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어쩌죠? 제가 그 일을 무척 후회하고 있는 처지라, 두 번 다신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참인데.”
“맨입으로 도움받을 생각은 아니랍니다. 뜻밖에 황태자비 자리를 걷어차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 카리나를 도와주면, 저도 당신을 돕겠어요.”
날 돕겠다고? 하! 곧 북부로 도망칠 건데, 돕긴 뭘 돕는단 말인가. 지안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
“그 도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필요할 거예요.”
“필요 없어요.”
“……나를 적대하는군요. 왜죠? 난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적이 없는데.”
“그런가요? 왜인지는 몰라도 저는 기분을 잡쳤던 적이 꽤 있는 것 같은데. 서로 기억하고 있는 게 퍽 다르네요. 그러니 다시 잘 생각해 보세요, 영애.”
뜻밖의 반발이 몹시 신랄했고 신선했다. 이멜다는 잠시 기억을 반추해보았다. 알레인이 황태자로 책봉된 이후 자신에게 이처럼 선명한 적의를 드러낸 사람은 지안이 처음이었던 탓이다.
“우리가 나눈 대화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죠.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사실에 기반한 말 몇 마디 한 걸 가지고 이리 속 좁게 굴다니? 성력 없는 성녀란 명성에 어울리는 태도는 아니군요.”
“태도? 나는 성녀로 불려지길 바란 적 없어요. 보시다시피 비겁하고 속 좁은 사람이라서. 그 명성에 부합하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걸요.”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데도 가만히 있을 거라 이 말인가요?”
“저 여자를 말하는 거라면, 글쎄요. 내 탓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죽을 거예요. 내가 도와봤자 소용없다고요. 알아들었다면 돌아가요. 도움이건 뭐건 난 필요 없으니.”
그 말에 이비엔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지안. 기다려. 에를랑겐 후작 영애는 일개 영애가 아니야. 그녀는 황태자의 참모니 빚을 지워두면 분명 되갚을 거야. 말을 좀 직설적으로 하긴 해도 계산은 명확한 사람이고……. 그녀와 거래하는 건 네게도 나쁘지 않아.”
“그걸 왜 전하가 판단하시나요?”
“왜냐니?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 걱정, 더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뭐?”
“전하 덕분에 제 한계를 깨달았거든요. 제가 가진 건 알량한 동정심뿐이었고, 그 동정심에 책임감 같은 전 조금도 없었죠. 저 여자의 폭주를 멈추어 놓고, 그 다음엔요? 정기적인 가이딩이 없다면 어차피 얼마 못 살 텐데. 그것도 제 탓인가요?”
“…….”
“전 여기서 그만 하려고요. 그러니 제게 강요하지 마세요. 저 여자가 원해서 능력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듯, 저 역시 가이드로 태어나길 바란 적 없어요. 모두의 가이드로 살 마음은 더더욱 없고!”
강하게 쏘아붙인 지안은, 다음 순간 굳어버린 이비엔의 모습을 보고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욱하는 마음에 멋대로 지껄여놓고 나니 뒤늦게 양심이 따끔거렸다.
운 좋게 가이드로 발현해 협회의 돈으로 놀고먹어 왔으면서 이제 와 가이드로 태어나길 바란 적 없다니. 가이드가 된 후로 남들 다 하는 고생도, 출근도 뭐 하나 한 것 없이 빈둥거렸으면서 이제 와 이런 식으로 변명하다니! 이딴,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다니!
당혹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속엣말을 뱉어버린 뒤였다. 소리 내 말한 이상 주워 담을 방법은 없다.
‘사과해야 할까?’
그나마 수습이라도 하는 것과 모른 척 외면하는 것 사이에 선 채로 지안은 번뇌했다.
곧 사라질 마당에 실언이었다고 사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지만 그런 사과나마 남겨야 하는 것이 그간 알아 왔던 사람에 대한 도리 아닐까.
사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충격받은 황녀 전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후회가 연기처럼 일었다. 실수했다는 생각 외엔 무엇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괴감에 빠질 새도 없이 잔뜩 가라앉은 이멜다의 목소리가 정적을 갈라왔다.
“좋아요.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아무래도 내가 불가능한 일을 요청한 모양이군요. 조건을 조금 바꾸죠. 살리지 못해도 좋고, 얼마 살지 못하더라도 좋아요. 카리나가 눈 뜰 수 있기만 하면 난 그걸로 족해요. 마지막 인사라도…… 하게 해 줘요.”
체념 어린 목소리에 양심이 비명을 질렀다. 마음속에서 팽팽히 힘겨루기를 하던 저울의 추가 급격히 기울었다.
마지막 인사.
그래. 어떤 인사는 너무 중요해서, 두고두고 사람을 후회하게 만들지.
“그 정도는, 들어 줄 수 있겠지요? 이것마저 안 된다고 하진 말아요.”
절망 어린 그 목소리가 예전의 자신을 닮은 듯해 지안은 순식간에 과거의 한가운데로 내팽개쳐졌다.
서울에 게이트가 터지기 전날, 나는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더라.
끝끝내 가이딩을 거절당한 라영 언니에게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더라.
‘엄마! 나 저녁에는 갈비찜!’
‘걱정 마요, 언니. 다음 가이드는 분명 가이딩해 줄 거예요.’
