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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99/199)

99화

하지만 이토록 모자란 사람이라도 황태자는 황태자. 그가 지니고 태어난 혈통과 지위는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했다. 황태자를 제외한 황족이라면 삼황자와 황녀 둘뿐인데, 그들은 능력자이지 않은가. 제도의 귀족들은 능력자를 배척하고 있으며, 사교계는 이미 황태자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다. 만일 현 황제가 죽는다면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건 황태자뿐이다.

주정뱅이가 된 황태자를 향해 아론이 장난스레 말했다.

“이것 참. 전하를 위해서라도 제가 황제를 죽여야겠군요.”

“뭐?”

“그래야 삼황자가 순조롭게 변방으로 내쫓길 테니 말입니다.”

그 말과 함께 아론이 손가락을 튕기자, 알레인은 그대로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으며 쓰러졌다. 남들이 보기엔 만취한 채로 허우적거리다 제풀에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아론은 태연한 얼굴로 황태자의 호위 기사를 불러 알레인을 부축하게 했다.

* * *

이멜다가 후작저로 떠난 뒤. 이비엔은 대뜸 일리아스를 지목했다.

“나랑 이야기 좀 해.”

그 요청에 일리아스는 멈칫하며 지안과 공작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남겨둔 채로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비엔의 눈초리가 점점 험악해지자 결국 두말없이 일어나야 했다.

외따로이 마련된 응접실로 제 오라비를 불러낸 이비엔은 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

“내가 저택에 방문하지 않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전부 다 말해. 빠짐없이.”

“별다른 일은 없었다.”

“지안의 표정은 그렇지 않던데? 별다른 일이 있었는데 혼자만 멍청하게 몰랐던 거 아니야?”

“없었다니까.”

머리를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답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거짓은 없었다. 일리아스는 제 동생이 왜 이렇게 과민하게 구는지 의아해하다가 황태자가 방문하기 전 자신이 지안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연이은 불청객으로 인해 상황이 어수선해져 미처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고, 상대가 하필 이비엔이라 말하기 꺼려졌지만…… 언질 정도는 해야 했다.

“지안을 따라 북부로 향할까 한다.”

“뭐?”

“안전하게 북부로 향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더군.”

“그걸 들어 줬어? 미쳤어?”

“물론 거절했었다.”

“그래! 그랬어야지!”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지안은 이미 모두의 표적이 됐다. 아무리 쫓아내도 제도의 능력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저택 앞에 진을 치고, 알레인은 지안을 이용해 능력자들을 제 휘하에 두려고 한다. 신전은 또 어떻고? 여기에 더해 폐하께서도 지안에게 관심을 비치신다면……. 그땐 정말 어찌할 방법이 없어진다. 너도 알지 않느냐.”

이런저런 변명과 사유를 주워섬겼으나 사실 진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떠나고 싶다는 지안의 의사. 그것보다 힘 있는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의견, 그녀의 생각은 언제나 절대적이었고, 모든 걸 다 제쳐 두게 만들었다. 이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거부할 수 없었다.

그토록 화내고 거부하려 애썼음에도. 끝에 가서 깨닫는 것은 그 의사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나.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든 것처럼 괴롭고 끔찍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마저도 상관없어진 지 오래였다. 후회할 것이 뻔했음에도, 지안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족감이 들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제게 해로울 일조차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지안은 제게 그런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곱씹는 일리아스의 금빛 눈동자 위로 처연한 광채가 감돌았다.

바로 그런 결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이비엔이 아니었다. 멍청한 오라비를 향해 이비엔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법이 없긴 왜 없어? 설령 폐하께서 나서신다 해도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라며! 내겐 그렇게 말했잖아! 게다가 나와 상의 하나 없이 이렇게 갑자기! 게다가 북부? 하! 북부라니! 거길 데려다준다고 지안이 오라버니를 바라봐 줄 거 같아?”

“나도 알아.”

“알긴 뭘 알아! 이 바보가! 안 봐도 뻔해! 분명 지안이 먼저 떠나고 싶다고 했겠지. 지안은 늘 그 생각뿐이니까! 내가 안 그런 척 지안을 단념시키려고 얼마나 애써 왔는데, 이런 식으로 일을 망쳐?”

“말은 바로 하지. 일을 키운 건 너다. 지안이 제도에 정을 붙이도록 만들겠다고 이곳저곳 싸돌아다니다가 결국 일을 이 지경으로 키웠잖느냐.”

“이렇게 될 줄 내가 알았어? 내가 알고 그랬냐고!”

잔뜩 흥분한 채로 비난하는 이비엔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뿌득 이를 갈았다.

“나도! 나도 몰랐다. 내 입으로 북부까지 동행하겠다고 말하게 되리라 생각지 않았어!”

비참한 목소리에 이비엔은 멈칫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가장 괴로울 사람은 다름 아닌 제 오라비란 것을. 그가 어떤 심정으로 북부행에 동의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진 일리아스의 말에 이비엔은 바로 그 납득마저 마쳐야 했다.

“내가 공작저에서 머무는 건 지안을 이동 능력자에게서 지키기 위해서지. 그랬는데……. 지안이 그러더군. 조건을 지킬 생각이 없어지거든 언제든 말하라고.”

“뭐? 그 말은…….”

