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전하께서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난처한 얼굴로 답하는 하녀의 말에 황태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왔는데도 말인가?”
“죄송합니다만…… 네. 그러합니다. 전하.”
“하, 이거 참.”
답답해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이멜다는 짐짓 앞으로 나섰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그게, 심기가 안 좋아지신 지 오래되셨습니다.”
“흠.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께서 외출을 삼가고 칩거하신 게 꽤 되긴 했지. 내가 알기론 공작의 저택에 다녀오신 이후인 것으로 아는데……. 맞는가?”
“어, 어떻게 그걸…… 헙!”
놀라 입을 가리는 하녀의 모습에 이멜다는 빙긋 웃어 보였다. 어차피 한 번에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던 터. 그녀는 미리 준비한 편지를 건네며 몰래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금화 주머니를 하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황녀 전하께 전해드리렴. 오늘 당장은 말고. 내일 아침 즈음에. 뜯어 보지 않거나 불태워 버리실 것 같거든, 당신의 전속 시녀와 관련된 이야기라 전하렴.”
“아, 알겠습니다.”
편지를 받아든 하녀가 금화 주머니를 재빨리 품속에 집어넣으며 돌아서자 알레인이 말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 우리도 그만 돌아가지. 마침 정기 회의가 있는 날이니……. 기왕 입궁한 김에 그대도 함께 가서 은밀히 지켜봐 주었으면 해.”
“그러죠. 그럼 전 그때까지 잠시.”
“나와 함께 있지 않고? 달리 가야 할 곳이 있는가?”
“모처럼 입궁했으니 황태후 폐하를 만나 뵈려 해요. 안부 인사를 드리지 못한 지 오래되었답니다.”
“그렇다면야…… 알겠다. 기다리지.”
“해 질 녘 즈음에 소회의실로 찾아가겠어요. 그럼 전 이만.”
부드럽게 돌아선 이멜다는 황태자를 등진 채 차갑게 두 눈을 빛냈다.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이로써 전부 다 사용했다. 이젠 결과를 수거할 일만 남았다.
이멜다는 가라앉은 눈으로 힉스에서 그 여자와 잠시 마주쳤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첫 만남이었던 티파티에선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그러다 뒤늦게 관찰한 그녀는, 언뜻 차가운 인상이었으나…… 눈빛만은 순진했다. 그리고 황녀를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주눅 한 점 없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어떤 시녀가 그럴 수 있을까. 단순히 황녀의 호의를 샀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 고작 그것만으론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목할 이유도 뒷배도 없는 고작 시녀일 뿐이었으므로 당시엔 거기서 의문이 멈췄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그녀가 숨기고 있던 많은 비밀이 베일을 벗었고, 황녀의 시녀에겐 여러 이름이 붙었다. 신전은 그녀를 성력 없는 성녀라 불렀고, 능력자들은 구원자라 불렀다. 황태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그 여자를 예비 황태자비로 부른다.
그러나 이멜다는 그중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궁금한 것은 단 하나. 그 여자에게 무엇을 쥐여주면 카리나를 살려줄까 하는 것뿐이다.
무상으로 제도의 능력자들을 모두 도왔다는 정보를 진작 입수하긴 했지만, 단순한 동정심으로 그랬을 리 없다. 사람의 온정에 기대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평생에 걸쳐 확인하지 않았나.
신전에서 능력을 드러내 보인 것도 분명 노리는 바가 있기 때문일 터. 그렇다면 그녀가 노리는 건 대체 뭘까. 궁금한 건 오직 그뿐이었다. 그것을 알아야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거래가 불가능하다면, 약점이라도 잡아야 했다. 지안이 알았다면 기막혀했을 오판을 거듭 곱씹은 이멜다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맹목적으로 그녀를 비호하던 황녀 전하의 음성이 여즉 잊혀지질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여자가 능력자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만은 사실이리라.
그렇다면 카리나 역시 황녀가 그러하듯 그녀에게 마음을 주게 되는 걸까?
“그건 좀 슬프겠군.”
그래도 상관없다. 카리나가 살아 있는 것으로 족하니.
이멜다는 씁쓸함을 감추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은 채 고위 귀족 영애의 표본처럼 우아하게 나아갔다.
* * *
아론은 태연한 얼굴로 황성에 입성했다. 그간의 노력으로 셀스하임 백작과의 끈을 만들어둔 덕에 황태자가 주관하는 정기 회의의 말석에나마 착석하게 된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여러 귀족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찔러주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황태자의 손을 빌려 삼황자를 제거하고 지안을 공작의 저택에서 끌어내는 것이었다.
이전처럼 대놓고 노려봤자 저항만 더 심해질 테니 차근차근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할 판을 짜는 게 더 나았다. 그리고 오늘 이루어질 회의는, 바로 그 판을 짜기 위한 탐색의 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론도 이것만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여…… 그 여자를 황태자비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막힌 소리에 아론은 폭소를 삼키며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했다. 주요 발언권을 가진 고위 귀족들이 나서서 이리저리 근거를 들어가며 황태자를 설득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저희들끼리 일찌감치 회동이라도 가진 모양이었다.
