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심각한 어조로 선을 그으며 신전의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로월의 모습에 크론쇼가 투덜거렸다.
“내가 뭐가 어때서?”
“모든 신관이 뇌물을 받지는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항의를 무시한 로웰은 지안이 묻지도 않은 변명을 몇 차례 늘어놓았다. 그런 로웰을 보며 크론쇼가 혀를 찼다.
“로웰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이런 일은 상인 출신인 내가 잘 알아. 금화만큼 일을 매끄럽고 간편하게 만들어 주는 건 없다고. 다들 신관입네 점잖은 체하는데, 뒷구멍으로 돈 밝히는 것보단 대놓고 좋아하는 걸 티 내는 게 차라리 정직한 게 아닐까. 아무튼, 난 분명 전했습니다. 신탁.”
그렇게 말한 크론쇼는 금화 주머니를 다시 품에 집어넣더니 그 안에서 누렇게 빛바랜 고서를 꺼내 지안에게 내밀었다.
아무리 품이 넉넉한 사제복이라지만, 하늘하늘해 보이는 저 옷 어디에다 금화와 책을 보관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옷을 뒤집어 보면 알 수 있으려나? 하여간 여러모로 파격적인 신관이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한 지안에게 크론쇼가 찡긋 웃으며 당부했다.
“보아하니 할 일도 없어 보이시고. 이거라도 읽어 보십시오. 주신 에다께서 주신이 되기 이전의 일을 기록한 고대 신학서입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신들의 싸움으로 마인이 능력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설명하려니 귀찮네요.”
“크론쇼 님!”
기함하는 로웰을 가뿐히 무시한 그는 뭐 어떠냐는 표정으로 로웰의 사제복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 뒤를 로웰에게 떠넘긴 그는 용무를 마쳤다는 듯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첨탑의 창가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황성이 한눈에 들어온다며 연신 놀라워하기도 했다. 신전에서 보았던 신관들과는 확실히 다른 태도였다. 로웰은 이제 아예 포기했다는 듯 크론쇼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신탁이 있었다는 건 아마…… 사실입니다. 저래 봬도 고위 신관이 맞기는 하셔서요.”
설마,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이렇게 이어 말한 로웰은 확신 없는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도 긴가민가하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웃기지도 않는 신탁이었다. 사실이건 아니건 별 관심도 없다. …없지만, 지안은 말없이 고서를 펼쳤다. 영 미심쩍은 신관이긴 해도 마인이 능력자가 되었다는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서에는 온통 알아볼 수 없는 글자뿐이었다. 그나마 글자 사이사이에 들어간 삽화가 아니었다면 내용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슨 글자인지 모르겠네요.”
“천 년 전쯤의 글자니까요. 해석은 로웰이 해 줄 겁니다.”
멀찍이서 답해 오는 크론쇼의 말에 지안은 로웰을 올려다보았다. 로웰은 체념한 얼굴로 지안의 옆에 앉아서 고서를 해석해 주었다.
* * *
과학으로 에스퍼와 가이드의 상관관계를 파헤치려 했던 지구와 달리, 위스로데 대륙의 능력자들은 신학에 그 뿌리를 둔 채 해석되고 있었다.
본래 대륙의 주신은 에다가 아닌 별의 여신 스테아였다. 이젠 이름조차 잊혀진 이 고대의 신은, 설원이 펼쳐진 땅에 내려와 얼어붙은 동토를 지배했다. 한동안 대륙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홀연히 대륙에 나타난 것처럼 이윽고 태양의 신 에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 세계에 두 명의 신이 있을 수는 없는 법이나, 신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채 평화롭게 공존했다. 에다는 스테아를 사랑했고, 그들이 자리잡은 대륙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을지언정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문제는, 에다가 뿜어내는 열기가 자꾸만 동토의 설원을 녹여버린다는 데 있었다. 스테아는 고심 끝에 에다를 위해 자신의 땅을 일부 내어 주었다. 여신의 양보에 에다는 햇살을 타고 내려와 지금은 동부라고 부르는, 해가 떠오르는 땅에 자리 잡았다.
