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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2/199)

112화

냉정한 크론쇼의 말에 이비엔은 분에 찬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누구라도 찔끔할 법한 기세였으나 크론쇼는 태연히 황녀의 시신을 외면하며 귀를 후볐다.

“애초에 우리는 에다께서 말한 재해가 무엇인지 조금도 모릅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알지도 못하고 조짐조차 없는데, 미래의 혼란을 굳이 앞당길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비엔은 이를 갈았다. 저 말에 틀린 점이 없어서, 그래서 더 얄미웠다.

저 신관 같지도 않은 신관의 말대로, 신탁이 알려지는 순간 수많은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신탁을 부인하는 자들과 긍정하는 자들이 서로 뒤섞여 충돌할 것이고, 애꿎은 제국민들만 그 아래서 등이 터져 나갈 게 뻔했다.

이비엔은 이 사실을 내심 인정하면서도 크론쇼의 말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았다. 온 대륙이 위험에 내몰릴 것이라지 않나. 무려 신탁이 내려왔는데. 동요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자신은 황녀였다. 황족이었다. 태어나고 자라온 제국을 수호할 의무가 있었다. 대대로 테리온을 지켜온 옛 황제들의 후손으로서, 제국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는 걸 뻔히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불투명한 제국의 미래보다…… 지안을 황성에서 내보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미 오라버니와 공작에게 열쇠도 건네주지 않았나.

그리고 지안은 황성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반면 이멜다와 황태자는 지안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외려 신탁이 알려지면 어떻게든 지안을 붙잡아 놓으려 하겠지.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 * *

크론쇼와 로웰은 지안의 것이라며 화려한 사제복을 두고 돌아갔다. 내일 즉위식에서 지안이 입어야 할 옷이었다. 은사로 수놓은 사제복은 화려한 넝쿨 문양자수로 치장되어 몹시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안과 이비엔은 사제복에 조금도 관심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간신히 존재하는 것이라곤 먼지 같은 침묵과 불편함 뿐.

이비엔은 시선을 바닥에 둔 지안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와 지안에게 미안하다고 해 봤자 부서진 신뢰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전처럼 지안이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멜다에게 설득당하지 않았다면, 한순간 크게 부풀었던 배신감에 눈이 흐려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뒤늦은 후회에 눈가가 욱신거리며 아팠다.

하지만 대책 없이 울기 위해 사제로 변장하고 첨탑에 들어선 게 아니다. 해야 할 일을, 계획했던 일을 마쳐야 했다. 이비엔은 결연할 얼굴로 입고 있던 사제복을 벗어 던졌다. 그런 다음 크론쇼가 남겨두고 간 성녀용 사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지안을 향해 돌아선 이비엔이 말했다.

“잘 들어, 지안. 새벽이 되면 공작과 오라버니가 올 거야.”

그 말에 지안이 뒤늦게 반응해 왔다.

“……무슨?”

“첨탑 옆 풀숲에 말을 숨겨뒀어. 내가 널 대신해 즉위식에 나갈 거야. 너는 그사이 오라버니와 도망쳐. 원래 계획했던 대로…… 북부로 떠나.”

이비엔이 자신을 감시하러 온 것인 줄로만 알았던 지안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파장의 움직임이 여러 번 급변하는 걸 느끼긴 했지만, 설마 떠나라는 말을 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뭘 어쩌시려고요? 그래봤자 금방 들통날 거예요. 고작해야 옷을 바꿔 입은 것뿐인데 누가 속아 주겠어요?”

이비엔은 대답 대신 손에 든 약물을 쭉 들이켰다. 약을 삼키기 위해 한껏 고개를 젖힌 이비엔이 다시금 지안과 눈을 맞춰온 순간, 지안은 경악을 삼켜야 했다. 마치 거울을 보듯 자신의 얼굴을 한 황녀 전하가 서 있었다.

“마법사에게서 구입한 약이야. 원하는 얼굴을 떠올리면서 약을 삼키면 하루 동안 얼굴을 바꿔 주지. 목소리까지 바꾸진 못하지만… 보다시피 꽤 유용해.”

장난치려고 산 건데 이걸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하며 웃는 이비엔을 지안은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멜다는 카리나인가 하는 여자를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고, 네가 도망친 걸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즉위식 때문에 함부로 기사들을 움직이지 못할 거야. 시간을 벌 테니…… 도망쳐.”

“제가 떠나지 않기를 바란 것 아니셨나요?”

의심을 떨치지 못한 지안의 질문에 이비엔의 두 눈에서 주룩 눈물이 흘렀다.

“지금도 그래.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떨리는 목소리에 지안은 침묵했다. 겁에 질린 황녀의 파장이 폭풍우를 만난 바다처럼 출렁였다. 눈앞에 선 사람이 황녀 전하란 걸 뻔히 아는데도, 울음을 터뜨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미안해.”

헐떡이는 것 같은 사과였다. 지안은 아연해진 기분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이비엔을 바라보았다.

* * *

갈라진 목소리로 사과하는 황녀의 음성에 아론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휘었다. 첨탑의 지붕에 둔 까마귀를 통해 지안과 이비엔의 대화를 모조리 훔쳐 들은 그는 작게 손뼉을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극적인 화해라. 퍽 감동적이군.”

