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눈치 빠른 황녀답게 이비엔은 이멜다의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 말인즉. 황태자는 진심으로 지안을 황태자비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니란 거군. 안 봐도 뻔해. 알레인은 너와 관료들의 의견을 따라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살풋 웃어보이는 이멜다의 모습에 이비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하긴, 네가 그토록 쉽게 황태자비 자리를 양보할 리 없지. 그럼에도 황태자를 부추긴 건 후작을 방심시키기 위해서였나? 아니지. 고작 그런 걸 위해 이런 상황을 꾸며내는 건 너무 과하고…. 아. 내게 보여 주기 위한 거였군. 카리나인가 하는 그 치유 능력자를 살리기 위해 내가 네 편에 서도록 유도했던 거야. 그렇지?”
“영민하십니다.”
간결한 대답에 이비엔은 이를 갈았다. 어쩐지 에르데네트 쥬얼에서 나와 이곳으로 곧장 향하던 황태자의 모습을 죄다 뒤쫓아 보여준다 했다.
적잖이 화가 났지만, 이비엔은 그 이상으로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이멜다의 계책에 말려들었단 사실엔 변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 황태자가 생각이 짧은 편이란 걸 부정할 수 없기도 하고.
그리고 어찌 보면 알레인의 옆에 이멜다가 붙어 있는 건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 멍청한 머리를 이멜다가 훌륭하게 보완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있어서 황태자 노릇도 그만큼이나마 해 내는 것일 터다. 이비엔이 탐탁지 않은 눈으로 이멜다를 노려보면서도 버럭 화낼 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분노한 황녀의 시선을 피해 지안에게 돌아선 이멜다가 말했다.
“황태자 전하는 제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후작을 살해하셨죠. 이 사실이 알려지는 건 치명적인 일이고, 만일 공론화된다면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 일황자로 격하되실 수도 있어요. 저 역시 후작위를 물려받기는커녕 다시는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될 테지요.”
“…….”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이만한 약점을 드러내 보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믿어도 좋아요. 당신을 황태자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입을, 제가 모조리 다물게 할 거라는 걸.”
굉장히 자신만만한 말이었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말이 이토록 시혜적일 수도 있다니. 지안은 기막혀하며 말했다.
“누구의 입을 막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나를 위해서라기보단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일일 테니까. 다시는 당신이 한 일에 내 핑계를 끌어다 쓰지 말아요. 이딴 식으로 날 협박하려 들지도 말고.”
“공작과 삼황자 전하의 비호를 받는 당신을 누가 감히 협박하겠나요? 오늘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 약속하죠. 다만, 카리나를 위해 종종 찾아와도 될까요? 대가는 치르겠어요.”
“정 원한다면 그 여자만 보내요. 당신은 출입 금지야.”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바짝 날을 세우는 지안의 모습에 이멜다는 웃으며 수긍했다.
“주신 에다께서 선택한 성인이 이토록 겁 많은 아가씨일 줄은 몰랐군요.”
“네. 맞아요. 나는 겁도 많고 무서운 것도 많아요.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꺼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해했다면 나가 줘요. 당장.”
출입구를 가리켜 손가락질하는 지안의 모습에 발끈한 건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아, 아가씨를 매도하지 말아요. 절 위해 그러신 거예요! 비난받아야 하는 건 이멜다 아가씨가 아니라고요!”
“그래서요? 사연이 있는 건 알겠는데 그것까진 제 알 바 아니에요. 부탁이니 떠나 줘요.”
이마를 짚으며 외면하는 지안의 모습에 카리나는 항변을 그만뒀다. 없는 용기를 끌어내 반박한 것이었지만, 핏기없이 파리한 지안의 얼굴 또한 누적된 스트레스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 차례 실신했다 깨어난 마당이니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항변을 하자마자 사방에서 날 선 눈초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강력한 능력자들이 내보이는 적개심에 카리나는 꼬리 만 개처럼 이멜다의 뒤로 숨어들었다.
“타, 탓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저는 그냥, 억울해서…….”
“그만. 더는 듣지 않겠다. 떠나라.”
공작의 엄포에 카리나는 재깍 입을 다물었다. 굳어버린 카리나를 대신해 나선 건 이멜다였다.
“용서하시길. 카리나는 저를 위해 나선 것뿐이랍니다. 아직 전달 드려야 할 정보가 남아 있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추후 시간을 내어 황녀 전하와 따로 독대하는 게 낫겠군요.”
“그래 보이는군.”
이비엔이 동의하자 이멜다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카리나의 손을 단단히 잡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지안을 향해 일별했다.
“바라던 대로 그만 가 보겠어요. 다만 기억해요.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 말에 지안은 고개를 들어 이멜다를 똑바로 응시했다. 덕분에 이멜다는 지안의 표정과 눈빛을 조금 더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또렷한 흑안, 단단히 굳은 입매. 그리고……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얼굴.
바로 그 확신이 기묘했다. 그러나 이미 작별 인사까지 마친 마당이었으므로 더는 의혹을 해소시킬 방법이 없었다.
