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무겁디무거운 말에 심장이 덜그럭거렸다. 안 그래도 견디기 버거운 죄책감 위로 돌이 하나 더 얹어지고 있었다.
“이비엔이 바삐 공작저를 드나드는 것도 그렇고, 그 녀석이 답지 않게 공작저로 기어들어 가는 수모를 감수하는 걸 보면 일리아스의 생사가 그대에게 달려 있긴 한 모양이로군. 내 짐작이 맞나?”
부정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애써 뒤돌아선 채 외면해 왔던 죄책감이 와르르 무너지며 어깨를 짓눌렀다. 카디스는 파리하게 질린 지안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보고에 따르면 그대는 이제까지 나타난 적 없던 희귀 능력자인 것 같다더군. 정말로 에다가 내린 성인인지, 이능을 이용해 스스로를 성인으로 포장한 건지 모르겠지만, 둘 중 무엇이든 상관없다.”
“…….”
“네 의사와 상관없이, 내가 승인한 이상 너는 이미 일리아스의 약혼녀이니.”
“네? 그게 무슨…….”
“공작과 헤어지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말에 무겁게 전신을 짓누르던 죄책감이 빠르게 사라졌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무섭게 화가 치솟았다. 인정의 호소에는 약해도 이런 식의 강제나 억압은 참아 넘길 수 없었다. 공작과 헤어지라니. 이건 권유의 탈을 쓴 강요였다.
“싫다면요?”
“그가 위험해지길 바라나?”
지안은 귀를 의심했다. 뻔하고, 노골적이며, 권력자이기에 할 수 있는 협박이었다. 심지어 유치하기까지 했다. 이런 협박을, 설마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해 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바로 그 말이, 피어오른 분노 위로 기름을 끼얹었다.
제국의 평범한 국민이나 귀족이었다면 저 말에 납작 엎드려 빌었을 테지만, 지안에게 황제란 역사책이나 동화책 속에서나 등장하는 신비의 인물이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대면하긴 하였으나 그조차 이번 한 번으로 그칠 터. 지금까지 황제와의 대화로 얻은 것이라곤 시일을 당겨서라도 북부로 향해야겠단 결심뿐이었다. 실제로 카디스의 말은 그녀에게 조금도 위력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제가 거절하면 공작님이 위험해지나요?”
“그렇게 되겠지.”
차라리 잘못 들은 것이길 바라며 한 질문이었건만, 돌아온 건 예상 그대로의 대답이었다. 지안은 허리를 펴며 웃었다.
“협박을 참 고상하게 하시네요.”
한순간 돌변이라도 한 듯 스스럼없이 받아치는 지안의 모습에 카디스의 눈동자 위로 흥미가 떠올랐다. 연회장에서 보았던 잔뜩 겁먹은 모습을 더는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본인은 부정할지도 모르나, 우습게도 화를 내는 지안의 모습은 일리아스와 판박이였다.
“내심 기다렸던 협박 아니었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지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보란 듯 공작과 함께 떠났으면서, 일리아스가 뒤쫓자 다시 제도로 돌아왔지 않나. 차라리 그대로 공작과 함께 떠났다면 화제의 주인공이 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추문이 있더라도 잠깐에 그쳤을 테고. 일리아스도 명예를 버리고 공작저에 머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테지. 짐작이다만, 황태자궁이 불타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
“세간의 이목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영향력을 발휘하는 법이고, 그대는 이를 이용해 훌륭히 성녀란 칭호를 얻어냈다. 노림수가 있지 않고서야…….”
“이동 능력자에게 위협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삼황자 전하께 도움을 청하게 된 것뿐입니다!”
“나는 그게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답은?”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꽉 막힌 태도에 지안은 마침내 분노를 터뜨렸다.
“처음부터 답을 정해놓고 부르셨는데, 제 대답이 무슨 의미가 있죠?”
“대답이 없다면 승낙한 것으로 알겠다. 황실에 편입되는 건 네게도 나쁜 일이 아니니…….”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지안은 황제의 말을 끊었다.
“어제는 황태자 전하가 찾아와 저더러 황태자비가 되라고 제안하시더니. 오늘은 폐하가 나서서 당신의 뜻을 종용하시는군요.”
들으란 듯 비꼬는 말에 카디스가 두 눈을 홉뜨며 반문했다. 지안의 입에서 황태자가 거론될 줄은 그도 몰랐던 것이다.
“알레인이 너를 찾았단 말인가?”
지안은 이멜다의 이야기를 쏙 빼놓은 채 황태자의 만행을 고발하듯 떠들었다.
“네. 바로 어제 공작저에 방문하셨었죠.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신전과 저를 나누어 가지기 싫으시다더군요. 전 애초에 신전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황태자비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설혹 된다 한들 능력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허울 좋은 인질밖에 더 되겠습니까.”
지나치게 노골적인 말에 황제는 침음성을 삼켰다. 실제로 지안은 단어의 선택에 조금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황실에 편입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일개 자유민이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랍니다.”
