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물러섬 없는 대립에 지안은 조금 감동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신분제 사회에서 절대자인 황제의 명에 반기를 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공작과 삼황자가 해내고 있었다. 그래도 삼황자는 황제를 아버지로 두었으니 배짱을 부려 볼 만도 하지만, 공작님까지 저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 몰랐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대면을 요구하는 황제의 요청을 대체 어떡해야 하는 걸까.
저택의 응접실까지 들어온 건 자칭 특사라는 사람과 기사 서넛뿐이지만, 저택 밖엔 한 무리의 기사단이 진을 치고 있다.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말리는 시늉이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실랑이를 하든 뭘 하든, 고민할 시간을 끌기 위해서라도 이런 식의 대치는 좋지 않았다.
“두 분 다 그만두세요.”
“그럴 수 없다. 혹시라도 황성에 이동 능력자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안 그래도 그 점에 관해 언질을 받았습니다.”
뜻밖의 말에 지안은 그제야 특사로 임명된 관료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언질이라면?”
질문하기 무섭게 백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짓에 말없이 뒤편에 시립해 있던 기사 중 하나가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찰랑이는 회갈색 머리칼과 함께 햇빛에 그을린 여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실 직속 기사, 케이트 밀릿입니다. 저와 옷을 바꿔입고 입궁하시면 됩니다.”
“옷을 바꿔 입는다는 건, 제가 그 갑옷을 입어야 한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들어가고 나온 사람의 수가 같고, 투구로 얼굴이 가려지니 아무도 성녀께서 황성으로 향하신 걸 모를 겁니다.”
“기사인 척 변장해서 이동하자는 말이군요.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 전에. 누가, 무슨 언질을 준 거죠?”
질문하자 백작이 기다렸단 듯 답을 내주었다.
“방도를 알려준 건 황녀 전하십니다. 이동 능력자에게 노려지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대답에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백작이 곧바로 재촉해왔다.
“이해했다면 그만 환복하십시오.”
설명을 들었으니 그만 움직이라는 투였다. 지안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리하시면 저희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그런가. 하긴, 기사단 한 무리를 끌고 온 것부터가 영 그럴 낌새이긴 했다. 보란 듯 깃발까지 내걸었고, 태도 역시 완고했다. 끝내 고집을 부린다면 질질 끌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황제 앞에 데려다 놓을 기세였다.
“폐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고 싶어요.”
“죄송합니다만, 그에 관해선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칼같은 즉답에 지안은 한숨을 삼켰다. 그럼 이대로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야 하는 건가? 황제가 부른다는 이유로?
주저하며 망설이자 레오폴트 백작은 답답하다는 눈으로 대답을 미루는 지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말 없는 압박에도 지안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그 황성에서 빠져나왔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왜 거길 다시 간단 말인가.
조금만, 딱 일주일만 버티면 북부로 떠날 수 있다. 정말로 곧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황제가 부른다고 냉큼 따라나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물리력을 행사하겠다는 무리를 상대로 계속 대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이 무리는 황제의 특사와 직속 기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분도 있고 실력은 제국 제일일 테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저녁쯤엔 다시 이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아마도라니. 해석하기에 따라선 수틀리면 황성에 꼼짝없이 붙들릴 수도 있단 말 아닌가.
“저는 그런 모호한 대답을 바라고 여쭤본 게 아니에요.”
“모호한 대답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질문의 함의를 알아듣지 못한 백작의 반문에 지안은 좀 더 노골적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황성에 구금당하는 일 없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지를 묻는 거예요.”
기막힌 표정을 짓는 특사의 얼굴에 지안은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저는 오랫동안 납치 시도에 시달려 왔어요. 그리고 제가 경험한 황성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죠. 알현에 응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다만, 제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고 싶어요.”
지안의 말에 잠자코 대기하던 케이트가 나섰다.
“염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 동료들 모두 성녀님의 호위에 총력을 기울이리란 걸 약속드립니다.”
“…….”
영 미덥지 않은 약속이었다. 저 기사가 뭐라고 자신하든, 황제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게 끝난다. 저렇게 약속을 해오는 것도 결국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설득에 불과할 것 아닌가.
“그런 장담은 필요치 않아요. 폐하의 약속 없인 황성에 가지 않겠어요.”
물러섬 없는 말에 케이트가 당황한 것도 잠시, 이번에는 황제의 특사가 나서서 지안의 귀가를 보장해왔다.
“장담으로 부족하다면 맹세는 어떻습니까?”
“맹세라면…….”
“검과, 가문의 이름과, 작위와, 제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무엇을 걱정하든 아무 일 없을 겁니다.”
황제를 대신해 온 자의 말인 만큼, 아까보단 나았다. 진중히 내뱉는 말과 인내심 있게 설득을 이어가는 모습이 믿음직했다. 그러나 뭐라 말하기 전에 공작이 지안의 손을 잡아 왔다. 무언가 결심을 굳힌 얼굴이었다.
