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99)

107화

“……아직도 나를 성녀로 오해하나?”

푸념하듯 중얼거린 지안은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댔다.

말해 무엇할까. 자신은 지금 세상에 이런 감옥도 있구나 싶은, 퍽 호화로운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침대는 푹신했고 대우도 거칠지 않았으나, 이는 조금도 위안이 되어 주지 못했다. 감옥이라니! 또 이렇게 갇히다니 지긋지긋했다.

공작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삼황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변론했지만, 그 말이 먹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전하는…… 삼황자 전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기사들은 죄인을 대하듯 그를 끌고 갔다. 능력자인 데다 황족이니만큼 험한 일을 당하진 않겠지만, 무려 황제 시해범으로 지목된 상황이다. 자칫 잘못하면 반역자로 몰려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 삼황자를 시해범으로 지목한 게 무려 황태자란다.

그 황태자는 눈이 좀 삔 것 아닐까. 내게 삼황자 시해죄를 뒤집어씌운 데 이어 삼황자에게마저 황제 살해범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우다니!

삼황자는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 내내 자신과 함께 있던 사람이다. 북부로 가겠노라고 말해왔던 그가 그 와중에 황제를 죽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안은 한숨을 푹푹 쉬다 말고 중얼거렸다.

“전하.”

불러 봤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어쩌면 그가 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전하. 괜찮으세요?”

조금 어색했지만 지안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저는 안 믿어요. 전하가 시해범이란 거.”

미숙한 위로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지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하필 일이 이렇게 되어서일까. 없던 용기가 불쑥 샘솟았다.

“직접 대면한 채로는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전하.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실래요? 북부 얘기가 아니에요. 차원을 넘는 방법이 있어요. 저는 정말로, 전하가 죽는 건 바라지 않아요. 황족이란 전하의 신분 탓에 여태 말하길 망설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한숨 쉬며 말을 멈춘 지안은, 일리아스가 듣고 있기를 바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사하시길 바라요. 정말로.”

그 말을 하기 무섭게 덜컹 문이 열렸다. 철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이비엔이었다. 지안은 반색하며 철창에 매달렸다.

“황녀 전하!”

반가워하다 말고 지안은 멈칫했다. 무섭게 굳어 있는 이비엔의 눈빛 탓이었다. 철창 앞에 멈춰 선 이비엔이 말했다.

“떠나려던 중 붙잡혔다는 이야길 들었어.”

“그건…….”

“북부로 갈 셈이었다지? 저택에 남겨둔 내 기사들이 내게 소식을 전하려 하자, 공작과 오라버니의 기사들이 막았다더군.”

“말씀드리려 했어요.”

“언제? 떠나고 난 다음에? 샅샅이 찾아봤지만 내게 남기는 편지 하나 없던걸.”

쌀쌀맞은 목소리에 할 말이 없어진 지안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삼황자 전하는 어떻게 되셨어요? 공작님은요?”

“나도 몰라.”

입으로는 모른다고 말하지만, 표정과 말이 일치되지 않았다. 황녀의 파장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건 알고도 말해주지 않는 거다. 뒤늦게 사정을 알고 속이 상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보단 삼황자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겨내는 게 먼저였다. 황녀 전하도 알 것이다. 누가 황제를 죽였든, 삼황자가 범인일 리 없지 않나.

“전하. 삼황자 전하는 시해범이 아니세요. 그리고 북부로 떠나자고 결정된 건…… 오늘 당일이었다구요. 너무 갑자기 결정되어서 경황이 없었어요. 서운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로, 아무 소식도 남기지 않고 떠나려던 건 아니었어요.”

“…….”

“말해 주세요. 공작님은, 삼황자 전하는 어떻게 되신 거죠?”

“모른다고 했잖아!”

버럭 소리치는 말에 지안은 꼭 붙잡고 있던 쇠창살을 천천히 놓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일그러진 황녀 전하의 얼굴도 그렇고, 전하에게서 흘러나오는 파장도…… 이전과 달랐다.

“이멜다와 나는 네가 황성에 남길 바라.”

“네?”

“뭐든 약속할게. 바라는 전부를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해 줄게. 그러니…… 북부로 가지 마.”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분명 전하는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거기가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

“전부 거짓말이셨나요?”

“거짓말은 너도 했잖아! 그리고 넌 언제나! 언제나 떠날 생각뿐이지!”

격양된 외침에 지안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침묵했을까. 고개 숙인 채 감정을 추스르던 황녀가 눈을 마주쳐 왔다.

“나는 살고 싶어. 네가 없으면 안 돼.”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 위로 후회와 분노가 동시에 드러났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했으나 지안은 배신감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 결정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 비겁해지는 건 나쁘지 않다. 나 역시 그랬으니. 황녀 전하를 비난할 순 없다. 그렇지만…….

“저도 그래요.”

고저 없이 돌아오는 덤덤한 답변에 이비엔은 흠칫 몸을 떨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답한 지안의 입매가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 점점 더 건조해지는 지안의 눈빛에 이비엔이 다급히 말했다.

