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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6/199)

106화

방 안에 들어서서 이븐을 본 일리아스가 말했다.

“너는…… 신전에서 본, 땅을 다루는 이능력자군. 맞나?”

“맞습니다, 삼황자 전하. 이븐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이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다루는 황족, 삼황자 일리아스 테리온. 황태자궁을 불사른 그의 악명은 너무도 유명했다. 못 들어본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로.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새벽에는 북부로 떠날 예정이다. 호위 대상이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북부를 언급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이븐은 놀라지 않으려 주의해야 했다. 잠시 머뭇거린 그녀는 이런저런 추측에 무게를 실으며 삼황자의 말에 조심히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채로 뒤따를 거다. 만약에 지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염려 마십시오. 호위라면 자신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이븐의 말에 일리아스의 얼굴 위로 안도와 서글픔이 서렸다. 그녀의 자신감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하긴, 땅속까지 뚫고 들어오는 칼이나 창은 없을 것이다. 씁쓸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삼황자의 모습에 이븐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갸웃댔다.

바로 그 때, 지안과 공작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삼황자를 보고서 잠시 굳었다. 먼저 표정을 푼 건 지안이었다.

“와 주었군요, 이븐.”

지안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븐의 손을 잡았다. 신전에서 도움받은 것도 있고, 여차할 땐 삼황자를 대신할 능력자다. 환심을 사 둬야 할 인물이었다.

이븐은 양손에 닿아온 접촉에 가볍게 감격하다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삼황자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뒤이어 지안이 슬쩍 눈을 굴려 그 뒷모습을 곁눈질하는 것도 보았다. 어딘가 착잡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지안이 다시금 자신을 바라보며 반겨 주었으므로 그녀는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이븐에게 악시온은 몇 가지 주의와 요청을 했다.

“지안을 노리는 이동 능력자가 있다. 이능을 여럿 다룰 수 있고, 그중 하나로 까마귀를 부린다더군. 그러니 날짐승을 조심해라. 혼선을 주기 위해 세 대의 마차를 동행할 예정이고, 너는 지안과 같은 마차에 탑승한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마차의 바닥을 헐겁게 만들어 놓았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닥을 부수고 땅속에 숨으면 된다. 네가 챙겨야 할 사람은 지안과 나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엔 지안을 우선한다.”

“알겠습니다.”

냉큼 대답한 이븐은 이내 삼황자에게 생각이 미쳤다. 공작과 눈앞의 성녀야 고용주이니만큼 중요 인물이지만, 신분으로 따지면 삼황자야말로 제일 중요한 인물 아닌가?

“그런데 삼황자 전하는 어떻게 합니까? 그분도 제가 호위해야 할 대상입니까?”

“네가 보호해야 하는 건 지안뿐이다.”

왠지 험악하게 들려오는 말에 이븐은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성녀를 노리고 두 남자가 경쟁하고 있던 거였구만.

하긴, 신전에서도 기류가 좀 이상하긴 했다. 몰려드는 능력자들을 통제하느라 정신이 없었음에도 눈치챌 수 있었던 사실이다. 보아하니 성녀는…… 공작을 택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 말에 반박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거겠지.

공작의 앞에서 삼황자를 거론하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이븐은 곧장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동 경로는 어떻게 됩니까? 늪지대나 지층이 단단히 굳어 바위투성이인 곳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븐의 말에 악시온은 기사를 시켜 지도를 가져왔다. 북부로 향할 경로를 꼼꼼히 짚어 본 이븐은 여차할 때 땅 아래로 피신하기 어렵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공작과 지안은 꽤 안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준비가 다 끝났네요.”

황녀 전하가 저택에 남겨두고 간 기사와 하녀들은 지하에 갇혔고, 황제의 움직임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삼황자마저 몹시 협조적이었다. 걸림돌은 더 이상 없었다. 딱 하나. 이동 능력자를 잡지 못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이에 대한 대비도 마련되었다.

지안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황제에게 불려갈 때만 해도 이런저런 불길한 상상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끝이 난다. 드디어 돌아간다. 돌아갈 수 있다. 북부에 도착해 샤먼을 만나면, 그 얼음산에 도착만 하면 모든 게 끝난다. 다소 급박하긴 했지만 마치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 모든 것들이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안은 예정대로 마차에 오르지 못했다. 저녁나절 갑작스레 공작저에 들이닥친 황실의 기사들의 황제의 죽음을 알려온 탓이었다.

* * *

황제의 죽음은 몹시도 기이했다.

암살자가 들어온 것도, 습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황제는 제라드 백작과 다음 해의 세수를 논의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가 아프다거나 가슴께를 부여잡는 일도 없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스르륵 쓰러져 움직이지 않은 게 전부였다. 시종에 호위 기사까지 지켜보던 사람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이는 명백한 돌연사로 보였다.