후회스런 기억으로 남은 마지막 말이, 안일하기 짝이 없던 부실한 위로가 유리처럼 심장에 박혀 차갑게 빛났다. 심지어 엄마는 그날이 생일이었는데…….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낳아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돌아간 라영 언니는 그날을 마지막으로 죽었다. 평소처럼 협회 앞에서 웃으며 헤어지던 날이 마지막이 될 거라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뒤로는, 후회로 점철된 하루하루였다. 후회는 빠른 속도로 우울이 되었고, 망상을 낳았다. 생각을 멈추고 싶어 하루에 열일곱 시간을 내리 잔 적도 있었다. 꿈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다시 현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즈음, 이런 환상을 품었다. 언젠가 내게 매칭이 되는 에스퍼가 나타난다면 시간을 되돌리는 이능을 지닌 사람이기를.
허황된 기대란 걸 알지만, 기상천외한 능력을 지닌 에스퍼들이 이토록 많으니 그런 에스퍼 한 사람쯤은 있지 않을까.
그렇게 바보 같은 기대를 하며 매칭률이 0%가 아닌 에스퍼가 나타나길 고대했다. 만약이란 이름으로, 있지도 않은 상상 속의 에스퍼를 만들어내 그 에스퍼의 능력에 희망을 걸었다.
어리석었지만 그런 희망이라도 필요했다.
처음에는 엄마 아빠를, 라영 언니를 되살려낼 수 있기를 바랐다가, 그다음에는 마지막 말이라도 남길 수 있기를 바랐다가, 끝내는 희망을 거뒀다.
축적된 시간이 건네는 진실은 회피나 도주를 용납하지 않았다.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것 외엔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시간이었다. 같잖은 망상은 차가운 현실에 점차 바스러져 갔고, 정신을 차리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안 것이 있다면,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부탁이에요.”
간절한 요청에 천천히 손끝이 떨렸다. 그 부탁을 들으니 잊고 살았던 명제가 단번에 되살아났다.
아무리 대단한 에스퍼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에스퍼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신일 뿐이다.
“……좋아요. 도와주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안은 이비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결심은 이미 섰고, 우선해야 할 것도 명확했다. 먼저 황녀 전하에게 사과하고, 그 후에 저 여자를 가이딩해 주는 거다.
하지만 쉽사리 사과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뭇대는 와중에도 기사의 품에 안긴 여자의 파장은 시시각각 심각함의 단계를 갱신하는 중이었다. 이러다간 계속 지체만 될 것 같아 지안은 짧은 망설임 끝에 순서를 바꿨다.
여자를 소파 위에 눕히도록 한 지안은 자연스레 흘러내린 후드로 인해 그 안에 감춰졌던 얼굴을 보고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멍으로 얼룩덜룩한 얼굴과 부은 눈두덩이. 터져버린 입술은 명백한 폭력의 흔적이었다.
“능력자라면 누구나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만큼의 무력을 지니는데 이건 대체…….”
“카리나는 치유 능력자예요.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이런 상태가 되죠.”
이멜다의 설명에 지안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몰라도 이 에스퍼가 단물 쪽쪽 빨리듯 이용당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왜 이런 꼴인지 알 만하네요. 치유하는 대상의 부상과 질병을 빨아들여 본인에게 옮기는 게 이 사람의 이능인가요?”
“맞아요.”
“미쳤군. 지금 내가 도와봤자 결국 같은 꼴이 될 게 뻔할 텐데, 내 도움이 다 무슨 소용이죠? 정말 살리고자 하는 게 이 사람이 맞긴 한가요? 만일 엄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된다면…….”
“그런 일은 없어요. 장담하죠.”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카리나는 나를 치료하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모두 내 탓이죠.”
치부라 할 만한 일을 밝혔음에도 지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멜다의 말은 지안에게 있어 치유 능력자를 이용할 대로 이용하다가 이렇게 되었단 실토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동석한 다른 이들은 이멜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제 와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으므로, 이멜다는 작은 입술을 열어 조곤조곤 후작가의 실태를 읊었다.
“나는 사교계의 꽃으로 알려져 있고,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에를랑겐 후작가의 적녀죠.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내가 후작 각하의 손에 붙들려 죽도록 얻어맞는단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그렇게나 얻어맞고도 늘 말끔한 모습으로 온갖 사교계 모임에 얼굴을 비췄으니까요. 그자는 나를 흠씬 때리고 난 다음, 카리나를 시켜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말끔히 되돌려 놓도록 지시했어요.”
“…그래서요? 내가 보기엔, 결국 당신도 치유 능력자를 이용한 것에 불과한 것 같은데요.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되리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불신하는 지안의 모습에 이멜다는 빙긋 웃으며 말없이 대기하고 있던 기사를 향해 눈짓해 보였다. 그러자, 기사가 등 뒤에 매고 있던 상자를 꺼내놓았다.
“의심이 많군요. 나쁘지 않은 태도예요. 나라도 같은 의심을 할 테니까.”
“…….”
“혹시나 설득에 필요할 것 같아 증거품으로 준비한 것인데…… 함께 챙겨오길 잘했군요.”
그 말과 함께 커다란 선물 상자와 비슷한 크기인 나무함이 개봉됐다. 뒤늦게 희미한 피 냄새를 맡은 악시온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상자가 열리는 게 먼저였다.
“다신 그런 일 없게 할 거예요.”
개봉된 상자 안에는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이만하면 내 말을 믿겠지요.”
그 물음은 조금도 지안의 귀에 들어오지 못했다. 부릅뜬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에를랑겐 후작의 머리는, 영화 속 소품이 아닌 진짜 사람의 머리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지안은 그대로 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