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입이 험해지기 마련이지. 헤아려 들으마.”
“기왕 그래 주는 김에 그것만 마시고 꺼져 주면 더 바랄 게 없겠군.”
폭언에 가까운 말에 점점 더 자리가 불편해졌다. 둘 다 나가서 싸우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지안은 형제간의 눈싸움이 무섭게 오가는 한가운데로 질문을 던졌다.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왜 저를 찾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아. 우선 이것부터 받지.”
보석함이 다시금 내밀어지자. 지안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받지 않겠습니다.”
“왜지? 마음에 들지 않는가? ”
“그런 것을 떠나서, 전하께 이런 선물을 받을 만한 이유가 제겐 없습니다.”
“내가 그대를 황태자비로 만들어 주겠다면?”
“네?”
“어떤가? 이만하면 이유로 충분하지 않나?”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지안은 말문을 잃었다. 오늘 처음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 이런 청혼을 해오다니. 기막힘은 둘째치고 황태자의 정신 상태가 몹시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의구심을 드러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일리아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꺼져.”
격분한 삼황자를 황태자는 보이지도 않는단 듯 무시했다.
“대답을 강요하진 않을 테니 잘 생각해 보라. 공작의 저택에 구금되어 있는 것보단 황성이 더 안락하지 않겠는가?”
뭘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지안은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을, 알레인은 과분한 영예로움에 감동한 것이라 오인했다. 그는 그만한 위치에 있는 남자였고, 그간 황태자인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지 않는 여자란 단 하나도 없었으니 그러한 오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될 수 있는 기회다. 그 어떤 영애도 거부하지 않을 자리지. 내 손을 잡으면 에르데네트 쥬얼의 보석을 매해 구입해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거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보석함의 뚜껑을 열어 보이는 황태자의 모습에 지안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심장 어딘가의 영혼이 지금 이 순간 입 밖으로 가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찰나, 지안은 테이블 아래 놓인 제 손에 닿은 온기를 느꼈다. 옆에 앉은 공작이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엉망으로 흔들리는 그의 파장에 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나니 불안해하고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괜찮아요.’
손을 꾹 쥐어 주자 감정이 전해졌는지 공작은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차분해지는 그의 파장을 느끼며 지안은 황태자와 눈을 맞췄다.
“어째서…… 제게 이런 제안을?”
“그대를 신전과 나누어 가지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서 신전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의문도 잠시, 테이블 위 보석함이 맹렬한 기세로 불타올랐다. 나무를 장식한 금붙이가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보석함 안의 부드러운 벨벳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찬란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목걸이 역시 예외 없이 볼품없는 금붙이로 녹아 붙었다. 지글거리며 녹아내린 금속의 냄새에 황태자는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지안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쓸 생각이군. 황태자가 되었는데도 아직 욕심낼 게 남았나?”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도리어 차분해진다고 했던가. 성질대로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내던 삼황자는 더 이상 없었다. 심상찮을 정도로 낮아진 목소리에 지안과 황태자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경고음 같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알레인이었다. 황태자는 기가 질린 얼굴을 해 보이면서도 일리아스를 향해 빈정거렸다.
“선택은 그녀가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거라, 일리아스. 황가에서 곧 축출당할 너와 이후 황제가 될 내가 비교 대상이나 되긴 하겠느냐? 게다가 너처럼 성질머리가 불같은 녀석보단 좀 더 이성적이고 단정한 사람을 그녀도 더 반기겠지.”
그 말에 일리아스가 뿌득 이를 갈았다. 비산하는 불티처럼 살벌한 광채가 서린 그의 눈빛에 황태자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내가 불청객인 건 사실인 듯하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마.”
말만은 매끄러웠으나 어딘가 겁에 질린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어째 긴장이 풀려 지안은 단단히 굳어 있던 손가락을 조금씩 꼼지락거릴 수 있었다.
마치 폭풍이 왔다 간 것 같았다. 황태자가 사라진 응접실 내부에 남은 건 침묵과 연기, 탄내와 녹아내린 금붙이뿐이었다. 게다가 그가 가져온 폭탄 같은 소식은 또 어떤가.
지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제국의 황태자는 도망치는 모습도 참 멋있네요. 무척 그럴싸해요.”
농담이었지만 일리아스와 악시온은 그 말을 차마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멋있었나?”
“멋있다니! 너는 눈이 삐었느냐!”
심각한 반응에 지안은 냉큼 입을 다물었다. 빈정거린다고 한 말이었는데 오해만 사고 말았다. 반박하려던 찰나, 일리아스가 어깨를 붙잡아왔다.
“말해. 황태자비가 되고 싶나?”
지안이 그렇다고 말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황태자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을 참이었다. 황제의 지위가 탐이 나서가 아니라, 제국을 거머쥐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한 여자가 탐나서.
그러나 돌아온 지안의 대답은 허무하리만큼 가벼웠다.
