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미처 다 놀라기도 전에 삼황자가 말했다.
“본래 일정 같은 건 생각하지 마라. 뭘 계획하고 있었든 포기해. 지금 가야 해. 지금이어야 한다.”
헐떡이며 쏟아지는 말에 지안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간절한 음성을 듣고 있자니 더럭 겁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동시에 의아함도 차올랐다. 그도 그럴 게, 암만 생각해 봐도 삼황자에겐 북부행을 종용할 이유가 없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또 모를까.
무엇보다 저 말이 진짜라면, 삼황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시치미를 떼고 황제가 나를 잡아 가두길 기다려야 했다. 그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다. 아닌 척해도 눈치만은 빠른 사람 아닌가. 그럴 텐데……. 떠나라고 등을 떠밀 줄이야. 대체 왜?
더는 북부행과 관련해 그를 기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기꺼우면서도 두려웠다. 지안은 얼마 없는 침착함을 애써 그러모았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지금 그게 중요하나?”
“어떻게 하실래요? 저와 함께 가실 건가요?”
“……네가 허락한다면.”
겁먹은 목소리로 답한 일리아스는 지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다급히 변명했다.
“하지만, 네가 싫다면 동행하지 않겠다. 둘로 나뉘어 이동해도 널 보호하는 데는 아무 문제 없어. 거리가 너무 멀지만 않으면 된다. 네가 안전하단 걸 확인하고 나면…….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널 뒤쫓지 않겠다.”
“…….”
“약속한다. 네가 싫다면 다시 네 앞에 나타날 일 없을 거야.”
그는 진심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파장은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했고, 그의 마음은 그보다 더 뜨거웠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일리아스의 금안이 절박히 빛났다.
엉뚱하게도 그 순간 떠오른 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평화로운 주말 아침에 챙겨 보았던, 에스퍼와 가이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의 대사.
‘가이드들이 에스퍼들 가리켜 멍청하다고 놀리는 거, 우리라고 왜 모르겠어? 알아. 다 안다고! 알지만, 때로는 알면서도 스스로를 불사르는 선택을 하게 될 때가 있는걸 어떡해? 별수 있어? 두 눈 똑바로 뜨고 비극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수밖에. 왜냐면, 바로 그게 에스퍼의 운명인걸!’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재미있긴 한데 이건 너무 비현실적인 영화야. 그렇게 생각하며 팝콘을 씹었다.
그랬는데……. 이제 보니 그 영화는 너무 현실을 철저히 반영했다. 지안은 돌처럼 굳어 있느라 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는 삼황자를 저지하지 못했다.
“도망치다 돈이 필요해지면 팔아서 자금을 마련해라. 웬만한 영지 하나쯤은 이 보석으로 사고도 남는다. 금화 한 수레 정도는 받아야 하지만, 잘 알려진 보석이니 아무리 못해도 금화 다섯 주머니 정도는 넉넉히 받아낼 수 있을 테지.”
“아니, 잠깐만, 전하. 우선 진정을 좀……. 부탁이니 좀 진정하세요. 지금 당장 폐하의 군대가 절 붙잡으러 온 것도 아니잖아요. 만약 폐하가 정말로 그러기로 하셨다면 제가 어떻게 황성 정문을 통과했겠어요? 절 보세요. 멀쩡히 황성에서 나왔잖아요.”
“폐하께선 변덕스러운 분이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갑자기 의사를 바꾸실 리 없어요. 제가 폐하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전부 아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네 목소리를 들었다. 사정을 아는 데는 그걸로도 충분해.”
“충분하지 않아요. 폐하의 직접 대면한 건 저예요 전하. 뭘 생각하시는 건지 대충은 알겠는데, 너무 넘겨짚으셨어요. 이렇게 갑자기, 뜬금없이 도망치라뇨? 폐하가 왜 공작님을 가지고 절 협박한 줄 알아요? 전하 때문이었어요. 계속 찾고 계셨대요. 전하를 살릴 방법을.”
“그럴 리 없다.”
단호한 부정에 지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황족이란 특수성 탓에 가족 간에 소통이 잘 안 되고 있었나? 그런 거야?
“아뇨. 제 생각은 달라요. 왜냐면, 폐하께선 ‘내가 승인한 이상 너는 이미 일리아스의 약혼녀다.’라고 말하셨거든요. 그렇게 말한 이상. 절 감금하진 않으실 거예요. 게다가 폐하는 전하를 걱정하고 계셨어요. 저는 그냥, 멋대로 강요하셔서 화가 난 것뿐이고요.”
“그리고 너는 그런 강요 따윈 무시하고 도망치겠지. 내 말이 틀렸나?”
“그건…….”
“네 말대로 오늘은 안전할지도 모른다. 내가 과민한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일은? 모레는? 마음을 바꾼 폐하가 널 다시 황성으로 불러들여 협박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
“안일하게 생각하지 마라. 지금 도망치는 것도 어쩌면 늦었을지도 몰라. 폐하의 기사와 비밀 조사관들이 몰래 널 감시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감시라니. 반협박 같은 걸 듣긴 했지만, 직접 마주한 황제는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설혹 정말로 감시당하고 있는 게 맞다 해도……. 반쯤은 이해한다. 자식을 앞세우고 싶은 부모는 없다고 탄식하던 그는 황제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새삼 그 점을 상기한 지안은 침착히 반박했다.
