밀어볼 수 없는 아주 작은 창이었다.
“저기도 아예 막아버릴까 했지만, 환기를 위해 그러지 않았지. 대신 비가 들이닥쳐도 문제없도록 수반을 마련해 두었어.”
“…….”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의심스럽다면 직접 확인해 봐.”
그렇게 말한 아론은 아쉬운 얼굴로 내내 끌어안고 있던 지안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물러섰다. 한참 아론을 노려보던 지안은, ‘확인해 보라니까?’ 하며 재촉하는 그의 말에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서남북 어디 할 것 없이 사방이 온통 돌벽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존재하는 문을 열어 보았지만, 정말 욕실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꽉 채워진 구조물에 숨이 턱 막혀왔다. 자신이 납치된 장소는 벽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새장과 다름없었다.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 자신하던 저자의 말대로다. 여긴…… 이동 능력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장소였다.
방 안의 온갖 가구를 쌓아 사다리처럼 만들어 봤자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천장의 손바닥만 한 창문은 몹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사람이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작았다.
갑갑한 현실에 지안은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왜 이렇게 된 걸까. 너무 허탈해서 그런가, 울분이 솟아야 정상인데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파도가 번갈아 자신을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황제가 죽었고, 삼황자 전하가 시해범으로 지목당했다. 그러다 헤롤드를 인질로 잡혀 협박당했고, 신전의 사제들은 얼토당토않은 신화와 신탁을 들먹여 속을 헤집어 놓았다.
연이은 일들에 심장이 빙하처럼 얼어붙었지만, 그래도 황녀 전하가 마음을 돌이켜 주었다. 울며 사과한 전하가 내게 시간을 벌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새벽이 되면 삼황자 전하와 공작이 올 거라고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공작이 오고 있었다. 삼황자 전하가 오고 있었다. 그랬는데……. 납치라니.
“하하…….”
너무 화가 나면 도리어 머릿속이 차분해진다던가. 잃어버린 본성 같은 걸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인내심이 다 닳아 없어지길 기다렸단 듯 새로운 자아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감각이 기묘했다.
힘을 다한 이성이 놓아버린 핸들을, 터질듯한 분노가 덥석 움켜쥐면 바로 이런 기분일까. 지안은 얼굴을 문지르다 말고 무표정한 얼굴로 아론을 돌아보았다.
“……나는 북부로 가야 해. 그런데 당신은 나를 보내 줄 생각이 없군. 그렇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취미가 있나?”
받아치는 아론의 말에 지안은 작게 미소했다.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 황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날 제지시켜 보려고? 고작해야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에 불과한 고통쯤이야, 버티면 그만이다.”
뻔뻔스런 말에 지안은 말없이 자신의 기운을 대기에 풀어냈다.
대놓고 방사 가이딩을 시작하자 곧바로 아론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을 본 지안이 작게 조소했다. 가이드 윤리 따윈 이미 진창에 처박은 뒤였다. 지안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아론을 불렀다.
“능력자가 내게 바라는 거야 뻔하지. 이리 가까이 와.”
그 말이 아니더라도 아론의 발은 이미 저절로 앞서고 있었다.
스멀스멀 퍼져나오는 기운에 그는 홀린 듯 움직여 지안의 앞에 섰다. 분노에 찬 성녀의 눈이 먹잇감을 보는 맹수의 것처럼 반짝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황성에서 그랬듯 고통을 수반하는 기운이 자신을 덮쳐오더라도 좋았다. 언젠가 삼황자의 불꽃에 살갗이 불타는 걸 뻔히 보고도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론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대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심장을 그대로 꿰뚫어 버린 지안의 기운 때문이었다. 숨을 멈추며 아론은 저도 모르게 제 가슴을 더듬거렸다. 칼날이 그대로 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감각이 여전히 그 부근에 남아 있었다.
무언가 인공적인 격통을 가져왔던, 감각의 교란을 불러일으키던 이전과 달랐다. 그때보다 더 정교했고 항거할 수 없을 만큼 폭압적이었다. 이전의 것이 불시에 얻어맞은 것 같은 아픔을 주었다면, 지금은 마치 차근차근 살이 썰리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가슴에 길쭉한 창이 꽂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폭주의 고통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강렬한 격통에 아론은 경악으로 두 눈을 홉뜬 채 뒤늦게 “컥!” 소리를 내뱉었다.
바로 그 순간, 형편없이 무너지는 몸을 지탱하려 바닥을 짚은 그의 손등 위로 지안의 발이 닿았다. 체중을 실어 아론의 손을 짓밟은 지안이 말했다.
“후회해야 할 텐데.”
“…….”
“버티면 그만이라고 자신했지?”
덥석. 가차 없이 머리채를 움켜쥐는 손길에 아론은 힘없이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런 그의 시야 가득, 냉막한 지안의 얼굴이 비쳤다.
“그럼 이것도 버텨 봐.”
그 말과 함께 칼날 같은 기운이 아론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 * *
이비엔은 허탈한 얼굴로 지안이 사라진 장소를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메아리가 반복해 울렸다. 지안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떠나가지 않았다.
‘당신은!’ 지안은 이렇게 외쳤다. 이는 지안이 이동 능력자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안을 노리던 이동 능력자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시체도 확인했었다. 그랬는데, 이제 보니 일부러 눈을 속인 게 틀림없다.
당했다.
납처럼 굳어버린 이비엔은 한달음에 탑의 꼭대기까지 오른 공작이 화색 어린 얼굴로 제게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약물로 얼굴이 바뀌어진 탓에, 자신을 지안으로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멀리서부터 안도와 반가움을 드러내는 두 사람의 눈빛에 속에서 울컥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비엔은 불현듯 과거 일리아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침실에 몰래 들르는 것을 두고 오라버니와 거래를 빙자해 다투던 어느 날. 일리아스는 심각한 얼굴로 지안을 걱정했다.
‘지안은 보통의 능력자들과 달리 아무런 무력도 없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동 능력자가 지안을 납치하려 든다면, 너도 같이 납치당해라.’
‘뭐? 그게 무슨…….’
‘문헌을 통해서 이동 능력자들의 능력을 파악해 봤는데, 유사시 네가 지안을 붙들고 있으면 이동 능력자도 별수 없이 너를 매달고 이동을 감행하게 될 거다.’
‘그래서 나도 함께 납치당해라 이 말이야 지금? 그게 황녀인 내게 할 소리야? 미쳤어?’
‘네 이능은 폭발이야. 제도 어디로 이동하든, 이비엔 너는 언제든 네 위치를 알릴 수 있다. 폭음이 나는 곳으로 기사단을 급파하는 건 그닥 어렵지 않은 일이지. 너는 이동 능력자를 상대로 저항도 가능하고, 운이 좋으면 제압도 할 수 있겠지만…… 지안은 달라. 명심해라. 지안과 한시도 떨어져 있지 마.’
‘기가 막혀서!’
버럭 소리쳤던 기억이 여즉 생생했다. 삿대질을 하면서, 아무리 지안이 걱정돼도 그렇지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화를 냈다. 하지만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니…… 경고받았던 대로 지안에게 바짝 붙어 있었어야 했다. 그 말을 허투루 여겨선 안 되는 거였다.
주룩 눈물이 흘렀다. 지안을 빼앗겼다. 그것도 하필, 이동 능력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