“지내기에 나쁘진 않을 거야. 오라버니라면 걱정 마. 이동 능력자가 잡히기 전까진 멀쩡할 테니.”

그 말에 지안은 처음으로 그 이동 능력자가 사로잡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 삼황자 전하가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고 난 다음에는요?”

“국외로 추방되겠지.”

“그럼 공작님은요?”

“거기까진 나도 몰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삼황자 전하처럼 추방될 리는 없고……. 다시 전하의 전속 시녀가 되나요?”

“곧 그렇게 될 거야.”

지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더는 질문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곤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과 강철처럼 굳어버린 분노뿐.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늘 상상해 왔어요. 제가 가이드인 게 밝혀졌으니까요.”

시리고 날카로운 어조에 이비엔은 몸을 굳혔다.

“다만, 절 가둘 사람이 전하이실 줄은 몰랐어요.”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에 이비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깨져버린 유리잔처럼, 애써 쌓아둔 호의와 신뢰가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결과는 같다. 처음부터 선택지 따윈 없었다. 그러니 다시 돌아간대도, 지안을 붙잡는 것을 택할 것이다.

* * *

세상에 어느 죄인이 감옥에서 스테이크와 와인. 껍질을 일일이 까서 내린 포도주스, 초콜릿으로 만든 케이크 따위를 즐길 수 있을까. 지안은 심드렁한 기분으로 하녀들이 음식을 나르는 걸 지켜보았다.

개중에는 힉스에서 공수해온 올리브 안주도 있었다. 저걸 즐겨 먹었던 걸 황녀 전하가 기억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배려가 마냥 반갑지 않아 지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기를 씹어 삼켰다.

후회는 언제나 한발 늦게 오는 것이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누구든 아픈 법이다. 가이드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처음의 거짓말을 끝까지 고수했다면, 뻔뻔스럽게 그들과 같은 능력자인 척했다면 조금은 사정이 나았을까?

답은 쉽게 나왔다. 아닐 것이다.

사람은 늘 자기 본위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세상에 널린 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니, 제가 가이드든 능력자든 중요하지 않았을 거다. 아마도 돌고 돌아 같은 결과로 귀결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지안은 실망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애를 써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실망이 크다는 증거였다.

목이 메어오는 탓에 식사를 하기가 힘들었다. 꿀꺽 삼킨 고기가 자꾸만 목 언저리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캑캑거리며 물을 삼킨 지안은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식기를 놓았다. 더 먹다간 체할 것 같았다. 고기를 반도 못 먹고 남긴 건 처음이었다. 몸살이 나서 앓아누워도 식욕만은 언제나 좋았는데…….

지안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깊이 숨을 몰아쉬는데도 온몸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답답했다. 물 아래로 깊이 잠수한 것 같은 무거운 긴장감이 전신을 타고 올랐다.

그러나 별수 있는가. 황녀 전하를 믿은 것도, 더는 거짓말로 상황을 무마하지 말자는 판단도 모두 자신이 내렸다. 이게 그 결과라면, 안일하게 굴었던 대가를 돌려받는 거라고 여기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좋은 일 한두 가지 정도는 생기는 법이다. 아니, 아니지. 지금 같은 경우에는 좋은 일이 아니라 나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이동 능력자가 처리되었다고요?”

뜻밖의 소식에 지안은 입을 열어 반문해야 했다.

지난 며칠간 자신이 무엇을 말하든 입을 꾹 닫고 있던 지안이 처음으로 꺼낸 물음에 이비엔은 반색하며 답했다.

“황성에 침입한 이동 능력자를 찾았단 신고가 있었어. 소재를 파악한 기사들이 추적하자 보란 듯 능력을 사용해 도망쳤다더군.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서 거주지와 인상착의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었지.”

“이능을 사용해 도망쳤을 텐데. 어떻게 잡은 거죠?”

그 질문에 이비엔은 대답을 잠시 주저했다. 앞서 이동 능력자를 ‘처리’했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잡았냐고 묻다니……. 이동 능력자를 잡아 가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무래도 지안은 자신의 말에서 이동 능력자의 죽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밤중에 몰래 능력자들을 투입시켰어. 하필 이동 능력자라, 덮친 즉시 즉결 처형해야 했고.”

“……아하.”

그제야 이동 능력자가 죽었단 사실을 안 지안은 한발 늦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지안을 향해 이비엔이 물었다.

“가능하면 시신의 얼굴을 네게 확인받고 싶지만…… 무리겠지? 그랬다간 네가 기절할 테니.”

그 말에 지안은 말없이 미간을 구겼다. 봉변을 맞듯 죽임당했을 이동 능력자의 얼굴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다. 아는 얼굴인 만큼 더더욱. 이미 다른 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하지 않나.

너무 갑작스러워서일까. 이동 능력자가 사라진 게 제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당최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요?”

“없다고 봐. 네가 증언한 인상착의와 비슷한 자였어.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이더군. 제법 잘생겼고 말이야. 맞지?”

대강 들어맞는 설명에 지안은 그대로 생각을 멈췄다. 그래. 죽은 모양이네. 최근에 알게 된 것 중 가장 유의미한 소식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