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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199)

91화

하필 편지를 보내온 사람이 이멜다 에를랑겐이라니! 다른 사람의 서신이었다면 모를까, 그녀의 편지만은 모른 척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다들 이멜다를 아름다운 사교계의 꽃, 조용하고 고귀한 후작 영애 정도로만 여기지만 그녀는 차기 황태자비 후보이자 황태자의 숨겨진 책사였다.

그녀가 이러한 사실을 그닥 드러내지 않은 탓에 그 정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알 만한 사람은 이멜다 에를랑겐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일황자 알레인 테리온을 황태자로 만들어 보인 게 그녀란 걸 왜 모르겠는가.

‘왜 일황자를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도의 사교계에 깊숙이 몸담은 경험이 있기에 이비엔은 그녀의 계략과 수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으로 삼기엔 너무 골치 아프고, 그렇다고 아군으로 회유하기도 찝찝한, 독사 같은 여자.

차분한 얼굴로 정적을 소리소문없이 묻어버리는 이멜다의 책략을 이비엔은 우연히 목격한 바 있었다. 자신은 손 하나 대지 않고 귀부인 여럿을 거쳐 거만한 백작 영애 하나를 변방 영지에 처넣은 그녀의 수완에 혀를 내두른 기억이 여즉 생생하다.

무해한 척 레이스를 휘감고 영애들 사이에 끼어 있지만, 그녀는 병아리 속에 숨어든 뱀과 같았다. 귀부인들이 일개 영애에 불과한 이멜다를 드러내놓고 우대하는 것만 봐도 그 실체를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이멜다에게 속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지?’

티파티 이후로 그쪽이 먼저 선을 그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용건이라도 있는 건가? 서둘러 움직이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움직인 이유나 동기를 당최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비엔은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지안을 미끼로 이멜다가 자신을 이용하려 드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았으나, 수상쩍다 한들 지안의 일이었다. 지안의 이름이 나온 이상, 확인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 * *

마부를 재촉해 기별 하나 없이 에를랑겐 후작저에 당도한 이비엔은 당황한 후작가의 사병과 기사들을 곧장 지나쳤다.

“이멜다는 어디 있지?”

목소리 높여 질문하다 말고 이비엔은 걸음을 멈췄다.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후작저의 정문 바로 앞에 그녀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비엔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인 이멜다가 말했다.

“에를랑겐의 이멜다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차분하고 산뜻한 인사에 이비엔의 입술이 비틀렸다.

“한가로이 인사나 나누자고 영애를 찾은 게 아니다.”

“압니다. 제 서신에 화답하려 이리 발걸음해 주신 걸 테지요.”

“말장난에 어울려 줄 기분이 아니니 본론부터 말하지. 내 시녀의 신변이 위험해질 거라 경고해온 근거에 대해 묻겠다.”

“물으시니 기꺼이 답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응접실에 차를 준비해 놓았답니다. 올해 핀 장미꽃을 홍차와 같이 우려 보았는데, 달큰한 향이 일품이에요. 어떠신가요, 전하?”

권유의 탈을 쓴 강요에 이비엔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었다.

“부디 시원찮은 용건이 아니길 바라. 만일 시답잖은 이유로 지안을 핑계 삼은 거라면……. 그대는 오늘 후작저가 반파되는 꼴을 보게 될 거다.”

“발현을 하셨으니 전하께선 이제 능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시죠. 새겨 듣겠습니다.”

“농담 같나?”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허투루 말하지 않으신다는 걸 뻔히 아는데…… 제 배포가 그리 크진 않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론, 전하를 허튼 이유로 불러낼 만큼 간이 부은 자는 테리온의 황제 폐하 외엔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겁 없이 황제를 들먹이며 농담을 던지는 이멜다의 모습에 이비엔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황녀인 내 앞에서 감히 폐하를 농담거리 삼다니!

그러나 분노한 이비엔의 기색을 보았음에도 이멜다는 담담했다.

바로 그 건조한 신색이 이비엔을 분노하게 하는 한편 긴장시켰다. 이멜다가 이토록 대범하게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비엔이 아는 이멜다는, 나서고 물러날 때를 누구보다 정확히 가늠해 내는 사람이었다.

“그럼 가실까요?”

앞장서 걷는 이멜다의 뒤를 이비엔은 잠자코 따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이멜다의 멱살을 쥐고 무슨 꿍꿍이로 지안의 이름을 팔았는지, 혹시 지안을 이용해 일을 꾸미는 게 아닌지 캐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약점을 잡힌 건 자신이었다.

“기억해라, 영애. 만일 지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이를 모두 그대의 탓으로 여기겠다.”

경고 어린 말에 한 번쯤 뒤돌아볼 법도 하건만 이멜다는 그러지 않았다. 대답 대신 걸음을 빨리한 이멜다는 닫아 걸린 응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장미향이 훅 퍼져나오는 응접실의 원형 테이블에는 선객이 한 명 있었다. 하나뿐인 안락의자에 반쯤 눕듯이 앉아 있는 여인은 짙은 색 로브로 얼굴을 가렸고, 이비엔과 이멜다가 응접실에 들어섰음에도 미동 하나 없었다.

