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귀족 행세를 하고 다니면서도 아론은 제도 외곽의 공작저를 감시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작저의 감시야말로 황태자의 동태나 그 주변 인물을 파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백만 골드짜리 아가씨는 겁먹은 두더지처럼 공작의 저택에 처박혀 머리카락 하나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쩌다 외출하더라도 반드시 삼황자를 대동했고, 그마저 한두 번에 그치는 걸 보면 잔뜩 경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반면, 최근 주시하기 시작한 황태자의 행보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황태자가 자신을 지지해주는 세력의 수장, 에를랑겐 후작을 죽인 탓이었다.
후작의 죽음을 마차 사고로 위장하고 그 목을 챙긴 황태자는, 그것을 남몰래 후작 영애에게 배달했다.
거기까지 목격했을 때, 아론은 황태자가 에를랑겐 후작가에 상당한 원한을 품은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성실히 지지해 온 후작을 살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피 묻은 후작의 머리를 기쁜 얼굴로 받아 안는 후작 영애와 그녀를 다정히 끌어안는 황태자의 모습으로 인해 아론의 유추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후작의 머리를 가운데 두고 사랑과 신뢰를 속삭이는 남녀의 모습이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를 부조화가 있다면 바로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아론은, 자신도 만만치 않게 비틀린 인간이지만 세상엔 그런 자신보다 더 괴상한 사람이 많다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덕분에, 그간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물밑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이다.
‘설마하니 그날 소회의장의 벽 너머에 숨어서 회의를 엿듣던 게 후작 영애였을 줄이야.’
무구하고 어여쁜 얼굴을 한 채로 내내 후작을 대신해 황태자의 머리 노릇을 해 왔다니. 그야말로 깜찍하고 대범하지 않은가! 아론은 흥미진진함을 숨기지 못하며 다음 날 황태자가 에르데네트 쥬얼에서 보석을 찾은 즉시 공작저로 향하는 걸 확인했다.
동시에 황녀와 후작 영애의 만남을 염탐하는 것은 물론, 이멜다가 자리를 비운 사이 후작저에 끄나풀을 하나 심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공작저에는 날짐승을 막는 그물이 쳐져 있는 탓에 지안이 황태자의 제안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론은 지안이 내릴 선택을 걱정하지 않았다. 황태자비 자리를 받아들이건 거절하건, 끝에 가선 지안이 자신의 수중에 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이로써 자신이 알아야 하는 사안은 거의 다 꿰고 있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서 뭔가 더 숨겨진 정보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렇게 보니 정말 놀라울 정도군.”
다들 성마르게 드러내지만 않을 뿐, 지안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은 이미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신전의 동태, 능력자들의 결집, 거기에 귀족들과 황태자까지 가세한 움직임은 마치 솥 안에서 끓어오르는 회오리와 같았다. 바로 그 회오리에 발을 담글 생각을 하니 짜릿한 기대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론이 생각하는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었고, 이 생각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넣게 되기만 한다면, 지안은 아론이 여태 가졌던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전리품이 될 것이었다.
달콤한 입술을 떠올리며 아론은 입맛을 다셨다.
“그야말로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여자군.”
더 이상 관망만 하고 있을 순 없었으므로 그 또한 슬슬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어딘가 불쾌한 얼굴로 공작저에서 부리나케 빠져나오는 황태자에게 접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전하.”
“당신은?”
“펠릭스 그라이츠입니다. 일전에 황성의 소회의실에서 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아아.”
황태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인장이 사라져 곤란해하던 차에 그것을 되찾아준 자작. 선의 어린 얼굴로 전하께서 인장을 떨어뜨리는 걸 보았다고 고해 왔었던.
“기억한다. 그땐 고마웠다.”
“별말씀을. 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위험스런 인상을 지워낸 아론의 얼굴은 선량함의 표본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이의 무해한 미소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통하는 것이었고, 이는 황태자에게도 유효했다. 아론은 객관적으로 잘생긴 사내였고,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재력도 있었다. 바로 그런 남자가 드러내 보이는 선망 어린 눈빛은 몹시 위력적이었다.
황태자로 살며 제게 호감을 내비치는 사람을 무수히 만나 보았지만, 알레인은 그것이 온전히 그 자신에게 바쳐지는 호감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황족이란 혈통과 위치, 뒷받침하는 세력이 없다면 언제든 없어질 얄팍한 호의만큼 질리는 건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호감이 있는 법이다.
