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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92/199)

92화

“잠깐, 잠시만 기다려 봐. 황태자비라니 대체……? 본디 그 자리는 이멜다 네 것이 아니었던가? 넌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단 말이냐?”

“대세가 그러한 것을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시치미 떼지 마라. 바로 그 대세를 바꾸는 사람이 너였다! 지안을 황태자비로 삼으려는 자들의 속셈은 대충은 알겠다만, 네 가치도 지안 못지않을 터. 다들 드러내놓고 말하지만 않을 뿐, 일황자를 황태자로 만든 건 너였잖느냐!”

“그랬었지요. 허나 흩어져 있던 세력이 어느 정도 골격을 형성하고 나면 그 뒤에는 자연스럽게 한데 뭉쳐 그들끼리 공고해진답니다. 누가 그런 걸 가능하게 했는지, 길잡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미 쓸모없어졌으니까. 게다가…… 마침 적당하게도 더욱 쓸모 있어 보이는 대체제가 나타났지 않나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란 듯 현실을 짚어내 보인 이멜다는 잠시 다른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황녀의 말대로 대세를 바꿔서 황태자비 자리를 쟁취한 자신을.

사실, 황태자비가 되어도 그리 행복할 것 같진 않았다. 가장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건 황태자비라는 허울뿐인 지위가 아니라, 카리나가 눈을 뜨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후작의 목이다.

일순 이멜다의 눈빛이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잠재워 놓은 분노가 슬그머니 몸을 뒤척인 탓이다. 찰나간 평생에 걸쳐 누적되어 온 고통이 선연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입술을 비틀어 깨문 이멜다는 차갑게 경고했다.

“제 말을 못 믿으시겠거든, 하루만 더 기다려 보시죠. 바로 내일 황태자 전하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에르데네트 쥬얼의 보석을 들고 공작저를 방문할 테니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군. 나는 황태자가 널 좋아하는 줄 알았다.”

“제게 호감이 있으시긴 하지요.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선 단순한 호감과 이득,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이득을 택하실 분입니다. 저 스스로도 그렇게 종용해왔고요.”

이멜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비엔은 입술을 깨물며 그 말에 동의했다.

“그는 황태자니, 능력자들을 거리낌 없이 다스릴 수단을 얻기 위해서라면 잠시의 호감쯤이야 접어둘 만도 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사로잡으려 애쓰실 거랍니다.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거든 따로 조사해보셔도 좋습니다.”

살얼음 낀 듯 서걱이는 목소리에 거짓은 없었다.

이비엔은 알 수 없단 얼굴로 카리나와 이멜다를 번갈아 보았다. 저 여자를 위해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다니. 심지어 이멜다는 자신이 황태자비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이미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서 날아갔는데, 이렇게 담담할 수 있나? 이비엔의 상식으론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황녀의 모습에 이멜다가 상냥히 제안했다.

“뭐라도 증명하고 싶지만 오늘은 제가 일이 있어 곤란하고, 내일 황태자 전하의 방문이 확인되는 즉시 저와 함께 공작의 저택으로 가시죠. 제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어떤지는 그때 자연히 아시게 될 겁니다.”

이비엔은 이멜다가 드러내는 당당함을 의심하며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만한 것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숨겨놓은 꿍꿍이가 더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좋다.”

그렇게 대답하며, 이비엔은 이멜다와 카리나의 관계를 낱낱이 파헤쳐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지안은 짐짓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는 척, 창가의 화병 아래를 더듬어 보았다. 혹시나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쪽지를 확인하는 건 최근 들어 가장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이븐을 만난 후에는 한 번도 화병 아래서 쪽지가 나온 적 없었다. 바로 그날, 이 비밀스런 필담조차 최대한 자제하자고 공작에게 말해둔 탓이었다.

일의 진행 과정이나 진척도를 몰라 답답했지만, 잠시의 답답함보단 곧 북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비밀에 부치는 게 무엇보다 더 중요했다.

공작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아무것도 없나?’

익숙한 실망감으로 화병 아래를 더듬는 걸 그만두려던 순간, 손끝에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걸려들었다. 공작이 보내온 쪽지였다!

반가운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워져 지안은 얼굴을 굳혔다. 쪽지가 화병 아래 숨겨져 있다는 건, 떠날 준비가 다 끝났단 걸 뜻했다.

서둘러 펼쳐본 쪽지의 내용은 단순했다. 일주일 뒤 모든 준비가 끝나니 새벽에 몰래 지하로 나가자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쪽지를 불태운 지안은 후련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드디어 북부로 떠난다. 두 번째로 시도하는 것이니만큼 이번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선 채로 홀가분함을 만끽한 지안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곧 있을 지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하나둘 떠올려 보았다.