“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전에, 전하의 모습을 좀 보세요. 성급하게 굴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정말로 도망쳐야 한다면 지금보다 더 태연하게 굴어야 성공하지 않겠어요?”
머리로 납득은 한 것 같은데 파장이 여전히 불안했다. 격양된 감정을 쉽사리 가라앉히지 못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알아들었다면 그만 일어나요. 일어나서 절 좀 보세요. 숨 쉬고. 흥분 좀 가라앉히시고요.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렇죠?”
달래듯 말한 지안은 일리아스를 일으켜 세운 뒤 옷가게를 벗어났다. 신발을 새로 마련할 예정이었단 걸 까맣게 잊은 채 서둘러 마차에 몸을 실었다. 자리를 비킨 척 말을 엿듣기라도 했는지, 공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싸는 게 좋겠다.”
지안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악시온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사색이 된 일리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기어이 진실을 토해내고 말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반면에 자신은……. 울컥 치밀어 오른 감정을 도무지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동요하는 걸까.
연민이라기엔 지나치고, 호감이라기엔 부족하다. 시녀 생활을 하며 겪었던 삼황자는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그 사실에 제법 짜증이 난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는 사람의 호감을 사는 법을 잘 모르는 고귀한 황자 전하 그 자체였다. 자존심을 숙이는 법. 화술로 마음을 사는 법. 양보하고 물러서는 법. 바로 이런 걸 몰랐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곧 죽을 텐데 알아서 뭐 하냐는 태도였다. 오히려 제 환심을 사려고 갖은 애를 써 온 건 황녀 전하였다. 늘 그랬다.
그랬는데……. 내가 없으면 얼마 못 살고 폭주할 걸 알면서도 날더러 도망치라고 하다니. 삼황자의 멍청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멍청하고 바보 같아서, 감탄을 넘어 화가 났다.
차라리 그가 비열하게 굴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기어이 지구로 돌아가려는 나처럼 그 역시 비겁한 선택을 했다면 실컷 욕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는 언제나 황족다운 선택을 해 왔다. 그 고위하고 잘난 인상만큼이나, 금을 들이부은 것 같은 눈동자만큼이나 언제나 찬란하고 올바른 선택만을 해 왔다. 감옥의 창살을 앞두고서 내게 기사단에 들어올 것을 종용했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폭주하는 능력자들로 인해 애꿎은 일반인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 나는 황족으로서 그들이 폭주를 일으켜 일반인들을 학살하기 전에 처단해야 한다. 황실이 능력자로 구성된 기사단을 운용하는 이유지. 때문에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 뒤로 이어진 멋없는 고백. 동의 없는 약혼. 서툴고 형편없는 선택으로 매번 나를 붙잡으려 해 왔고 바로 그 점에 진저리쳤지만, 그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마음을 전하는 법을 몰라 윽박지르고 소리쳐 화냈을망정,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로 그 사실이 지안을 위축시켰다.
초라하고, 수치스럽고, 창피했다. 인간성에 점수를 매길 수 있다면 아마 삼황자는 상위권에 속할 것이다. 그렇게나 성질머리가 더럽고 제멋대로인데도. 그는 정말이지 황족다웠다.
반면 나는, 절대로 그처럼 고귀한 선택 따윈 하지 않겠지.
* * *
알레인은 놀라고 겁먹은 채 움츠러들었다. 황태자다운 태도가 아니란 건 그도 알고 있었지만, 머리 옆으로 황동 문진이 날아들면 누구도 대범해질 수 없을 것이다. 잘못 맞았다간 머리가 깨지는데 누가 몸을 사리지 않겠는가?
쾅! 소리와 함께 벽을 친 금속 문진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뒤이어 황태자의 면전에 노호성이 터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에다의 성녀를 찾아간 거냐!”
“그게…….”
우물쭈물 입을 다무는 황태자를 답답한 얼굴로 노려본 카디스는 그 옆에 선 이멜다에게 화살을 돌렸다.
“혹시 이멜다, 네가 종용한 짓이냐?”
“저는 제 자리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제게 그것은 너무 큰 도박입니다, 폐하.”
“…….”
“그러나 가문의 일에 눈이 멀어 황태자 전하를 말리지 못한 것은…… 저의 불충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이멜다의 말에 카디스는 에를랑겐 후작의 부고를 떠올렸다. 마차 사고랬던가. 어딘가 수상쩍었지만 굳이 들추어 보진 않았다. 만일 그것이 후작가를 향한 공격이라 해도 이멜다 에를랑겐이라면 알아서 보복을 마치고 일을 잘 마무리 지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 캐물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나, 급히 불려온 이멜다는 검은 상복 차림이었고, 장례식에서 막 빠져나온 걸 증명하듯 머리에 망사 베일을 두르고 있었다. 부친을 잃은 이멜다에게 험악히 굴 수 없어 카디스는 어쩔 수 없이 잔뜩 주눅 든 황태자만 노려보았다.
황태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성녀를 끌어들이려 애쓰고 있다는 건 그도 알았다. 게다가 바로 오늘, 황성에 불러들인 성녀가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 황태자가 찾아왔다고.
결론을 내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정황으로 이미 충분했고, 이외에 더 볼 것은 없었다. 에를랑겐 후작의 죽음으로 이멜다가 정신없는 사이 귀 얇은 알레인이 독단으로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