감상을 내뱉은 아론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기다렸다. 황녀의 말대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려볼 참이었던 것이다. 가장 희망이 고조된 순간, 지안을 납치할 생각이었다.

기다림이 지루하진 않았다. 지안과 황녀의 대화를 좀 더 엿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띄엄띄엄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였지만, 아론은 얌전히 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약효가 끝나고 정체가 들통나면, 전하는 어떻게 되나요?

―생각해 보지 않았어. 아마 유폐되겠지.

―전하는 능력자세요. 발현했을 때처럼 황성을 반파시키면, 다들 전하를 유폐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거예요.

―나더러 멀쩡한 황성을 부수란 말이야?

―가로막는 사람이 있거든, 죄다 부수고 북부로 오란 말이에요.

―신탁을 들었잖아. 나는 남아서 제국을 수호할 거야.

―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

―북부에서 기다릴게요. 다만,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서둘러 따라오세요.

그 말에 짧게 헛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작은 흐느낌이 이어졌다. 격정을 못 이긴 숨소리와 훌쩍거림이 까마귀의 귀를 타고 아론에게도 들려왔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하지만 누군가는 남아야 해. 나는 황녀잖아. 어떻게든 신탁을 알려서…… 제국을 지켜낼 거야.

제국민으로서 조금쯤은 감동해도 좋았겠지만, 결연한 이비엔의 선택에서 아론이 느낄 수 있던 것은 약간의 놀라움 뿐이었다. 그가 알기로, 황족의 말만큼 허무한 것이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무언가를 지키겠다는 결심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따르는 권세 하나 없는 황녀의 말이다. 아무리 정의로운 대의를 내세워 봤자 누가 이를 믿어 주겠는가. 무슨 짓을 하건, 홀로 발버둥 치다 끝나 버릴 게 뻔했다.

지안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긴 침묵 끝에 그녀가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다만, 그 마음이 바뀌게 되면…… 명심하세요, 전하. 제가 영영 떠나버리기 전에 오셔야 해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아론은 손등에 턱을 괴며 지안의 말을 해석하려 애썼다. 떠난다는 저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뉘앙스로 보아 북부로 떠나는 것 이상을 암시하는 것 같긴 한데…….

신관들의 말도 모조리 엿들은 참이라 그럴까. 떠나겠다는 그녀의 말에 거센 반발심이 샘솟았다. 대륙의 존망이 그녀에게 걸려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론은 그런 것 따위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막연한 불길함이 강하게 몸을 옥죄었다. 기껏 손에 넣은 지안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예감이었다. 그녀를 얻지도 못했는데 벌써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기껏 황제까지 죽여서 얻은 성녀를 잃는다면 자신은 아마 미쳐 버릴 것이다.

집착적으로 지안의 말을 반복해서 곱씹던 아론은 해석을 잠시 멈추며 눈을 빛냈다. 까마귀의 시야에 포착된 두 남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공작과 삼황자였다. 철통같은 감시를 벗어나 저렇게나 은밀히 빠져나온 걸 보면 황녀가 뭔가 수를 쓴 모양이었다. 첨탑의 아래에서 번을 서는 기사들을 기절시킨 그들은 서둘러 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늘게 눈을 뜬 채 이를 지켜보던 아론은, 곧이어 황녀가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오라버니가 왔어!

그 말에 아론은 그대로 공간을 갈랐다. 참고 참았던, 기다렸던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마음 같아선 삼황자의 눈앞에서 지안을 데려가고 싶었으나, 그의 이능은 몹시 성가셨다. 황제 대신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물리력이라면 모를까. 능력자의 몸 안까지는 제 이능이 닿지 않았다. 일반인인 황제를 죽이는 것조차 큰 반발과 폭주의 위험을 떠안고 해치운 일 아니었나.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됐지.’

승자는 자신이다. 모두가 희망과 안도에 찬 채로 안심하고 있는 지금이 적기였다.

첨탑의 돌바닥에 발을 디디자, 똑같은 얼굴을 한 두 여자가 아론의 시야에 들어왔다. 둘 중 누가 황녀고 누가 성녀인지 파악하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본능이 바로 이 여자라고 짚어 주었으니까.

“당신은!”

경악한 외침에 화답하듯 샐쭉 웃어 보인 아론은, 이비엔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지안을 낚아채듯 끌어안은 채 공간을 갈랐다.

“아, 안 돼!”

이비엔이 창백한 얼굴로 외쳤으나, 지안은 이미 그 비명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이미 공기의 냄새가 훅 바뀌어 있었다. 달라진 대기의 온도가 피부를 자극했다.

지안은 혼란한 얼굴로 아론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자신은 첨탑에 있었다. 공작과 삼황자가 탑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뻣뻣이 굳은 채로 잠시간 경악하던 지안은 이내 분노에 찬 얼굴로 아론을 노려보았다.

이동 능력자.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오랜만이야. 내 아가씨. 아니, 아니지, 이제는 성녀님이라고 해야 하나?”

위험스럽고 다정한 속삭임에 그대로 속이 뒤집어졌다. 어떻게 저 얼굴을 잊을까. 제게 무서운 경각심을 안겨주었던 저 남자를, 어찌 잊을까!

“당신…… 죽지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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