알레인은 단 한 번도 아론처럼 잘난 사내에게서 선망과 존경 어린 눈빛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론의 태도는 고위 귀족 영식들이 젠체하며 차리는 허례허식과 사뭇 달랐고, 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짜릿한 고양감이 구겨진 알레인의 자존심을 단번에 되살려 놓았다. 바로 직전, 분노한 일리아스에게 겁먹고 말았단 사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춘 뒤였다.
“공작저에서 나오시는 걸 보았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시던데……. 공작이 제도에서 폭주할까 염려되어 제도 외곽까지 방문하신 겁니까? 아니면, 회의에서 거론되었던 차기 황태자비 전하를 뵙고 나오는 길이십니까?”
은밀히 던져진 질문에 알레인은 놀란 얼굴로 긍정했다.
“그대도 회의에 참석했었던 모양이군.”
“맞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신 모양인데…… 바쁘지 않으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어딜 말인가?”
“그야 당연히 즐길거리가 있는 곳이지요.”
뻔한데도 어쩐지 솔깃해지는 말에 알레인의 두 눈이 깜빡였다. 그간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온 귀족들이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그의 제안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어느 날 제도에 혜성같이 나타난 펠릭스 그라이츠 자작. 그가 돈을 아끼지 않고 화려한 파티를 연다는 사실은 알레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떠벌리는 걸 들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란 지위 탓에 가 볼 엄두가 나진 않았지만, 호기심이 생긴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가 셀스하임 백작과 친분이 돈독하다는 사실 또한 이미 보고받은 바 있었다. 셀스하임 백작이 신용하는 자라면 뒤탈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고민하는 알레인의 모습에 아론이 말했다.
“아. 이미 일정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지요.”
선선히 물러나는 그 말에 막 생겨나려던 의구심이 가라앉았다. 좀 더 끈질기게 굴 줄 알았는데, 뭔가 바라고 접근했다기엔 태도 변화가 빨랐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게다가 미련 없이 돌아서기까지. 알레인은 의심을 접고 덜컥 아론을 붙잡아 세웠다.
“아니. 가겠다.”
그 말에 아론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황태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일정이 있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잠깐 정도는 괜찮다.”
“잠깐이라……. 짧은 시간에 확실하게 피로를 잊을 수 있을 만한 유흥이라면, 역시 지하 무투회뿐이지요.”
기껏해야 술과 여자가 함께하는 자리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알레인은 뜻밖의 말에 편치 않은 얼굴로 반문해야 했다.
“지하 무투회라니?”
“반응을 보니 한 번도 가 보신 적 없는 모양입니다. 최근 영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오락거리인데. 들어 보지 못하셨습니까?”
황태자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어깨를 으쓱여 보인 아론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알레인은 반쯤 속는 기분으로 아론의 장담을 들었다. 대체로 실망하지 않을 거란 말을 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를 실망시켰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저 말을 들은 순간 그대로 마음을 바꾸어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펠릭스 자작의 제안은 무척 솔깃했고, 영식들이 즐기는 오락을 여태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 한 번쯤 어울려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속셈이 있어 접근한 거라면 그때 끊어내도 될 일 아닌가. 알레인은 가볍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게.”
제 발로 뱀의 둥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 알레인은 그렇게 답했다. 물렁하고 조심성 없는 황태자의 대답에 아론은 볼이 패일 정도로 짙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한 번에 성공하리라 여기지 않았는데……. 이렇게 단박에 수락하다니. 이따위 뻔한 접근에는 일곱 살 아이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머리는 장식으로 있는 건가?
제게 예지 능력 따윈 없는데도 아론은 미래를 엿보고 온 듯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정말 미래의 황제가 된다면 제국은 꼼짝없이 가시밭길을 앞두게 되리라.
* * *
지안은 얕은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걱정 어린 표정을 한 공작과 삼황자였다. 멍한 얼굴로 비틀비틀 일어나 앉은 지안은 후작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물었다.
“머리는…….”
“치웠다.”
“제가 얼마나…….”
“오 분 정도.”
즉각적인 대답과 함께 입술에 물잔이 닿아 왔다. 찬물을 벌컥이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너무 놀라면 화도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안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다들 자신만큼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어요.”
난처하게 사과를 건네며 이멜다는 지안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연회장에서 내보인 거침없는 행보에 더해 황녀 전하께도 몹시 스스럼없이 굴기에, 겉보기완 달리 겁 없고 강단 있는 성격인 줄 알았다. 그랬는데 후작의 머리를 보고 그대로 실신할 줄이야.
지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멜다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걸……. 대체, 내게 뭘 보여준 거죠?”
“제 아버지, 에를랑겐 후작의 머리랍니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패륜을 고백하는 이멜다의 얼굴은 몹시 후련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