바로 그 여인의 옆으로 매끄럽게 이동한 이멜다는 로브의 후드를 걷어 선객의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멍과 상처로 엉망인 얼굴이 드러나자 이비엔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폭행의 흔적이 너무도 적나라한 탓이었다.

“전하께 소개 드려요. 이쪽은 카리나랍니다. 저의 오랜 친구죠.”

그렇게 말하며 이멜다는 살며시 카리나의 어깨를 짚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이비엔의 눈 위로 이채가 떠올랐다. 어깨 위에 손을 얹었음에도 눈을 감은 채 미동 하나 없는 여인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기절한 것처럼 보이는군. 영애의 친구라니 묻지. 이 여인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징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내게 그녀를 선보인 이유가 뭐지?”

“카리나는 치유 능력자입니다.”

질문 세례에 대한 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이비엔은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치유 능력자들은 워낙 꼭꼭 숨어 사는 탓에 금광보다 더 찾기가 힘들었다. 황실에서도 단 한 명의 치유 능력자를 간신히 보유하는데 그쳤다.

그럴진대……. 후작저에 치유 능력자가 있었다니!

“치유 능력자라고?”

“아시겠지만, 능력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하곤 하죠. ‘내가 비록 발현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의 이능이 치유 능력은 아니니 이 얼마나 다행이냐.’라고요.”

이멜다의 말에 이비엔은 침음을 삼켰다.

그녀의 말대로, 치유 능력자임이 들통난 능력자들은 이능 착취를 피해 가지 못했다. 주변의 강요와 협박으로 온갖 질병과 고통을 안고 살다 빠르게 죽음에 이르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고난이자 운명 아닌가.

때문에 치유 능력자들은 스스로를 숨기며 평생을 살아가곤 했다. 운이 좋으면 평탄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재수 없이 이능이 발각되는 순간 그 삶은 순식간에 구렁텅이로 미끄러지곤 했다. 이비엔이 말했다.

“내게 이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전하의 시녀를 만나고 싶습니다. 제도 외곽의 공작저에 기거하는…… 성력 없는 성녀. 그녀를 말예요.”

“허. 지안의 신변이 위험해질 거라며 날 불러내더니……. 진짜 용건은 이거였군.”

목적을 알자마자 단번에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황녀의 모습에 이멜다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녀는 전하의 시녀였으니 전하의 명령을 따르겠죠. 전하를 통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테고요.”

“지안의 신변이 위험해질 거란 서신은, 거짓이었나?”

“거짓 정보로 황녀 전하와 거래할 만큼 어리석진 않답니다.”

“지안을 노리는 능력자들의 동태라도 조사한 모양이지? 좋다. 가치 있는 정보라면 그대의 친우를 지안에게 선보이겠어. 하지만 지안이 그 여자의 폭주를 멈추어줄지 어떨지 나는 장담하지 못한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설득이건 호소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가능한 한 빨리 만나보고 싶은데. 내일쯤엔 만나볼 수 있을까요?”

“당장 내일이라니 성급하군. 그대답지 않은 수작을 보아 급하긴 한 모양이다만, 왜 그리 서두르지? 지안을 이용해 치유 능력자의 이능을 조금이라도 더 써먹으려 하는 건가?”

황녀의 질문에 내내 차분하던 이멜다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어떻게 생각하든, 전하의 자유십니다.”

거칠게 내뱉은 이멜다는 분노를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힘들이지 않고 참아낼 수 있는 것이 과연 분노인가. 임계점을 넘어선 감정에 이멜다의 목소리가 비통히 갈라졌다.

“카리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카리나는…….”

떨림이 묻어나는 이멜다의 목소리에 이비엔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인간성을 엿본 듯했다. 철옹성같이 스스로를 은폐하고 숨겨왔던,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일황자를 황태자로 세울 만큼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한 이멜다 에를랑겐이…….

“제가 바라는 건 카리나가 깨어나는 겁니다. 저는, 반드시 카리나를 살려놓을 겁니다.”

……누군가를 살리겠다는 말을 하다니!

“지안이라 했던가요. 그녀가 위험해지길 바라지 않는다면, 제 청을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이어진 말에 이비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멜다의 태도에 놀라 가장 중요한 용건을 잠시 잊어버린 것이다.

“우선, 영애의 말을 들어보지. 대체 무엇을 근거로 지안이 위험해질 거라 장담하는 거지?”

“제도의 능력자들 모두 그녀를 노리고, 신전은 그녀를 성인으로 추대하려 하죠. 확인해 보니 조만간 사제들이 능력자들과 손을 잡을 것 같더군요. 아직까진 공작과 삼황자 전하가 이를 막고 있지만, 사실 제가 방해해 두지 않았다면 진작 이루어졌을 일이랍니다.”

“흥. 그런 것쯤이야 나도 충분히 무마시킬 수 있다.”

“그러실 테지요. 하지만 제도의 고위 귀족들이 합심해서 그녀를 황태자비로 삼으려 하는 것까지 저지할 수 있으실까요?”

“뭐?”

“그 여자는 능력자들의 폭주를 막죠. 그러니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폭주의 위험이 없어진 삼황자 전하가 야심을 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 말입니다.”

기막힌 말에 이비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어리석은!”

“어리석죠. 하지만 욕망에 눈먼 어리석은 자들은 늘 있어 왔어요. 제가 알기로 이미 스물이 넘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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