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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199)

110화

이비엔의 말에 일리아스는 뿌득 이를 갈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악시온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성녀라니. 안 됩니다. 그녀는 가이드일 뿐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가이드란 사실이 알려지는 것보다는 성녀로 포장되는 게 훨씬 낫지 않나? 모두가 지안이 성녀이길 원해. 그리고 지안의 기운을 제도 전역에 흩뿌린 건… 분명 에다의 성력이었지. 신전은 이미 황가와 합의를 마쳤어. 지안은 성녀가 될 거야.”

“그런! 제국의 모든 능력자들을 고작 그녀 한 사람이 감당할 순 없단 말입니다!”

그 외침과 함께 악시온이 움켜쥔 쇠창살이 천천히 우그러졌다. 그것을 본 이비엔이 기겁한 얼굴로 악시온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감옥 부수지 마! 지금 거기서 나와 봤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니.”

그렇게 말한 이비엔은 로브 속에서 꺼낸 열쇠를 악시온과 일리아스에게 서둘러 전달했다.

“내일 아침 즉위식이 열려. 새벽이 되면 이걸로 열고 나와. 뭐, 지금 보니 공작에겐 열쇠가 필요 없었던 모양이지만…….”

잠자코 열쇠를 받아든 일리아스가 말했다.

“이비엔. 무슨 생각이냐.”

“보면 몰라? 죽기 전에 도망쳐. 지안과 함께.”

“하지만 기사들이 호각을……”

“오늘 밤 사이 바꿔치기해 둘게. 불어 봤자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도록. 얼마 안 가 들통나겠지만 시간은 벌 수 있을 테지. 새벽이 되면 서쪽의 첨탑으로 와. 지안과 나는 거기 있을 거야.”

막힘 없는 말에 일리아스의 눈썹이 구겨졌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열쇠를 챙겨온 것도 그렇고,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방문한 게 틀림없었다. 일리아스는 주저하며 물었다.

“……이비엔, 너는 알레인을 거스르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랬었지.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어.”

긍정하며 이비엔은 일리아스와 악시온을 노려보았다.

“나는 여전히 지안이 황성에 남길 바라. 황성이 그렇게나 싫다면 제도에라도 남아주길 원했어. 그런 마음으로 이멜다에게 협조했지.”

“협조?”

“…내 독단이었고, 강제였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라면 지안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 그랬는데… 지안은….”

체념 어린 얼굴로 중얼거린 이비엔은 돌연 눈빛을 바꾸며 이를 갈았다.

“전부, 전부 오라버니와 공작 탓이야! 둘 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를 빼놓고 북부로 떠나려 하다니……. 내게 언질해 줬어야지! 알렸어야지!”

“…사람을 남겨두려 했어. 네가 알 수 있도록.”

“사람을 남겨? 하! 이제 와서 그딴 변명 하지 마!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 알아? 지안이 떠나면, 나는? 난 어떻게 되는 거야?”

“이비엔.”

“나는 오라버니와 달라. 여태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고, 제도 밖으로 벗어나 본 적도 없어! 줄곧 테리온의 황녀로만 자라왔단 말야! 나는, 난 황성을 떠나는 것도 제도를 벗어나는 것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어. 그런 내게, 선택을 고민할 시간 정도는 주었어야지!”

아프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일리아스는 잠자코 입을 다물어야 했다. 평소라면 그럴 시간조차 없었노라 잘라 말했을 것이나, 눈물이 이비엔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자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안은…… 더 이상 날 믿지 않아. 내가, 내가 황성에 남기를 강요해서…. 흐윽….”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이비엔의 모습에 두 남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특히 일리아스의 충격이 컸다. 그 자존심 센 이비엔이, 황녀가 이토록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다니.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다면 이비엔이 운 건 일곱 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아직 어리다는 걸 그는 새삼 느꼈다.

“나도 지안을 그런 식으로 붙잡아두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나라고 능력자로 발현하고 싶었는 줄 알아? 나는, 난 죽고 싶지 않아!”

“이비엔….”

뺨을 훔치며 감정을 추스른 이비엔은 울컥 치밀어오른 말들을 애써 삼켰다. 곧 기사들이 돌아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까운 시간을 소모할 순 없었다.

애먼 데 분풀이를 하고 있단 것 정도는 이비엔도 잘 알았다. 알지만,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다. 화를 낸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분노를 앞지르고 있는 유일한 감정이 딱 하나 있었다. 후회. 일리아스와 악시온을 찾은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지안과의 관계를 이전과 같이 회복하고 싶었다. 간절히 돌이키고 싶었다. 설혹 이를 위해 황녀란 지위를 내버려야 한대도 상관없었다. 유폐도 두렵지 않다.

목적한 바를 상기한 이비엔은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일리아스와 악시온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 * *

기사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한 지안의 발끝이 계단에 턱턱 걸렸다. 첨탑의 가파른 높이 탓이었다. 계단 모서리에 찧은 발등이 아플 만도 하건만, 지안은 무엇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헤롤드는 괜찮을까? 치료는 받았을까? 손을…… 다시 쓸 수는 있을까?’