태양의 신이 땅 위에 발을 디디자 순식간에 빙하가 녹아내렸다. 에다는 그 아래 드러난 흙 위로 싹이 솟아오른 것을 보았다. 자칫하면 그대로 불타 시들어 버릴 작은 생명이 땅 아래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다. 신의 발자국이 남은 땅에는 녹음이 무성해졌고, 온갖 식물이 자라나 꽃피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에다는 부드러워진 흙을 집어 풀과 나무 사이에서 뛰어놀 피조물을 만들었다. 여러 짐승들이 신의 손바닥 위에서 태어나 하늘과 바다, 땅으로 퍼져나갔다.
에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빚어낸 것은 인간이었다. 단기간에 문명을 이뤄낸 이들은 에다에게 흡족함을 안겨 주었고, 순식간에 가장 신에게 사랑받는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너무 약했다. 쉽게 다쳤고, 작은 상처에도 곧잘 목숨을 잃었다. 보다 못한 에다는 스테아를 설득해 마인을 만들었다. 두 신이 떼어준 힘에서 탄생한 마인은 평범한 사람들이 낼 수 없는 힘을 발휘했다.
인간들은 곧장 마인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이들은 에다를 주신으로 섬겼다. 밤하늘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희미한 별빛, 혹한을 불러오는 눈보라의 여신보다는 태양의 신이 더욱더 그들에게 자애로웠으므로.
바로 이런 연유로, 모두가 얼어붙은 땅이 아닌 부드러운 흙과 햇살을 원했다. 대지는 스테아의 입김으로 얼음처럼 차가웠고, 에다의 햇살이 내리쬐는 땅은 너무 작았다. 인간들은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저희들끼리 다투다가 마침내 화살을 스테아에게로 돌렸다.
―설원에 나타난 별의 여신만 없다면 세상의 모든 눈과 얼음이 녹아내리리라! 더 많은 과실을 얻으리라!
―북부의 여신이 없다면 우리는 한 줌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궁리 끝에 마인 하나가 에다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북부로 향했다.
평범한 인간은 신에게 대적할 수 없으나, 그는 신의 힘으로 빚어진 마인이자 무수한 마인들 중 최초로 인간들의 왕이 된 자였다. 왕국을 건설한 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고, 그는 바로 그 자만을 바탕으로 별의 여신을 사냥하고자 했다. 대륙에 처음으로 작은 빛무리를 불러온 신이 한낱 사냥감으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평소처럼 에다를 반기기 위해 나타난 스테아는 마인이 휘두른 칼을 맞고 그대로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왕은 바라던 대로 여신의 입김이 사라진 땅을 얻었으나. 그 땅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어붙은 땅과 얼음 속에 잠들어 있던 괴수들이 깨어났다. 마인들에게 주어졌던 여신의 힘 역시 빠르게 거두어졌다.
그리고 그 사실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인간과 괴수의 전쟁이 시작됐다.
처음부터 인간들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얼음 속에 잠들어 있던 괴수들은 그들이 살아생전 만나보지 못한 괴물이었다. 수많은 생명이 괴수의 손톱과 이빨 아래 목숨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힘의 균형을 잃은 마인들은 폭주의 위험마저 떠안게 되었고, 강한 힘을 타고날수록 빠르게 목숨을 잃었다. 뒤늦게 진실을 안 에다가 스테아를 찾아 나섰으나, 밤하늘에 자리 잡은 채 고요히 세상을 굽어보던 여신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에다는 그녀를 되찾고자 했으나 차마 대륙을 떠나지 못했다. 그랬다간 인간들이 괴수에게 전멸당할 게 불 보듯 뻔했으므로.
할 수 없이 대륙에 남은 에다는 인간들의 편에 서서 괴수들을 북부로 몰아넣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설원만은 여전히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으므로.
이후로 수백 년이 지났다. 마인들은 불완전하게 태어나 서둘러 죽어갔고, 감히 신을 사냥하려 했다는 이유로 핍박받았다. 온갖 불명예가 이들을 뒤따랐다.
마인들은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려 노력했고, 온 힘을 다해 역사를 은폐하거나 비틀었다.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 역시 조금씩 변형되거나 잊혀졌으나, 끝내 차별과 박해가 남았다.
결국 마인들은 자신들의 유래를 잊은 채 능력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