그러나 다급히 불려온 황실의와 황실 소속의 치유 능력자로 인해 상황이 뒤바뀌었다. 황제의 갈비뼈 서너 개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어진 치유 능력자의 증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폐하의…… 심장 일부가…. 그러니까 절반이.”

없습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이 사실을 알려오는 치유 능력자의 말에 황성은 발칵 뒤집혔다.

시신을 이리저리 촉진해 보던 의원도 신체의 장기가 소실되어 복부가 부풀고 있다는 소견을 밝혀왔다. 시신을 갈라 그 속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타살임이 명백했다. 황실 소속 치유 능력자와 황실의가 나란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냐는 것이었다.

세상의 어떤 괴물도 사람의 내장을 속에서부터 감쪽같이 갈라놓지 않는다. 희귀한 마법을 자랑하는 마법사들도, 그중에서도 특히 악명 높은 흑마법사의 저주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뼈와 살을 뽑아가진 못했다.

산 사람을 이런 식으로 기괴하게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능력자뿐이었다.

그리고 황성에 그나마 존재하는 능력자들은 모두 삼황자의 기사들이다.

황태자의 손에 떨어진 세력이라지만, 그들이 황태자에게 아직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개중엔 기세 좋게 기사직을 때려치우고 삼황자를 따라 황성을 떠난 자도 있었다. 중요한 건 황성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능력자들이 한때 삼황자의 수족이었거나 그가 가까이했던 자들이란 점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좋은 부자지간이 아니었다. 황제는 능력자로 발현한 삼황자를 몹시 냉대해 왔고, 어렸던 그를 탑에 가둔 전적이 있었다.

물론 황제는 적이 많았으므로 용의자가 일리아스 혼자인 것만은 아니었다. 황실과 척을 진 귀족파의 수장도 있었고, 타국의 왕들도 얼마든지 물망에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범인을 꼽으라면 결국은 일리아스 테리온이었다. 능력자들이 왕위를 찬탈해 온 역사가 종종 있어왔던 만큼, 그는 가장 유력한 시해범이었다.

게다가 삼황자는 황태자궁을 불태운 죄로 황성 밖으로 쫓겨난 죄인이었다. 이에 앙심을 품었으리란 짐작을 누구나 뻔히 할 수 있었다. 의심의 씨앗은 빠르게 자라났고. 의혹은 곧 확신이 되었다.

황성의 관료들은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제 기능을 해, 삼황자의 기사들 중 이런 은밀한 살해를 저지를 수 있는 능력자를 찾기 시작했다. 한때 삼황자의 기사였던 자들 중 그런 이능을 가진 능력자가 없다는 걸 뻔히 알았지만,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일리아스를 체포하기 위해 황실의 기사들이 공작저로 급파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이멜다는 운이 좋았다. 북부로 떠날 예정이었던 지안을 제때에 붙잡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엇비슷한 이유로 알레인 역시 흡족한 기분을 누리고 있었다. 일리아스의 처벌을 부득불 막아섰던 황제가 죽음으로써 미뤄둔 분풀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부황의 죽음에 동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미량이나마 그 동요에는 슬픔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슬픔이 일리아스를 향한 분노를 더욱 촉발시켰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분노를 자제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일리아스를 유력한 시해범으로 꼽았다. 알레인은 이것을 사실로 만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즉위식을 치르기 전이긴 하나. 황제가 사망한 이상 제위는 이미 그의 것이었다. 바로 그 막강한 권한으로, 알레인은 일리아스를 시해범으로 지목했다.

그 결과, 삼황자는 물론, 그를 가까이했단 이유로 지안과 공작 역시 나란히 황성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간 삼황자와 한 저택에서 생활한 만큼, 공모의 여지가 있는지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상은 지안을 확보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 * *

참담했다. 다 된 밥상이 엎어져도 이렇게 화가 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안은 마냥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죽음 앞에선 어떤 분노도 힘을 잃고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강제 알현에 협박까지 마다치 않은 사람이었다지만, 당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 죽었다. 만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사이에 말이다.

심지어 그 사람은 황제였다.

게다가 사인이 무려 암살이란다. 그리고 그것을 획책했으리라 의심받는 건 삼황자였다.

어찌 보면 삼황자의 절박한 말이 들어맞은 셈이었다. 폐하의 군대가 제도를 에워싸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고 했던가. 그의 말대로 준비고 뭐고 황궁을 나온 즉시 움직일 걸 그랬다. 그랬다면 지금쯤 제도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대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속수무책이었다. 몰려들어 온 황실의 기사들은 몹시 적대적이었고……. 누구 하나 빠짐없이 병장기를 뽑아 든 채였다. 반면 자신들은 막 북부로 떠나려고 바리바리 짐을 싸고 있던 중이었다.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나, 도주를 준비하고 있던 것 아니었냔 의심을 사기엔 충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븐이 그 난리통에서도 잘 빠져나갔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기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던 탓에 지안은 그녀와 함께 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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