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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93/199)

93화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꾸셨어요?”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에 일리아스는 주저하며 말했다.

“반대한다고 한들 멈출 네가 아니니까.”

지안은 조금 뜨끔했다. 그 말대로 반대하건 말건 공작을 찾았고 이븐을 끌어들였다. 특히 신전에서의 재각성 이후론……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지구로 돌아갈 궁리만 해 왔다.

“제가 왜 북부로 가려고 하는 건지, 이유는 아시고요?”

“……공작 때문이겠지.”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제가 공작님과 함께 북부로 향하려는 건 맞지만…….”

지안은 말을 흐리며 일리아스의 손을 잡았다. 그 접촉에 잠시 흠칫거린 일리아스는 스며드는 기운에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살이 오므라드는 고통이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가고, 부드러운 냉기가 달궈진 감각을 식혀 냈다.

그녀에게 가이딩을 받는 순간은 늘 이랬다. 속절없이 밀려들어 오는 기운에 이성이 죄다 마비될 지경이었다. 사실 욕심대로 지안을 끌어안고 침대를 뒹굴지 않는 것만 해도 일리아스의 이성은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말없이 가이딩에 집중하다 말고, 지안이 말했다.

“가이드 없는 능력자가 얼마나 힘들게 하루를 버티는지 저도 잘 알아요. 전하가 죽기를 바라지 않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만큼…… 저도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그게 안 된다면 안전하게라도.”

“…….”

“다들 저를 성녀니 뭐니 멋대로 부르는데. 사실, 그게 제일 화가 나요. 저는 능력자들을 위한 산 제물이 아니에요.”

옅은 분노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일리아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무엇에 화를 내는지, 무엇에서부터 도망치려는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껏 그녀를 움켜잡고 싶었다. 품 안에 가두고 싶었다. 아마 모든 능력자들이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지안의 말이 아니더라도 미래의 일이 선명히 보였다. 높은 확률로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안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하는 건 과욕이겠지. 일리아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사랑하게 된 걸, 너는 가이드와 능력자 간에 생기는 일종의 현상 같은 거라고…… 그렇게 일축했지.”

“그랬죠.”

“너는 가이드의 인간됨을 보고 멀리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난 네가 사기꾼이거나 도둑이라 해도 좋다.”

“제 충고를 허투루 들으셨군요.”

“아니. 제대로 들었다. 네 충고에 따라 여러 번 달리 생각하고 사고해 보니…… 확실히, 이상하게 느껴지더군. 내가 왜 이렇게 네게 맹목적이게 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거든. 여태 확신해 온 감정이 처음으로 의심스러웠다. 무섭게 이끌린다는 것 외엔 딱히,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사실 넌 내 이상형도 아니야.”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쭉 의심하고 경계하도록 하세요. 함부로 사랑을 확신하는 실수는 부디 한 번으로 끝내시고요.”

“……그건 장담하지 못하겠군. 왜냐면, 그토록 의심하고 이상하게 여겼음에도.”

아무 소용없었거든.

마지막 말은 너무 작아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 말을 용케 듣고 만 제 청력이 원망스러웠다.

“전하.”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어. 이렇게 아픈 게 사랑일 리 없다고. 네가 부정하고 나조차 의심하는 이 감정이 설마 사랑일 리는 없다고.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더는 들어줄 수 없어 지안은 급격히 가이딩 강도를 끌어올렸다.

“그만 말하고 가이딩에나 집중하세요.”

경고하자 삼황자의 입술이 재깍 닫혔다.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무는 모습에 지안은 조금씩 가이딩 강도를 부드럽게 낮췄다. 하지만, 여유가 생기기 무섭게 일리아스가 말했다.

“……북부로 가든, 공작과 연애를 즐기든 상관하지 않겠어. 내가 방해물로 느껴진다면, 거슬리면, 물러나 있으라고 해도 좋다.”

비통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 지안은 가이딩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더 들었다간 분명 악몽을 꾸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이건, 그에게 함께 지구로 가자고 제안해 볼 기회 아닐까?

“당황스럽네요.”

“보답받지 못할 마음이래도 좋다. 내가 있다는 걸 알아주는 걸로도 충분해.”

“…….”

“그러니…… 부탁이다. 갑자기 사라지지만 마.”

마지막 말에 지안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었다. 죄책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갈피를 못 잡고 침묵하는 사이 벌컥 문이 열렸다. 갑작스럽게 난입한 건 헤롤드였다.

“화,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 외침에 일리아스의 태도가 순식간에 일변했다. 지안은 의기소침하게 가라앉았던 삼황자의 얼굴 위로 분노와 긴장이 덧씌워지는 것을 보았다.

“……황태자가 이곳엔 왜? 나를 찾던가?”

일리아스의 질문에 헤롤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게, 영애를 찾으십니다.”

“저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지안은 얼굴을 굳혔다. 당연히 삼황자에게 용건이 있는 줄 알았는데. 황태자가 나를 왜 찾는단 말인가?

“제게 씌워졌던 황족 시해의 누명은 다 벗겨졌을 텐데. 왜 저를?”

“그게…….”

“비키거라!”

헤롤드가 머뭇거리는 사이, 금발의 남성이 헤롤드를 밀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엔 난처한 얼굴의 공작이 보였다. 제지하려다 실패한 듯했다.