“방으로 돌아가 있는 게 좋겠다.”
“네? 하지만…….”
“돌아가. 여긴 내가 해결하겠다.”
그 말에 백작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인내심이 다한 목소리가 거칠었다. 이에 답하는 공작의 음성 역시 그리 좋지 않았다.
“피차 입장이 같군.”
음울한 악시온의 말에 케이트의 뒤로 시립해 있던 기사들의 손이 검 손잡이로 향했다. 긴장으로 공기가 고무처럼 팽팽히 당겨지고, 주먹 쥔 삼황자의 손가락 사이에선 선명한 주홍색 빛이 새어 나왔다. 그의 손이 펼쳐지는 순간 화염구 하나가 누구에게든 작렬할 게 분명했다.
정점으로 나아가는 갈등에 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누가 먼저 검을 빼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상황이 격해지면 누군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전날 보았던 에를랑겐 후작의 머리가 떠올랐다. 공작님이나 삼황자 전하는 능력자이니 괜찮겠지만, 황명을 받은 특사와 기사들은 다르다. 저들이 황명을 지키려고 죽음을 불사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피를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절대로, 사람이 불타거나 조각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지안은 백기를 들었다.
“그만! 갈게요! 갈 테니 다들 멈춰요!”
일리아스와 악시온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안을 돌아보았다. 제 발로 황성으로 가겠다니! 황제의 부름에 응답하겠다니!
“지안!”
“가선 안 된다!”
버럭 소리쳤지만, 지안은 두 사람의 기세에 잠시 놀랐을 뿐.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지안이 말했다.
“알아요. 저라고 그걸 왜 모르겠어요? 저도 내키지 않아요. 하지만 제 사정을 알고 계시고, 방안도 마련해 오셨잖아요. 게다가 황명이라는 명분까지 있는데……. 마냥 고집 피워 봤자 칼부림밖에 더 나나요?”
“널 혼자 보낼 순 없다.”
“대안도 없이 고집부리지 마세요. 여기서 제일 힘없고 무력한 건 저예요! 저라고 답답하지 않을 것 같으세요?”
일리아스를 향해 쏘아붙인 지안은 투구를 옆구리에 끼운 기사에게 눈짓했다.
“옷을 바꿔입어야 하니 절 따라오세요.”
“네.”
케이트와 함께 응접실을 나선 지안은 등 뒤로 들려오는 공작과 삼황자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위험해질 거다. 구금당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를 그 말을 무시하기란 무척 힘들었지만, 지안은 담담히 앞서 걸으며 응접실 근처에 있는 프라이빗 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아걸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지안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 사람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작과 삼황자는 고집스레 방 안으로 따라 들어와 설득을 마저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옷 갈아입는 걸 지켜볼 생각이냐는 지안의 엄포에 그대로 뒤돌아서야 했다. 문이 열려 있음에도 아랑곳 않고 드레스의 리본 매듭을 풀어헤치는 지안의 행동에, 공작은 당황한 얼굴로 뛰쳐나가며 문을 닫아주기까지 했다.
케이트는 이 일련의 사태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공작과 삼황자가 여자 하나에 저리 쩔쩔매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건, 실랑이가 드디어 끝났다. 프라이빗 룸의 문이 닫히자 마냥 고집스럽던 성녀의 안색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불안을 삼키는 적나라한 표정에 안쓰러움을 느낀 케이트는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히 말해주었다.
“너무 심려 마십시오, 성녀님. 별일 없을 겁니다. 폐하께선 정말 단순한 용건으로 부르신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호기심이실지도요. 싱거운 알현으로 끝날 겁니다.”
위로에 가까운 말을 건네 온 그녀는 공작과 삼황자가 왜 저렇게 유난스럽게 구는지 모르겠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 표정과 눈빛이 지안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어쩌면 정말로 별일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솔직했기 때문이다.
공작과 삼황자도 이런 그녀를 보면 기를 쓰고 반대한 걸 멋쩍어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태평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얼굴 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다들 왜 이렇게 야단인지 모르겠군.’ 하고 말이다.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어쩐지 진정이 되는 듯해, 지안은 뒤늦은 자기소개를 했다.
“전 지안이라고 해요. 성녀라 부르지 마시고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케이트는 주섬주섬 갑주를 벗으며 말했다.
“철 갑옷이라 조금 무거울 겁니다.”
임무를 우선하는 말과 함께 갑옷의 가슴받이가 내밀어졌다. 지안은 무심코 그것을 받아들었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상상 이상의 무게 탓이었다. 장인이 철을 두드려 만든 그것은 얇은 데다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했지만, 갑옷이란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듯 통째로 철이었고 무게 역시 상당했다.
잠시 비틀거린 지안은 난감한 얼굴로 케이트를 응시했다.
“제가 이걸 입고 움직이거나…… 걸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