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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108/199)

108화

예전이었다면 이 소식을 들으며 조금 기뻐했을 테고, 걱정을 덜었다며 안도했을 것이다. 죽음을 맞이한 이동 능력자를 불쌍하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기쁘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이동 능력자로 인한 위협이 사라진 건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다가 단순히 붙잡아 가둔 게 아닌 즉결 처형이라는 부분이 거슬렸다. 이동 능력자란 특수성 때문이란 걸 이해는 한다만, 시신은 제대로 묻어나 주었을까? 퍽 불쾌한 경험을 선사한 사람이긴 해도 이렇게 날벼락 맞듯 죽어야 할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었는데.

‘안 됐네.’

지안이 미간을 찌푸린 채 별달리 반응하지 않자 이비엔은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동 능력자를 처리했으니 더는 납치당할 일 없을 거야. 그간 답답했지? 커다란 창문이 있는 곳으로 방을 옮겨 줄게.”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이비엔이 쇠창살의 잠금쇠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이내 철창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안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이비엔의 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후원으로 가자. 이젠 아무 걱정 없이 맘껏 산책할 수 있어. 아니면 온실로 갈래? 정원사가 새로 온실을 단장해서 무척 예뻐. 너도 좋아할 거야.”

말을 마친 황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지안의 손을 잡았다. 지안이 자신의 손을 마주 잡아 올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나가며 지안은 철창 너머로 느릿하게 발을 디뎠다.

잘 가꾸어진 후원까진 금방이었다. 긴 황성의 복도를 걸어 나가자 싱그러운 풀냄새가 훅 끼쳐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내리쬐는 햇살은 미지근한 온기로 뺨을 어루만졌다.

무려 나흘만의 외출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호사스러운 감옥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았다.

그러나 앞뒤로 황녀 전하의 하녀와 기사들이 포진해 있다. 그들의 임무가 감시라는 걸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다들 몇 걸음 떨어진 채로 따르는 것이었지만……. 등 뒤에 바짝 달라붙은 여러 사람의 발소리와 갑옷의 덜그럭거림이 들뜨려는 기분을 바닥에 붙잡아두었다. 산책이라기보단 단순 이동에 더 가깝달까.

지안은 느릿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무더기로 피어난 꽃들이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조금도 눈이 즐겁지 않았다. 게다가 후원에 들어서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에도 몇 번이나 눈치를 보는 황녀 전하와 눈을 마주쳐야 했다. 그녀가 얼마나 조마조마해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파장의 떨림을 읽는 것만으로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까.

문제는, 뻔히 알면서도 굳이 이를 해결하고 싶지 않다는 점에 있었다.

이런 식으로 뻣뻣하게 굴 게 아니라 황녀 전하를 다독이고, 안심시키고, 함께 지구로 가줄 수 없겠냐고 제안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황녀 전하와 사이가 나빴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전하가 각성하던 순간 관여하지 않았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지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을 깨물어 떨림을 잠재운 지안은 가라앉은 얼굴로 동그란 구두 끝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후원을 한 바퀴 다 돌 때까지 그 시선은 일절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안은 더 이상 이비엔과 눈을 마주치는 일 없이 산책을 마칠 수 있었다.

* * *

일리아스와 악시온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따로 가두어졌다. 능력자인 그들을 비웃듯 보통의 감옥이었다.

철장이야 녹이면 그만이었고 두꺼운 벽도 얼마든지 깨부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얌전히 감옥 안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지안에게 사람을 붙여 놓았다는 황태자의 말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벗어나는 순간 탈주를 알리는 호각이 곳곳에서 울릴 것이고, 그 소리가 울리면 지안은 곧바로 죽을 것이다. 흐뭇한 얼굴로 그 사실을 설명한 황태자는 비웃는 얼굴로 탈주를 종용했다.

“그 여자의 목이 바닥을 뒹구는 걸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나와도 좋다. 너와 공작은 능력자니 능히 그럴 수 있을 테지. 도망치든 반격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자신감을 내비치는 황태자의 모습에 두 사람은 더더욱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리아스는 사정이 나았다. 지안이 가끔 혼잣말을 할 때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답답함을 참다못한 공작이 벽을 부수려 할 기미를 보일 때마다 지안의 혼잣말을 그에게 전해 주어야 했다.

물론, 지안이 내뱉은 모든 말을 전달한 건 아니었다. 그에게 알릴 필요 없는, 홀로 간직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은 심장이 녹아내릴 만큼 소중했다.

―전하. 괜찮으세요? 저는 안 믿어요. 전하가 시해범이란 거.

―전하.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실래요? 차원을 넘는 방법이 있어요.

이후로도 가끔씩, 지안은 자신을 찾았다. 불안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전하. 삼황자 전하. 일리아스 전하. 제 말 듣고 계시죠?