번뜩이던 기사의 검과 헤롤드의 비명이 번갈아 가며 뇌리를 지배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폐부가 아프게 조여들고 심장이 고통스레 쿵쿵거렸다. 지안은 멍한 얼굴로 기사들이 저를 첨탑에 던져두고 문을 잠그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간신히 벽에 기대앉은 채 후회를 곱씹던 지안은 뒤늦게 들려온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잠긴 문을 열고 들어온 건지, 세 명의 사제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후드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쓴 채였다.

이윽고 천천히 후드를 벗은 사제들이 이름을 밝혀왔다.

“에다의 성녀를 뵙습니다. 크론쇼입니다.”

“에다의 성녀를 뵙습니다. 로웰입니다.”

초라한 몰골로 벽에 기대앉은 사람에게 건네기엔 지나치게 정중한 인사였다. 심지어 저들 셋 중 하나는 사제가 아니라 황녀 전하였다. 평소와 같은 드레스 차림이 아닌 사제복인 걸 보아…… 사제들 사이에 섞여 몰래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기사들의 눈을 속인 건지 궁금하지도 않다.

지안은 화답하지 않은 채 갑작스러운 방문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째 신관 중 한 사람의 얼굴이 익숙했다.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로웰이 말했다.

“성축일 당일, 제가 안내역을 맡아 기도실을 안내해 드렸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조심스런 말에 지안은 그제야 로웰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로웰은 난처한 얼굴로 크론쇼와 이비엔을 바라보았다. 입을 연 건 크론쇼였다.

“저희는 이번에 황태자 전하의 즉위식을 축복하기 위해 황성에 초대되었습니다. 겸사겸사 성녀님을 뵙는 것도 제 업무의 일환이고요.”

그 말에 지안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가감 없는 감정표현에 크론쇼는 빙긋 웃으며 먼지 쌓인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제가 보일 행동이라기보단 거리의 잡부처럼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

“이제야 눈높이가 좀 맞군요.”

“…….”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시길. 겉으로 드러난 입궁 명분은 즉위식을 축복하기 위함이지만, 사실은 신탁을 전해 드리기 위해 찾아뵌 것이니까요.”

“신탁이라니?”

그렇게 되묻자 크론쇼의 태도와 눈빛이 돌연 진지해졌다. 관심 없는 티를 팍팍 내며 어디 말해 보란 식으로 대했으나,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절로 허리가 빳빳해졌다. 곧 심각한 어조로 그가 신탁의 내용을 털어놓았다.

“곧 재해가 일어날 겁니다. 언제, 무엇을 통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위스로데 대륙은 곧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

“그리고 당신은 이를 피할 수 있게 해 줄 유일한 사람이죠.”

크론쇼의 말에 지안의 입에서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잠깐, 덩달아 심각해지고 말았던 것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싸구려 영웅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멘트였다. 사제의 말에 놀라워하며 정의감을 느끼긴커녕, 차가운 환멸이 용암처럼 솟아나 지안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무슨 재해가 일어나고 어떤 종말이 찾아들지 알 수 없으나, 차라리 잘됐다. 신이 보증한, 곧 무너질 세계라지 않나. 이로써 지구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더 늘었다.

“그 사실을 전하라. 이게 저희에게 내려진 신탁이었습니다.”

이런 지안의 속내를 모르는 크론쇼는 큰 짐을 덜었단 얼굴로 연신 생글거렸다. 차갑게 빛나는 지안의 눈빛은 보이지도 않는단 태도였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하긴, 능력자들이 성녀님을 두고 구원자라 부르는 것만 봐도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이긴 하지요.”

“……용건은 그게 전부인가요? 그렇다면 그만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데.”

“엇, 이제 막 그와 관련된 고대 신학을 설명 드릴 예정이었는데요.”

“필요 없어요.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 주세요.”

신경질적이고 뾰족한 반응이었으나 크론쇼는 개의치 않았다. 실제로 지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잔뜩 경계를 세운 고양이를 대하듯 여유로웠다. 방문 직전에 황녀와 대화를 나눈 탓이었다. 황성을 향한 성녀의 반발이 몹시 거세다 했던가.

심지어 눈앞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고 했으니… 충격이 클 것이다. 빙긋 웃은 크론쇼가 말했다.

“혼자 있고 싶으신 이유가 북부의 기사 때문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잘린 그의 손목을 방금 붙여주고 오는 길입니다.”

크론쇼의 설명에도 지안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를 본 로웰이 얼른 거들고 나섰다.

“사실입니다. 사제들의 신성력에는 약간의 치유능력이 있습니다.”

사실일까? 지안은 대꾸 없이 두 명의 사제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의심 어린 시선에 크론쇼는 보란 듯 사제복 속에서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꺼내 토닥여 보였다.

“제가 금화 없이 함부로 성력을 사용하지 않는데…. 황녀 전하가 이렇게 부탁하셨죠. 만족할만한 거래였습니다.”

히히 웃어 보이는 크론쇼의 모습에 로웰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하아. 부디 알아 주십시오, 성녀님. 모든 고위 신관들이 크론쇼님 같은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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