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러나 지안이 기세 좋게 집어던진 찻잔은 이멜다의 얼굴을 가격하지 못했다. 날아든 찻잔을 황태자가 서둘러 쳐 냈기 때문이었다.
쨍그랑―!
황태자의 손에 튕겨져 나간 찻잔은 목표물을 잃은 채 힘없이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집어던질 만한 거라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지안은 손바닥이 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찻주전자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던 기사들이 경악하며 몸을 던진 탓에 허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애꿎은 기사가 뜨거운 찻물을 뒤집어쓴 채 신음할 뿐이었다.
그 결과 지안은 서둘러 다가온 기사들로 인해 두 손을 등 뒤로 넘긴 채 제압당해야 했다. 그나마 황녀 전하의 제지로 볼썽사납게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헛웃음을 짓다 말고 파들거리는 지안의 입술을 본 이멜다가 말했다.
“테이블이 엉망이군. 치워.”
그녀가 명령하기 무섭게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테이블을 치워냈다. 순식간에 말끔해진 테이블을 눈으로 가리켜 보이며 이멜다가 말했다.
“이젠 집어던질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군요.”
“…….”
“자. 그래서 대답은?”
“……좋아. 해 주지.”
지안의 대답에 이멜다는 환한 미소로 카리나에게 눈짓했다. 카리나는 기가 질린 얼굴로 주저했으나, 이멜다의 재촉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지안의 앞으로 향했다.
기사들이 눈치껏 지안의 구속을 풀자, 지안은 자유로워진 두 팔을 들어 그대로 카리나를 힘껏 껴안았다. 기껏해야 손을 잡으리라 예상했던 이비엔과 이멜다가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이상을 느낀 순간, 지안은 카리나의 어깨에 턱을 괴며 씩 웃어 보였다.
“그럼 시작할까.”
그 말과 함께, 지안은 한껏 응축시켜 놓았던 제 기운을 날카롭게 풀어냈다.
무려 재각성까지 한 마당이다. 재각성 이후 시도해 본 적 없어 단순 짐작에 그칠 뿐이지만……. 노예 경매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설픈 고통을 안겨주는 가이딩이 되진 않을 것이다.
이런 지안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몸을 꿰뚫어 버리는 지안의 기운에 카리나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들이 억지로 지안에게서 카리나를 떼어 놓을 때까지 지안은 가이딩을 멈추지 않았다.
이비엔은 홉뜬 눈으로 기사들에게 구속된 지안을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 씩씩거리는 호흡, 그리고…… 잘 벼려진 기사들의 검처럼 날카로운 기운. 그것은 이비엔이 익히 알고 있던 지안의 기운이 아니었다.
그녀의 기운은 언제나 미지근한 온기로 출렁였다. 호수의 표면에서 일렁이는 잔잔한 물결 같았고, 때로는 풀잎에 스미는 한 조각 햇살 같았다.
그랬는데…… 더는 아니었다. 한껏 응축된 기운은 얼음처럼 서늘했다. 거꾸로 자라난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천천히 스며들며 폭주를 안정시켜 주었던 이전과 달랐다. 능력자이기 때문에 그 변모를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피부로 와 닿는 흉흉한 기운에 이비엔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다급한 몸짓으로 카리나를 끌어안은 이멜다가 말했다.
“죽여.”
그 말에 지안은 멈칫했다. 이멜다가 말한 사살 대상이 설마 자신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황녀 전하의 표정과 기사들의 움직임을 보건대…… 아니다. 죽임당하는 건 자신이 아닌 헤롤드였다.
그가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으므로 지안은 다시금 가이딩을 시작했다. 기사들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였지만, 처음부터 접촉 같은 건 할 필요 없었다.
“아아악!”
기운을 풀어내며 방사 가이딩을 진행하자, 겨우 진정하기 시작하던 카리나가 다시금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지안은 꺽꺽대며 몸부림치는 카리나를 외면한 채로 외쳤다.
“헤롤드가 죽으면 그 여자도 죽어!”
그 말에 이멜다는 입술을 깨물며 눈짓으로 헤롤드에게서 기사들을 물렸다. 기사들이 물러나자 지안 역시 방사 가이딩을 멈췄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멜다는 연신 카리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나마 들려오는 거라곤…… 희미한 신음뿐.
이멜다는 동요하며 지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카리나가 비명을 지르는 즉시 성녀에게서 카리나를 떼어 놓았다. 성녀는 기사들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였고, 그녀의 그림자 하나 카리나에게 닿지 않았다. 그런데 왜? 어째서?
이멜다는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알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부산히 여러 가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생각의 갈래를 아무리 뻗어도 걸리는 게 없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분노어린 물음에 지안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왜? 뭐가 문제야?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어. 그게 전부야. 의심되면 황녀 전하께 물어 봐. 내가 뭘 했는지. 전하는 잘 알고 계실걸.”
빈정대는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움찔 몸을 굳혔다. 이멜다는 창백하게 질린 황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저 말이 사실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힘없이 맞잡은 황녀의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걸 보니 질문은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사실, 놀란 건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마구잡이로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심지어 두 번 다 고의였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건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헤롤드를 인질로 잡히지 않았나. 그를 지키기 위해서 뭐든 해야 했다. 설혹 그것이 협박일지라도, 무고한 에스퍼를 공격하는 일이더라도…… 상관없다.