지안이 자신을 찾을 때마다 일리아스는 그 부름에 응답하고 싶어 몸이 달았다. 감옥을 부수고 지안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소망이든 지안의 안전보다 우선될 순 없었다.

고작해야 일반인에 불과한 기사들로 구성되었다지만, 감옥의 경비는 꼼꼼하고 살풍경했다. 무엇보다 기사들 전원이 목에 호각을 걸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저항의 기미가 보이면 기사들은 보란 듯 호각을 만지작거렸다.

개중엔 일리아스를 향해 침을 뱉는 자도 있었다. 손가락질은 예사였다. 황제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갇힌 마당이니 기사들의 반응이 험악한 건 당연했다. 일리아스는 그저 모든 모욕을 참아 넘겼다.

물론, 그라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꺼번에 기사들의 목에 걸린 호각을 불태우는 것을 하루에도 수십 번 상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십 개의 호각을 한 번에 불태울 수는 있어도, 단 하나의 호각도 빠뜨리지 않고 불태울 순 없었다. 기사들의 움직임과 호각의 위치를 일일이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먼 거리에서의 이능 발현이 가능해지긴 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건 지안이 위치를 짚어주는 지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야에 보이는 거라면 모를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호각의 위치를 일일이 다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거듭 고민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지안을 되찾아 황성을 벗어나고 싶으나……. 그녀가 안전하리란 확신 없이는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다.

치밀어오르는 답답함에 일리아스는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이는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 * *

빙긋 웃는 얼굴로 반기는 후작 영애의 옆에는 일전에 보았던 치유 능력자가 있었다. 어쩐지 황녀 전하가 온실로 가자고 하더니……. 미리 이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오랜만이군요, 성녀님.”

살가운 인사였으나 지안은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성녀라니. 분명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여전히 나를 그따위로 칭하는 건가.

대꾸 없이 착석을 마친 지안은 원형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면면을 쭉 돌아보았다. 황녀 전하. 후작 영애. 치유 능력자. 그리고…… 황태자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건지 모르겠으나, 반가운 용건은 아닐 것이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하녀가 찻잔을 세팅하고 차를 따라 주었다. 지안은 쪼르륵 소리를 내며 차오르는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지안에게 황태자가 말했다.

“그대를 부른 건, 신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폭주를 앞둔 능력자들을 구제해 주길 바라서다. 이곳 황성에서. 성녀라는 칭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 주었으면 해.”

“…….”

“마침 바로 내일이 내 즉위식이다. 즉위식이 끝난 후 성녀가 능력자들의 폭주를 막는 기적을 펼칠 거라 공표한 상태지.”

“제 동의도 없이 잘도 그런 짓을 하셨군요.”

“불만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가엾은 능력자들이 폭주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 우선은…… 카리나부터 도와주었으면 좋겠군. 그녀는 귀중한 치유 능력자이니 훗날 성녀에게도 적절한 도움을 줄 거다.”

그 말에 지안은 설핏 웃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어야 했다. 애써 귀담아들었는데 황태자의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죄다 기막힌 소리뿐이다. 차라리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 게 좀 더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지안은 십분 인내심을 발휘하며 내내 궁금해했던 것을 물었다.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는 어디에 계시죠?”

“작위를 박탈했으니 더는 공작이 아니다. 악시온은 북부로 호송될 것이고, 일리아스는 국외로 추방될 것이다.”

“기사들은요?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의 기사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제도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제가 성녀 노릇을 거부하면 저도 그렇게 되나요?”

“그렇겠지.”

“좋네요. 거부합니다. 여기서 차나 마시고 있는 것보다는 감옥이 좀 더 마음 편할 것 같아서요.”

비웃음 서린 말에 알레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비엔 역시 경악하며 지안의 이름을 불렀다. 심드렁한 건 오직 지안뿐이었다.

차분히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던 이멜다가 입을 열었다.

“해야 할 텐데요.”

“하게 만들어 보시든가.”

굽힘 없는 지안의 대답에 이멜다는 말없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온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바로 그 너머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나타났다. 누군가를 구속한 채였다.

지안은 기사들에게 붙들려 끌려오는 사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헤롤드였다! 경악으로 두 눈을 크게 뜬 지안은, 바짝 얼어붙은 채 기사들의 검이 헤롤드의 목젖에 닿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멜다가 말했다.

“성녀님은 제 아버지의 머리를 보고 혼절하셨었죠. 사람의 머리가 날아가는 걸 보고도 동요하지 않을 만큼 강심장은 아니세요. 그렇죠?”

“당신……!”

“하셔야 해요. 성녀님이시잖아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지안은 벌떡 일어나 찻잔을 집어 들었다. 어설프게 찻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었다. 지안은 그대로 이멜다를 향해 찻잔을 집어 던졌다. 출렁이며 넘친 뜨거운 찻물이 손바닥을 적셨지만, 손바닥의 화끈거림보단 분노의 해소가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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