카디스는 기막힌 표정으로 그 말을 들었다. 지안의 말은 폭로임과 동시에 선포였다. 대놓고 황명을 거부했음에도 그녀는 심지어 두려워하는 기색마저 없었다. 그렇다고 죽음을 각오하고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 같은 행동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따로 있을 때 드러나는 법이다. 겉보기엔 유약하고 힘없는 아가씨에 불과해 보이나, 실상은 여느 능력자들처럼 적지 않은 무력의 소유자일지도 몰랐다.
‘이외에도 특정할 만한 게 제법 보이는군.’
스스로 성녀임을 부정할 만큼 드러나기 싫어하는 성격. 호소와 동정심에 흔들리던 눈빛. 그러나 공작을 거론하며 반협박에 가까운 지시를 하자 같은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뒤바뀌던 눈빛.
지안은 카디스가 봐 왔던 어떤 사람들보다 더 입체적이었고, 스스럼없으며, 비밀이 많았다. 용기와 만용 사이에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강단 어린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눈이었다.
실제로 그녀에겐 능력자들을 구제하는 힘이 있었다. 이미 그녀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절정에 달해 있지 않나. 음지와 양지. 능력자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그녀를 원했다.
하나, 설마 황태자까지 지안에게 손을 뻗어왔을 줄이야. 분명 알레인이 스스로 생각해 내린 결정은 아닐 것이다. 카디스는 이멜다의 얼굴을 떠올리며 설핏 눈썹을 찌푸렸다.
“그만 돌아가 보는 게 좋겠군.”
기다렸단 듯 일어서는 지안을 향해 카디스가 말했다.
“성급했던 점은 사과하지. 다만, 잘 생각해 보길 권한다. 일리아스가 그리 나쁜 선택지는 아닐 것이다. 그 아이를 택하면 너는 황실이란 아군을 얻는다.”
대답 없이 돌아서며 지안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그럴 수 없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닌, 아버지로서의 부탁이다.”
어깨를 잡아 세우는 것 같은 말에 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연민보다는 분노가 더 강했다. 그럼에도 끝내 비정해지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지안은 천천히 숨을 들이켜야 했다.
얄궂게도 그 순간 떠오른 건 과거 자신을 향해 플래시를 터뜨리던 카메라들과 들뜬 기자들의 목소리였다.
‘국민 여러분. 기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한국에 드디어 S급 가이드가 나타났습니다!’
‘S급 가이드가 되신 소감 한 말씀 해 주시죠!’
‘지안 씨와 매칭을 희망하는 에스퍼가 벌써 백 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에스퍼 길드 창성의 대표 역시 협회에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 저기 헬기가 보이는군요!’
요란한 셔터 소리. 머리 위에서 들리던 헬기의 소음. 몰려든 방송사 기자들에게 가드들이 경고하며 외치던 말들. 모두가 자신을 주시했다.
그러나 주목은 한순간이었고, 희망에 찬 기대는 빠르게 원망으로 변했다. 축제가 끝난 자리에 쓰레기가 뒹굴듯 자신은 협회의 천덕꾸러기로 굴러다녀야 했다. 총평하자면, 끔찍한 경험이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는 않은 악몽이었다.
그렇게 추락한 나를, 실의에 빠진 내 손을 잡아 일으킨 건…… 라영 언니뿐이다.
‘네가 약해진 건 네 잘못이 아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희망이 한 사람에게 들이부어지면 결과는 둘 중 하나지. 망가지거나. 영웅이 되거나. 나는 네가 둘 중 무엇도 되지 않길 바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신경 쓰지 마. 알겠지? 기사 그만 봐. 네가 매칭 검사를 거부하거나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결과가 늦어지는 것뿐인데. 다들 인내심이 없어. 그렇지?’
그 위로에 오열하며 안겨 울었다. 나조차 나를 의심스러워하며 스스로의 쓸모를 의심할 때, 오직 언니만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 위로는 정말이지 따스하고 다정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끌어안고 울 수 있는 건 언니의 묘비밖에 남지 않았고, 이젠 그 묘비마저 없다. 아예 다른 세상으로 떨어져 버렸으니까.
‘심지어 여긴 가이드 하나 없는 끔찍한 세상이지…….’
그렇기에 더욱 두렵다. 나 혼자 가이드라니…… 의지할 집단도, 동질감을 느낄 동료도 없는 세상 아닌가. 어쩌면 기를 쓰며 지구로 되돌아가려는 건, 그날의 악몽이 이곳 세상에서 다시 반복될까 봐 겁이 나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모두를 살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모두의 가이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들 얼마나 나를 비난해 댈까.
나는 이미 한번 산산조각 나 버렸고. 간신히 부서진 조각을 이어붙였다. 다시 한번 추락하면, 그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질 것이다.
감당할 수 없다면 도망쳐야 하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 건 비열하지 않다.
그러니 돌아갈 것이다. 이 낯선 세상의 에스퍼들이 내게 걸어둔 희망을 모조리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