지안은 축 늘어진 채 후작 영애의 품에 안겨 있는 카리나를 바라보며 음울히 말했다.
“내가 성녀 노릇을 하길 원했다면, 사람 목숨을 가지고 날 협박하진 말았어야지.”
“…….”
“당신이 그러면 나도 같은 사람이 되어 주는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지안의 말에 이멜다의 입가로 조소가 스쳤다.
“……다시 묻지. 카리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같은 말을 또 하게 만드네. 원하는 대로 해 줬어. 대신 조금 거칠게. 이전처럼 다정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폭주에선 확실히 멀어졌을 테니 안심해도 좋아. 내가 있는 한 죽지는 않아. 대신…… 죽을 만큼 아프긴 하겠지. 매일같이. 늘.”
지안의 말에 이멜다는 하녀들을 불러 카리나를 맡겼다. 카리나를 부축한 하녀들이 서둘러 온실을 벗어나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지안 못지 않게 서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성녀께서 싸고도시니, 저 기사를 죽이는 건 안 되겠군.”
그 말에 지안은 눈을 빛냈다. 강짜를 부린 게 통한 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이멜다가 이어 지시했다.
“하지만 본보기로 손 하나 정도는 자르는 게 좋겠어.”
“그랬다간…!”
지안은 미처 반박하지 못했다. 다 말하기도 전에 기사의 검이 헤롤드의 팔을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악―!”
헤롤드의 비명에 지안은 두 손으로 입을 가려야 했다. 대응할 새도 없이 드레스 자락에 피가 튀고, 카펫 위로 붉은 것이 왈칵 흘렀다. 지안은 신발 밑창에 끈적하고 따뜻한 액체가 달라붙는 것을 흔들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힙겹게 입술을 틀어막은 손가락이 와들와들 떨렸다.
이멜다는 그런 지안의 양어깨를 짚었다. 놀라 고개를 든 지안은 바짝 다가와 선 이멜다의 눈동자 위로 붉은 광채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명심하세요, 성녀님. 제겐 북부의 기사들이 많이 남아 있답니다.”
“당신…….”
“설마. 그들을 전부 불구로 만들고 싶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그 말에 막 흘러나오려던 눈물이 그대로 메말라 버렸다. 손가락의 떨림도 뚝 멎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거나 화가 나면 도리어 차분해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대치하던 중, 씩 미소 지은 이멜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오늘의 일은…… 공평하게, 한 번씩 주고받은 것으로 하죠.”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가볍게 이어지는 말에 지안은 참지 못하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공평? 그 여자는 멀쩡하지만 헤롤드는 손을 잃었어! 이게 어딜 봐서 공평하지? 그는 기사야! 검을 쥐는 기사라고!”
“멀쩡한 사람이 곧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기도 하나요?”
파리한 얼굴로 버티고 선 지안에게 이멜다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시길 바라요. 성녀라는 칭호에 걸맞게 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제국은 당신을 필요로 해요. 나 역시 그렇고. 불만이 있단 건 이해해요. 예정에 없던 성녀 노릇을 해야 한다니 갑작스럽기도 하겠지.”
안쓰럽단 듯 말한 이멜다는, 돌연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게 카리나에게 함부로 할 이유가 되진 못해.”
차갑게 웃어 보인 이멜다는 기사들을 시켜 딱딱히 굳어 버린 지안을 첨탑에 가두라 명했다.
그 명을 들은 이비엔은 기사들을 제지시킨 뒤 직접 지안을 부축하기 위해 나섰다. 지안이 비틀거리는 걸 모두 목도한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잔뜩 충격을 받은 지안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급히 내밀어진 이비엔의 손은 짝! 소리와 함께 뿌리쳐지고 말았다.
“지안…….”
“손 치워요.”
얼음장같이 서늘한 목소리엔 진한 거부감이 깃들어 있었다. 내밀었던 손을 주저하며 거둔 이비엔은 차마 지안을 뒤따라가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 * *
뜻밖의 손님에 일리아스와 악시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게, 지하 감옥에 방문한 사람이 황녀 이비엔인 탓이었다. 감옥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황녀 전하, 여기는 어쩐 일로…….”
“물러나. 명령이다.”
능력자가 된 이후로 평가가 예전 같지 않아지긴 했지만, 무려 황족이었다. 그간 감시의 고삐를 느슨히 하지 않았던 기사들은 황녀의 명에 머뭇머뭇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비엔! 지안은? 그녀는 무사한가?”
철장에 매달려 외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이비엔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말부터 할 줄 알았어. 언제 목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런 말이 나와?”
“그래서 지안은?”
타박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한 반문에 이비엔은 쓰게 웃었다. 바로 옆에 갇혀 있는 공작 역시 입만 열지 않았을 뿐,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첨탑에 갇혔어. 내일 즉위식이 열리면…… 성녀라고 공표될 거야. 이후론 아마 평생을 그곳에 갇혀 살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