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어찌어찌 갑옷을 다 입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열 걸음을 걷고 난 뒤 스무 걸음 쉬어가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갑옷을 입고도 기사들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길래 지안은 당연히 자신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가슴받이와 어깨받이를 몸에 걸쳐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철로 된 팔 보호대와 허리에 두르는 하단 갑주까지 하고 나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도 투구에 비하면 정말 애교에 가까웠다. 지안이 생각하기에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기능을 지닌 헬멧 같은 게 아니라 일종의 정교한 고문 기구였다. 투구 때문에 정수리가 너무 아팠고, 숨을 쉴 때마다 숨이 막히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졌다.
대체 기사들은 어떻게 이런 걸 쓰고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이딴 투구를 쓰고 움직이면서도 용케 질식사하지 않는 기사들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듣다 못한 케이트가 기껏 씌워준 투구를 다시 벗겨주었다.
“괜찮으십니까? 호흡이…….”
덕분에 간신히 숨 고르기를 할 수 있게 된 지안은 다시 투구를 씌워 주려 하는 케이트의 모습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투구는 꼭 필요할 때만 쓰는 게 좋겠어요. 정말로, 목뼈가 부러질 것 같아요.”
진지한 지안의 말에 케이트는 웃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노력은 노력일 뿐, 미세하게 흐트러진 입가와 즐거움이 드러나는 눈동자를 어찌 모를까. 지안은 한숨을 쉬며 꿍얼거렸다.
“그냥 웃으세요.”
“큼, 아닙니다. 그보단 체력 단련을 좀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른스러운 권유에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체력을 증진시켜야 할 것 같았다.
“투구를 불편해하시니 이건 우선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지금 말고, 저택에서 벗어나 마차로 향할 때까지만 쓰고 있도록 하지요.”
“네. 고마워요.”
멋쩍어하는 지안의 모습을 보며 케이트는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공작과 삼황자, 그리고 황녀 전하가 이런 조그만 여자의 신변에 몹시 민감하게 구는 것도 신기하고, 이토록 성가신데도 그닥 기분이 나쁘지 않아 그것도 신기했다.
추문의 주인공에서 단번에 기적의 증인으로 변신한 사람이라 그런가? 주신 에다의 성녀라서? 곰곰이 생각해 보던 케이트는 이내 정답을 찾았다.
‘여기서 제일 힘없고 무력한 건 저예요! 저라고 답답하지 않을 것 같으세요?’
그 외침이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대한 답답함과, 강해지고 싶다는 염원이 공존하는 목소리. 스스로를 잘 알고 피력하는, 힘 있는 호소.
무엇보다 삼황자의 입이 다물어지는 광경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독선적이고 경솔하고 사납기만 하던 남자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작아지지 않았나. 정말이지 속 시원하고 근사한 장면이었다.
그가 황태자궁에 지른 불이 하필 제 기사단의 마구간에까지 번져서 아끼던 말을 잃은 걸 생각하면, 고작 이런 일로 유감이 사라지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조금이나마 고소함을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럽다.
그렇게 총평한 케이트는 이내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보다 더 지안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걸.
* * *
집요한 방해, 회유와 협박, 볼썽사나운 애원을 뒤로한 채 지안은 저택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걱정과 염려로 눈이 돌아버린 삼황자와 공작을 진정시켜야 했으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두 사람은 말싸움에서만큼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따라오실 거잖아요. 그렇죠?”
궁 안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될 테니까. 지안은 뒤따르는 걸 허락하겠다는 그 한마디로 불만을 일축시켰다. 덧붙여, 미련이 남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리아스에게 말했다.
“전하께선 멀리서도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시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칠게요.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폐하를 뵈러 가는 거잖아요. 전하의 아버지요.”
“하지만…….”
지안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일리아스를 모른 척하며 곧장 악시온을 향해 돌아섰다.
“공작님. 저 이것 좀 씌워 주세요.”
지안이 내민 건 케이트의 투구였다. 악시온은 말없이 붉은 깃이 달린 투구를 지안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별일 없을 거다.”
악시온의 말에 지안은 빙긋 웃었다. 정작 불안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건 본인인데도, 스스로의 불안을 뒤로 한 채 나를 달래다니. 바로 이런 작은 다정함 때문에 자꾸 의지하고 싶어지는 걸까. 지안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거예요.”
배웅이 끝나자 지안은 곧장 황제의 기사들 사이에 섞여 걸었다. 답답하고 숨 막히는 투구를 쓴 채 힘겹게 한발 한발 내딛느라 녹초가 되어 버렸지만, 어찌어찌 마차에 오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지안은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투구부터 벗었다. 잠깐 사이 너무 용을 쓰며 움직여서 그런지 등 뒤는 식은땀으로 가득했고, 이마엔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었다.
손수건 같은 걸 찾을 정신은 없었다. 투구를 껴안은 채 축 늘어진 지안은 미동 없이 마차의 덜컹임을 따라 흔들렸다. 그 모습에 레오폴트 백작은 지안이 실신한 게 아닌지 걱정해야 했다. 지안 역시 마차에서 내려 황성까지 어떻게 걸어 들어가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차는 성실히 달려 황성에 지안을 데려다 놓았다.