신전을 견제하고 능력자들의 골수까지 빨아먹으려 작정한 듯한 계획을 들으며 아론은 몹시 감탄했다. 있는 놈들이 더한다더니. 하여간 머리 하나는 비상하지 않은가! 그들이 축재한 부와 명성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야 발언권 한 자락 얻지 못한 채 방청하는 처지였으므로 아론은 잠자코 회의를 관람했다.
그러나 실소는 그치질 않았다. 언제는 지안을 가리켜 황태자와 공작을 홀린 희대의 요부라 비난하더니……. 그녀의 가치가 드러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바꾼다. 너나 구별할 것도 없이 다들 그녀가 불러올 이득을 셈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눈 뜨고 봐 주지 못할 만큼 점입가경으로 치달은 회의는, 마침내 삼황자가 반역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공작이 여태 폭주하지 않은 건 다 그 시녀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만일 그 여자가 공작부인 정도에 그친다면 다행이겠으나, 생각해 보십시오, 전하. 삼황자가 그 여자를 아내로 얻으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폭주를 피해 목숨을 부지하게 되면 삼황자가 다른 마음을 먹을지도 모릅니다.”
“동감입니다. 한때 그를 지지했던 자들이 다시금 삼황자에게 힘을 보탤 수도 있습니다. 비록 옛날의 일이긴 하나, 삼황자가 한때 두각을 드러내 보였던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의 발현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까진 능력자들 대개가 서른을 못 넘기고 사망했지만, 하필 성력 없는 성녀가 나타났지 않습니까. 삼황자가 뒤늦게나마 황위에 야욕을 드러내면 어쩐단 말입니까.”
그럴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아론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와 같은 능력자들이 그녀를 원하는 거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신전에서도 지안을 원하고 귀족들도, 황실에서도 그녀를 노리고 있을 줄이야. 재미있다 못해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열을 올리며 황태자를 설득하는 여러 귀족들의 모습이 너무도 희극적이었다. 이쯤 되면 그녀는 살아 숨 쉬는 보물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무 귀하니 온갖 어중이떠중이가 다 들러붙어서 문제지만.’
차근차근 황태자에게 접촉해 삼황자를 처리하려 했는데…… 이제 보니 죄다 헛돈을 쓴 것 같았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귀족들이 먼저 나서서 삼황자를 음해해주고 있지 않은가.
앞장서서 황태자를 설득하는 귀족들의 면면을 확인한 아론은 이어지는 회의의 양상에서 신경을 껐다. 결과가 불 보듯 뻔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황태자는 허수아비라도 되는 양 귀족들의 주장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고. 거의 설득 직전이었다.
아론은 비죽이 웃으며 남몰래 혀를 찼다.
‘저런 게 다음 대의 황제라니 제국도 명줄이 다했군.’
하지만 황태자란 자가 저리도 멍청하니 그에겐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론은 회의 테이블 위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외면하며 촛대가 달린 벽을 응시했다. 누군가 몰래 회의를 엿듣고 있다는 걸 안 탓이었다. 공간을 다루는 그에게 같은 공간에 숨어 있는 인간 하나를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론은 잠시 그 불청객을 처리해 버릴까 생각했으나. 이내 관뒀다. 저 또한 아무 발언권 없이 방청하는 처지인 탓이었다.
그리고 벽 너머, 자신이 방금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이멜다는 여러 귀족들의 압박에 열없이 답하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침착히 귀를 기울였다.
“경들의 주장은 잘 알겠다. 근시일 내 공작저에 방문하도록 하지. 혹시라도 일리아스와 공작이 그녀를 강제로 구금한 것이라면 빼내 오도록 하겠다.”
그 말에 아론은 이번에야말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푸핫!”
터져버린 웃음을 눌러 참느라 작게 끅끅거린 아론은 주변을 향해 사과의 눈인사를 남기며 잠시 자리를 피했다. 더 들었다간, 황태자를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 탓이었다.
다행히 회의는 아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끝났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삼황자는 조만간 반역의 멍에를 쓸 것이다. 굳이 나서서 귀족들의 모략질에 한 손 보탤 필요도, 황태자를 부추겨 삼황자를 죽이라 종용할 필요도 없었다. 기껍다면 기껍고, 허탈하다면 허탈한 결과였다.
다만, 그 결과를 조금 앞당길 필요는 있으리라.
회의를 끝내고 우르르 몰려나가는 귀족들 사이에 섞여나간 아론은 주변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공간을 넘었다. 뜻밖에 일차적인 목표를 쉬이 달성했으니, 황태자와 독대해 판을 더 키워 볼 요량이었다.
그녀를 납치할 무대는 크면 클수록 좋을 테니.
* * *
이른 아침, 이멜다의 서신을 받아든 이비엔은 기함을 금치 못했다. 유려한 글자가 쓰여진 고급스러운 편지를 든 황녀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지안의 신변이 위험해질 거라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마차! 당장 마차를 준비해라! 에를랑겐 후작저로 가겠다!”
“네, 네. 전하.”
서슬 퍼런 명령에 하녀들이 분주해지는 사이 이비엔은 서둘러 서신을 손 안에 구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