공작저를 빠져나와 마차에 탑승한 이멜다는 재차 지안의 눈빛에 떠오른 확신을 곱씹어 보았으나 이내 잊고 말았다. 그보다는 카리나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더욱 급했기 때문이었다. 후작의 장례식과 그의 사후처리 역시 계획대로 진행시켜야 했다. 때문에 지안의 얼굴이 암시한 무언가는 금새 그녀의 뇌리에서 잊히고 말았다.
문제는 확신에 찬 지안의 얼굴을 이비엔 역시 목격해버린 점에 있었다. 이멜다가 품은 의혹을 이비엔이 품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영민한 황녀는, 이내 그 확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 * *
지하 무투회 도박장으로 황태자를 이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투회장은 제도의 번듯한 고급 여관 지하에 존재했고, 심지어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아론이기 때문이었다.
무투회 운영 방식은 단순했다. 하급 능력자들을 데려와 무대에 올리고 도박판을 연다. 여관에 투숙하는 손님들은 승자와 패자에게 각자 배팅한다.
달리 규칙이랄 것도 없이 퍽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도박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능력자를 상대로 우월감을 드러내기에도 좋았고, 땀과 피가 뒤섞인 무투회의 열기가 본능을 절묘하게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공작저에서 좋은 꼴을 보지 못한 것 같은 황태자에게 이곳 지하 무투회만큼 근심을 날려버리기 좋은 장소는 없을 터였다.
예상대로 별달리 부추기지 않았음에도 황태자는 알아서 돈을 걸고 잃기를 반복했다. 부추기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알아서 도박판의 열기에 휩쓸려 흥분해 주다니, 정말이지 너무 손쉬워서 먹잇감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이 너무 모자라면 도리어 주변의 챙김을 받게 된다던가. 황태자가 하도 잃기만 하다 보니, 보다 못한 아론이 승리가 예상되는 능력자를 넌지시 짚어주어야 했을 정도였다.
“이겨라! 승리를 명한다! 클로토프 너에게 걸었다!”
경기장에 오른 능력자를 향해 승리를 명하는 황태자의 모습은 얼간이 같았고, 심지어 꼴사납기까지 했다. 보다 못한 황태자의 호위 기사들이 얼굴을 구길 정도였다.
바로 이쯤 되었을 때, 아론은 호위 기사들이 나서서 황태자를 만류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기사들은 황태자를 제지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덕분에 아론은 황태자가 기사들의 충성을 받지 못하는 처지라는 걸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직언을 해 올 수하조차 변변찮은 황태자라니. 이런 게 정말 제국의 다음 주인이란 말인가? 게다가 황태자의 기사들도 호위에 매진하는 기사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눈이거나 손발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모양 그 꼴인 덕분에 그다음은 정말 쉬웠다. 무투회를 적당히 즐긴 뒤 계단을 올라가기만 하면 바로 여관 1층의 주점이 나왔으니 말이다. 식전주라는 핑계로 주문한 술은 어느덧 한 병 두 병 늘어났고, 급기야는 기사들을 멀찍이 물린 채로 술판이 벌어졌다.
여기에 더해 술을 와인에서 위스키로 슬쩍 바꾸자, 일부러 정보를 끌어내려 고심할 필요도 없이 알레인의 입이 술술 열렸다.
본디 아론은 천천히 삼황자와 황태자의 사이를 이간질할 계획이었으나, 조금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10분도 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불콰하게 만취한 황태자가 아론을 향해 온갖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으므로.
그리고 그의 불만은 일전에 그가 이멜다에게 토로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부황께선 무슨 생각으로 일리아스를 처벌하지 않으시는 건지!”
황태자궁이 불탔는데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처벌할 수 있냐는 말을 과장 조금 보태 서른 번쯤은 들은 것 같았다.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 귀족들에 대한 불평은 덤이었다. 맞장구쳐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대단한 입심이었다.
‘어떻게 이런 놈이 황태자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아론은 황실의 계보를 떠올려 보았다. 오래전 이황자가 병사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놈이 황태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퍽 애석한 일이었다.
“황태자궁에 불이 난 것은 저도 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느 놈의 소행인가 했는데, 방화범이 삼황자 전하라는 걸 알았을 땐 기가 막히더군요. 여기에 더해 창피도 모르고 공작저에 머무르시니……. 제가 폐하였다면 제도 밖 어디로든 내쫓아 버렸을 겁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즉위만 하면 당장 변방으로 쫓아 버릴 것이다! 국경도 튼튼히 하고 일리아스도 눈 밖으로 치워버릴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냐.”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때도 폐하께서 반대하신다면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아론의 질문에 알레인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의 한숨에서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그게…….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아 잘 모르겠군.”
대답을 미적대는 황태자의 눈빛엔 두려움과 거리낌, 그리고 선명한 회피가 드러나 있었다. 나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만취한 채로는 속내를 감추기 어려운 법이다. 황제의 의사를 정면으로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모습이 아론에겐 똑똑히 보였다.
그러면서 하는 게 고작, 즉위만 하면 삼황자를 내쫓을 거라 투덜거리는 거라니. 눈앞의 황태자보단 시골의 촌부가 더 번듯한 됨됨이를 갖추고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