덕분에 다시금 힘겹게 황성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던 지안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황제궁의 찬란함이고 뭐고 갑옷부터 벗어 던지기 바빴다. 그 결과 지안은 다소 초라한 차림으로 황제와 대면하게 되었다.
제국 테리온의 황제 카디스.
그는 삼황자가 중년이 된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싶은 용모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한 번 마주한 적이 있긴 하지만, 당시엔 삼황자의 폭탄 발언 덕분에 황제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때처럼 주변이 번잡하지 않았고 방해꾼도 없었다. 지안은 신기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황제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넋을 놓고 황제의 존안을 관람하는 무례를 보다 못한 레오폴트 백작이 지안에게 주의를 주었다.
“큼! 폐하의 앞입니다.”
“아. 그러니까……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지안입니다.”
사무적으로 말하려 했지만, 태양이 어쩌고 하는 말을 태연히 내뱉기가 무척 힘들었다. 시대극 배우들을 향한 존경심이 절로 일었다.
지안은 황제의 면전에 섰다는 위기감도 잊고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웃다 만 것 같은 입술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연회장에선 너무 긴장해서 이런 잡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외운 대로 인사말을 읊기 바빴는데. 그새 적응을 한 걸까.
고개 숙인 지안의 머리 위로 황제의 음성이 떨어졌다.
“그대가 ‘성력 없는 성녀’로군. 맞나?”
“아닙니다.”
망설임 없는 부정에 카디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고개를 든 지안이 말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성녀가 아닙니다.”
“그럼 성축일 당일 신전에서 기적을 행사한 사람은 누구지?”
“…….”
“앉지. 귀한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두었군.”
황제의 손짓에 테이블 위로 다과와 찻주전자가 세팅됐다. 황명을 이행한 백작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물러났고, 방 안엔 지안과 황제만이 남겨졌다.
황제는 차 한 잔을 다 마실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었다. 하지만 삼황자를 꼭 닮은 얼굴 때문일까, 몹시 불편한데도 긴장감만은 들지 않았다.
“일리아스는 잘 지내고 있나?”
“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할 법한 말이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부모인 이상 아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상대는 제국의 주인. 고작 삼황자의 안부가 궁금해서 날 황성에 불러들였을 리 없다. 그의 안부를 물은 건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시작일 뿐. 곧 날 부른 용건이 나오겠지. 지안은 얼마 없는 긴장감을 끌어안으며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이어진 황제의 말은 앞선 말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그놈 성격에 공작의 저택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잘 지낸다니 신기하군.”
절대 그럴 리 없으리란 투였다. 픽 비웃은 카디스가 물었다.
“그 녀석이 해명은 하던가?”
“해명이라면…….”
해명이라니 무엇을? 뭘 말하는 거지? 지안은 슬쩍 눈을 굴렸다.
“그날 연회장에서 일리아스에게 당장 해명하라고 소리치던 걸 보았다.”
“아…….”
“약혼은 일리아스가 멋대로 밀어붙인 일이었을 테지?”
“네. 맞습니다. 당일 처음 안 사실입니다.”
“그래 보였다. 덕분에 재미있는 구경을 했지. 그런데 그토록 화냈으면서 그 녀석에게 입 맞춘 건 무슨 이유에서였지?”
질문이 거침없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인가. 지안은 민망함으로 귀가 뜨끈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분명 황제의 말대로 제가 먼저 시도한 일이긴 했다. 게다가 입맞춤 직후 삼황자 전하가 쓰러졌으니…… 충분히 물어볼 만하다. 지안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건…….”
“입을 맞추는 척 뭔가를 일리아스에게 먹인 게 아닐까. 혹은 잘 짜여진 치정극으로 일리아스의 평판을 끌어내리라는 사주를 받은 게 아닐까.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둘 중 무엇도 아니었지만. 정황이 정황인지라 이외의 생각은 하지 못했다.”
“…….”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지. 일리아스가 해명은 하던가?”
반복되는 질문에 지안은 새빨개진 얼굴로 답했다.
“제게 사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뿐입니다. 이외엔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멋대로 한 결정이었으나, 녀석은 진심이었을 거다.”
“…….”
“성격이 그 모양으로 글러 먹은 건…… 사과하지. 그놈이 그리된 데에는 내 잘못이 크니.”
“왜 그걸 폐하께서 사과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 애의 아비니까.”
탄식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엔 자책이 얼룩져 있었다.
“제도에 그대의 소문이 파다한 걸 아나? 에다의 성인이 나타나 능력자들을 구제해 주었다 들었을 때, 나는 드디어 일리아스를 살려 놓을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필 황녀마저 발현해 버린 마당이라, 능력자의 폭주를 지연시킬 방안을 백방으로 찾고 있던 와중이었지. 그 녀석들은 모르겠지만…….”
말끝을 흐리며 카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을 앞세우고 싶은 부모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