문득 들려온 노크 소리가 아니었다면, 단순히 생각에 그치지 않고 챙겨갈 물건이 없는지 직접 살펴보았을 것이다.

“누구세요?”

물음을 던지자 문 너머로 삼황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나?”

뜻밖의 방문에 지안은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방문자가 있다면 당연히 공작일 줄 알았는데, 삼황자라니? 지나치게 공교로운 타이밍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공작과 내가 남몰래 북부로 떠날 거란 걸 알고서 찾아온 건 아니겠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문이 열렸다.

“지안….”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선 일리아스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지안을 보았다. 긴장으로 굳어진 무표정과 가라앉은 그녀의 눈빛은 불청객을 바라보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어쩐 일로?”

경계심이 묻어나는 물음에 일리아스는 끝 모를 비참함을 느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놀랐잖아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언제 경계를 드러냈냐는 듯 상냥히 물어오지만, 저 얼굴이 가면에 불과하다는 걸 어찌 모를까.

일리아스는 화상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아픔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자비를 구걸하는 패잔병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지안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 가련한 외양을 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결코 약자가 아니었다.

“북부로 가겠다.”

“뭐라고요?”

갑작스러운 선언에 지안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청히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제도를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해. 동행하겠다.”

“갑자기 왜…….”

“네가 원하니까.”

조금쯤은 감동해도 좋을 말이었으나 지안은 그러지 못했다. 감동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건 당황스러움이었다. 왜 하필! 왜 지금에서야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갔다. 혹시 알았나? 내가 이븐과 접촉한 걸? 공작과 북부로 떠나버릴 거란 걸 알고서 이렇게 마음을 바꾼 건가? 아니면 동행하는 척하다가 뭔가를 꾸미는 건 아니겠지?

지안은 의혹의 눈초리로 일리아스를 살폈다. 그러나 들불처럼 일어난 의심이 무색하게도, 삼황자는 어째 자신보다 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의 파장 역시 조금도 거짓 어린 기색이 없었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리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군.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그러는 전하께선 왜 마음을 바꾸셨죠?”

뾰족한 물음에 일리아스는 살얼음 위에 선 기분이 되었다. 지안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 탓이었다. 일리아스는 처음으로 말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따르는 게 좋겠다고 여겼다. 내가 뭔가 또…… 실수한 건가?”

답지 않게 저자세로 나오는 삼황자의 모습 위로 지구의 에스퍼들이 보였던 행태가 겹쳐졌다.

“……아니요, 실수한 거 없으세요.”

그가 북부로 함께 가 주길 바랐다. 진심으로. 그러나 그건 며칠 전의 일이다. 기껏 마음 정리를 다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웠다.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니, 북부로 가겠다고 고집부린 순간 내가 공작을 택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타협을 거부한 것이었을 텐데. 대체 왜?

내가 가이드라서? 역시 그 때문인가?

심각해진 지안의 표정에 일리아스는 더럭 겁에 질렸다. 분명 바로 앞에 있는데도 지안이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너무 늦어서 이미 마음이 떠난 것일까?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든 되돌려 놓고 싶었다. 그러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될 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릴 적 탑에 갇혀야 했던 날처럼 그저 무력할 뿐이다.

일리아스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다음의 일을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마 축객령이 떨어질 것이고, 자신은 힘없이 물러나야 하겠지. 그녀가 마음에 둔 건 내가 아닌 공작이니까. 

공작 부인이 된 그녀를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옆에 억지로 끼어든다 해도 자신은 고작해야 정부쯤이나 될까. 혹은 그조차 못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어떤 푸대접을 받아도 지안이 곁에 없는 것보단 나았다.

땅을 파고 들어가는 일리아스의 이 같은 생각을, 지안은 조금도 몰랐다. 몰랐으나, 늘 그랬듯 불안으로 거칠어지는 그의 파장만은 잘만 읽혔다. 이런 상태의 에스퍼를 모른 척 돌려보낼 순 없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위로받았지 않았나. 보답이라 하기엔 우습지만, 조금의 위안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줄 수 있는 게 가이딩뿐이라 해도.

“우선은…… 앉으세요. 그리고 이야기 좀 해요. 가이딩도 받고.”

일리아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부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강경한 목소리였지만, 부드러웠다. 지안은 턱짓으로 일리아스를 의자에 앉혔다. 일리아스는 그대로 따랐다.

다정한 반응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다정함 가운데 숨기지 못한 어색함이 느껴졌다. 마치 처음 본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과도 결이 비슷했다. 그녀는, 나와 거리를 두기 위해 일부러 상냥히 대하는 것일까?

그사이 지안은 의자를 끌어와 일리아스의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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