“그대가 지안인가?”

난데없는 지목이었으나, 지안은 당황하는 대신 가볍게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에게 올리는 약식 인사였다.

바로 이런 점이 신분제 사회의 가장 재수 없는 부분이었다. 멋대로 남의 방에 들어온 쪽이 누군데 인사까지 곱게 드려야 하다니.

지안은 가까스로 하녀 시절 배웠던 인사말을 떠올려냈다.

“제국의 미래를 뵙습니다. 지안입니다.”

“만나서 반갑군. 이걸로 두 번째 만남인가? 알레인 테리온이다. 네 옆에 선 일리아스의 형이지. 일전의 연회장에선 정말 인상 깊었다. 불타는 여인의 모습은 처음 보았거든.”

“제가 전하의 연회를 망쳤지요. 사죄드립니다.”

“하하! 사죄할 것까지야. 그대를 오해한 내 잘못도 있으니 우리 서로의 잘못은 묻어두기로 하지.”

묻긴 뭘 묻나. 황태자의 명령으로 기사들에게 죽을 뻔한 걸 생각하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았다. 지구였다면 사과는커녕 얼굴에 물을 끼얹어 줬을 것이다.

“다행히 일리아스의 불길에 화상을 입은 건 아닌 것 같군. 우선, 이것부터 받지.”

억지로 뭔가를 안겨주는 바람에 지안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말았다. 얼핏 보았을 땐 평범한 나무 상자에 불과했지만, 곳곳이 얇게 편 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았다.

“……이건?”

“약소한 선물이다. 열어 보라.”

내용물을 확인해 봤자 좋을 일 없을 것 같아 잠시 망설였다. 그 모습에 황태자는 답답해하며 손을 뻗어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찬란한 광채가 눈을 어지럽혔다.

“에르데네트 쥬얼의 장인이 올해의 역작이라 단언한 목걸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예쁘네요.”

무심코 동의한 지안은 이어진 황태자의 말에 경악했다.

“그대의 목에 걸리면 더욱 아름다울 테지.”

노골적이고 의미심장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안은 곧장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그런 건 모르겠고, 제 물건이 아닌 건 잘 알겠습니다. 이런 보석은 저보다는 황태자 전하께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실제로 알레인의 차림은 호화로운 제복이었다. 화려한 금빛 문양 자수와 보석 단추, 가슴에서 번쩍이는 훈장들로 인해 과장 좀 보태면 걸어 다니는 보석 전시관이라도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거기에 보석 목걸이 하나 더 보태진들 티도 안 날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황태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농담이군.”

웃으며 넘기는 황태자에게 일리아스가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지?”

“이런, 일리아스. 경어는 아예 집어치우기로 했느냐?”

“그래. 산 채로 불타고 싶지 않다면 당장 꺼져.”

온유하게 구는 황태자에게 할 말로 적당하진 않았다. 졸지에 형제싸움에 끼어버린 지안은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 같은 폭언을 들었음에도 황태자의 반응은 서글서글했다.

“그 성질머리는 여전하구나. 황성에서 쫓겨나 의기소침해져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안심했다.”

뼈 있는 말에 일리아스는 지안의 손에 들린 보석함을 낚아채 그대로 황태자의 가슴팍에 내던지듯 돌려주었다.

“당장 돌아가.”

“걱정 마라. 나도 네겐 용건이 없으니. 자. 영애. 저 난폭한 녀석을 피해서 산책이라도 좀 하는 건 어떤가? 내게 시간을 좀 내 주었으면 하는데.”

“그건…… 양해해 주십시오, 전하. 제가 몸이 편치 않아서 아직은 저택 밖으로 나설 수 없습니다.”

급조한 변명에 황태자가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차나 한잔 얻어 마시고 가지. 부탁해도 되겠나?”

지안은 대답 대신 난처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선 공작을 응시했다. 악시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급하게 자리가 마련됐다.

서둘러 차를 내온 하녀가 물러간 후, 황태자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지안의 양옆에 착석한 일리아스와 악시온을 번갈아 보았다.

“그대가 신전에서 기적을 일으켰다지? 듣기론 공작과 일리아스가 그대에게 꼼짝도 못 한다던데. 두 사람의 태도를 보아 사실인 듯하군.”

“소문이 와전된 것뿐입니다.”

공작의 반박에 황태자가 소리 내 웃었다.

“숨기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도의 수백 명이 목격한 일이 와전될 수도 있나? 성력 없는 성녀를 독점하는 두 사람을 향한 능력자들의 원성이 자자한 걸로 알고 있다만.”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악시온을 대신해 일리아스가 그 말을 받아쳤다.

“흥. 아니라면 아닌 걸로 알 것이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군.”

시건방진 중얼거림에 처음으로 황태자의 얼굴이 굳었다.

“방종하구나.”

일리아스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지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본인의 연회를 망쳤단 이유로 네게 엉터리 누명을 씌운 사람이다. 무슨 말을 하든 귀담아듣지 마라.”

그 말에 지안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런 주의는 적어도 황태자가 없는 장소에서 주었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대놓고 황태자를 비난하는 것에 가까웠다.

불안한 마음에 바라본 황태자의 얼굴은 울긋불긋해져 있었다. 아무리 형제라지만, 상대가 황태자인데 이래도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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