“그녀는 신전에서 다양한 능력자들을 만났고. 그중엔 내가 없더라도 충분히 이동 능력자를 방어할 수 있을 만한 이능의 소유자가 있었을 거다.”

“하. 지안이 직접 움직일 수는 없으니…… 공작이겠군. 그렇지?”

일리아스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북부행을 막을 방법이 있을 거야.”

두고 볼 수 없단 듯 의지를 드러내는 이비엔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쓰게 웃었다.

자신이라고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거듭 북부로 함께 가 줄 수 없겠냐고 묻는 지안과, 평소와 같은 듯하면서도 낌새가 이상한 공작 휘하의 기사들. 버드나무처럼 부드러운 눈으로 지안을 응시하는 공작의 눈빛. 그리고 그에 응하는 지안의 눈동자.

자신은 이 모든 것에서 배제된 채였다. 비탄에 잠겨 공작을 죽일까 고민하며 밤을 새운 것도 수차례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북부행이 좌절되면…… 지안은 두 번 다시 나를 돌아보지 않겠지. 더는 그녀를 노예상에게서 구해준 황자가 아니라, 경계해야 할 위험인물로 격하되겠지. 질투에 눈먼 추악한 살인자로 인식되겠지.

그리고 그 결과로 그녀가 내보이는 한시적인 다정함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공작을 신뢰하고 있었고, 인정하기 싫지만 공작은 그녀의 버팀목이었다.

일리아스는 어리석은 집념을 드러내는 이비엔을 향해 경고했다.

“그만둬라, 이비엔.”

“그만두라니?”

“북부행이 좌절되면 지안이 어떤 눈으로 널 볼 것 같으냐.”

“나라고 그게 마음에 걸리지 않을 것 같아?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대로 두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일이잖아!”

“미움받아도 좋다면 말리진 않겠다.”

“미움 좀 받으면 어때. 지안도 이해해 줄 거야!”

“아니. 그녀는 이해해 주지 않을 거다. 왜냐면,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능력자들이 수백은 넘을 테니까.”

그 말에 이비엔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이비엔의 눈빛에 일리아스는 언젠가 이비엔이 했던 말을 되돌려 들려주었다.

“너는 지안을 두고 경계심 강하고 비밀이 많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했지. 그렇다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굴까?”

“…….”

대답 없는 이비엔을 뒤로 한 채 일리아스는 자리를 떠났다. 사실, 자신은 이비엔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그 역시 이비엔처럼 굴었던 날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아르킨이 한 말이 뇌리를 스쳤다.

‘저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빌려 가며 삶을 연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신념을 밝힌 아르킨은 자신의 명으로 인해 강제로 귀향해야 했다. 끝내 이기적이었던,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부끄러운 과오였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일리아스는 이비엔을 이해했다.

인정할 수 없지만, 어쩌면 지안에겐 자신이나 이비엔 같은 능력자가 아닌, 아르킨 다프탄데르 같은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북부행을 택한 건 그래서였다. 아르킨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헌신이나마 흉내내고 싶었으니까.

* * *

안 좋은 일은 연달아 찾아온다던가. 바로 전날 황태자와 후작 영애가 번갈아 찾아와 사람을 기함하게 만들었건만, 이번엔 무려 황제의 특사가 방문했다.

번쩍이는 갑주를 차려입은 수십의 기사들. 보란 듯 나부끼는 깃발. 그 맨 앞에 선, 권위로 가득 찬 얼굴을 한 중년의 귀족 관료가 황제의 말을 전해왔다.

“폐하께서 성녀께 독대를 청하십니다.”

“저를……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장 입궁하시라는 명입니다.”

그 말에 반박한 건 삼황자였다.

“이렇게 갑자기 말인가? 예고도 없이 입궁을 명하시다니? 응하지 않겠다. 가서 전해라. 재고를 청한다고.”

그 말에 특사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솔직히 그는 조금 기가 막혔다. 재고라니? 황명은 절대적이고, 명이 떨어진 이상 실행 이외의 대안은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삼황자였다. 비록 황태자에게 밉보인, 끈 떨어진 황자란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황족은 황족. 아무리 황명이 있다곤 하나 마음 편하게 찍어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레오폴트 백작은 하필 자신을 특사로 임명한 황제 카디스를 원망하며 일리아스를 향해 타이르듯 말했다.

“폐하의 명입니다. 불응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눈빛으로 기싸움이 이어졌다. 대립 끝에 물러선 것은 일리아스였다.

“젠장. 그럼 나도 함께 가겠다.”

“불가합니다. 잊으셨습니까? 황명이 있기 전까진 삼황자 전하께선 황성에 입궁하실 수 없습니다.”

백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단 듯 공작이 나섰다.

“내가 가겠다.”

뜻밖의 지원자에 백작은 이번에도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야 했다.

“입궁을 허락받은 건 성녀뿐이십니다. 두 분은 알현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 말에 일리아스와 악시온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그렇다면 보내지 않겠다.”

“지안을 홀로 보낼 순 없다.”

얌전히 따를 줄 알았건만, 돌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대치가 길어질 듯했다. 거듭 반발에 부딪힌 백작은 목소리를 낮추며 으름장을 놓았다.

“지금, 황명에 불복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질문이 던져지기 무섭게 두 사람의 입이 열렸다.

“그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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