“농담이었으니 진정하세요. 반어법 모르세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빈정거린 것뿐이라고요. 제가 왜 황태자비가 되고 싶겠어요? 저는 황태자 전하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요. 그리고 딱 봐도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찾아온 게 뻔히 보이는데. 미쳤다고 그 제안을 넙죽 받아들이겠어요?”
“…….”
“그리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황궁에 갇혀 살기 싫다고. 멋대로 오해하지 마세요. 알았으면 신전 어쩌고 하던 것부터 좀 설명해 주세요. 저를 신전과 나누어 가진다니. 대체 무슨 말이죠? 전 처음 듣는데요.”
의문에 답해온 건 공작이었다.
“성축일 당일 능력자들을 도왔지 않나. 신전에서 그대의 공로를 주신 에다의 것으로 포장하고 있다. 에다가 보낸 성인이 등장해 비탄에 빠진 능력자들을 구했다고.”
“그리고요?”
“황태자 전하가 저리 나오시는 걸 보면…… 알아차린 거겠지. 그대가 우리 같은 능력자들의 가장 큰 약점이란 걸.”
“결국 제가 사고를 친 탓이네요. 공작님 말이 맞았어요. 어떤 식으로든 붙잡힐 거라더니……. 이젠 능력자가 아닌 일반인도 저를 탐내는군요. 뭐, 이외에 달리 제게 손을 내밀 이유는 없겠죠. 그래도 그렇지. 황태자 전하는 대체 무슨 속셈으로 제게 청혼하시는 거죠?”
“그대를 미끼로 내걸어 능력자들을 통치하겠다는 거겠지.”
“통치? 하! 통치가 아니라 착취겠지요.”
지적하자 삼황자가 냉큼 동의해 왔다.
“바로 보았다. 폭주 위험이 적은 능력자는 권력자에게 특히 매력적인 대상이다. 일반 기사들의 열 혹은 백에 달하는 일을 홀로 할 수 있으니까. 황태자는 능력자가 지닌 무력을 원하는 거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력의 통제권을 그대를 통해서 얻으려 하겠지. 황태자비가 되면 가이딩 강요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다. 봐서 알겠지만 그는 일반인이야. 그대가 어떤 존재인지 조금도 모른다. 지안. 황태자비가 되어선 안 된다. 분명히 불행해질 거다.”
공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삼황자가 설명을 보충했다.
“하나 더. 황태자에겐 이미 황태자비로 내정한 여자가 있다. 알겠나? 시일이 지나면 분명 후궁을 들이니 마니 그딴 소리를 해댈 거다. 지금의 제안은 제 욕심을 채우려 듣기 좋은 말로 그대를 꼬드겨내는 것에 불과해.”
일리아스의 말에 누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초를 쳤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녀를 황태자비로 만들려 하는 게 황태자뿐 아니라 그 휘하 귀족들 모두의 뜻이라면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모두가 발언자를 돌아보았다. 언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건지, 호리호리하고 우아한 차림의 귀족 영애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바로 옆에 황녀 전하를 대동한 채였다.
“이멜다 에를랑겐…!”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는 건가?”
공작과 삼황자가 지안의 시야를 가리고 섰다. 특히 삼황자의 반발이 격렬했다.
지안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황녀 전하의 티파티에서 보았던 영애다. 어렴풋하긴 하나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한때 공작의 약혼녀였다던…….
“그녀에 대해선 내가 책임질 테니 잠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군.”
“…이비엔,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다.”
잠깐의 신경전 끝에 눈앞이 트였다.
지안은 황녀의 옆에 선 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잘못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얼굴. 우아한 이목구비와 불타는 것 같은 적발. 기억을 더듬는 사이 그녀의 복숭앗빛 입술이 유려히 열렸다.
“폐하께선 호전적인 분이시지요. 대부분의 귀족들이 입을 모아 찬성한다면,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는 걸 크게 반대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황녀 전하?”
“부정은 못 하겠군. 설령 황태자비가 되지 못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지안을 황실에 붙잡아두실 분이긴 하지.”
“그리고 우리가 아는 사실을 폐하께서 모르고 계실리 없죠. 조만간 황성에서 부름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들으란 듯 나누어지는 황녀와 이멜다의 대화에 지안은 얼굴을 굳혔다. 반면, 이멜다는 우아하게 미소 지은 채였다. 그녀의 시선이 지안을 향했다.
“우리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죠. 황녀 전하의 티파티에서 한 번, 그리고 힉스에서 한 번.”
“기억해요. 이멜다 에를랑겐 후작 영애. 맞나요?”
“나를 소개해야 할 번거로움을 덜었군요.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어요.”
“들어보죠.”
“카리나를 도와주었으면 해요.”
이멜다가 가볍게 손짓하자 처음 보는 기사 하나가 한 여자를 껴안고 다가왔다. 위험스러운 파장 덕분에 지안은 기사에게 안겨 있는 여자가 에스퍼란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심지어 그녀는 거의 폭주 직전이었다.
“대가 없이 능력자들을 도왔으니. 카리나에게도 능히 도움을 줄 수 있겠지요.”
“제가 신전에서 했던 일을 말하는 거군요.”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