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그 꼴을 본 이멜다는 가늘게 뜬 눈으로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삼황자를 무시하는 발언을 여전히 계속하기에 보고서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아예 읽지도 않았다니.
새삼 그 안일함에 속이 터졌다. 주제에 걸맞지 않게 과분한 자리에 앉았다면 영특하게 굴진 못해도 유지를 위한 노력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황태자에겐 그런 열의마저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황족이란 자부심과 그 자신도 감당 못 하는 권력욕뿐. 이외에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게으름과 권태 정도였다.
장점을 찾아보려 해도 고작해야 뭐든 잘 될 거라는 안일함,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둔 건지 모를 미친 긍정성이 그가 가진 전부다. 치미는 욕설을 삼킨 이멜다는 차갑게 분노했다.
“그 여자가 능력자들의 폭주를 죄다 진정시켜 주었다더군요. 이 일로 능력자들이 대거 공작의 저택에 몰려들어 농성하고 있다지요.”
“그게 이 일과 대체 무슨 상관인가?”
“제게서 답을 구하려고만 하지 마시고. 제발 잘 생각해 보세요. 전하께서 소유하게 되신 기사단이 한번 쓰고 버릴 패가 아니게 되는 거예요. 그만한 전력을 거저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테고. 심지어 그 전력을 유지하게 될 방법도 생겼죠. 손에 넣지 않는다면 언젠가 후회하게 되실 거예요.”
“고작 그것뿐인가?”
“고작이라니요? 제국민들이 능력자의 폭주로 피해를 보는 일이 줄어들고, 능력자로 구성된 기사단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선 온 제국의 폭주하지 않는 능력자들을 평생 다스리게 되실 텐데요. 아. 물론, 황태자비 되실 분께서 그 능력자들을 모두 보살펴 주셔야 할 테지만……. 이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죠.”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이멜다의 모습에 황태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론 부족하다. 영애는 내 머리야. 그대는 결코 좋은 여자가 아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해 준 것도, 나를 황태자로 만들어 준 것도 전부 그대 아닌가. 무엇보다 영애만큼 계략을 잘 짜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추후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나는 그대의 도움을…….”
“어머.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이야.”
한탄인지 감탄사인지 모를 감사를 표한 이멜다는 매끄럽게 혓바닥을 놀렸다.
“염려 마세요, 전하. 황태자비가 아니더라도 제가 전하를 돕는 건 무척 당연한 일이랍니다.”
눈웃음짓는 이멜다의 모습에 알레인은 말없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거짓말 마라. 차라리 바라는 걸 말해.”
“후후. 절 오래 보셔서 그런가, 이런 눈치만은 빨라지셨군요. 말씀하신 대로 바라는 게 하나 있긴 해요.”
“뭐지?”
황태자의 물음에 이멜다는 광채 어린 눈빛으로 싱긋 웃어 보였다.
“제 아버지. 에를랑겐 후작의 목을 원해요.”
“무슨? 이멜다. 내가 잘못 들었나?”
“제대로 들으셨어요.”
“……뭐?”
“다시 말씀드려야 하나요? 후작의 목을 원해요.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확신에 찬 요구에 알레인은 얼빠진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누구의 목을 원한다고?
그의 놀람도 아랑곳 않고 이멜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전하의 수중에 특이한 능력을 지닌 능력자들이 적지 않으니, 그를 죽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으시겠죠. 기왕이면 마차 사고로 위장하는 게 좋겠어요. 마침 아버지께서 매주 도박을 위해 찾으시는 살롱이 있답니다. 위치를 알려 드릴 테니 실수 없이 처리해 주세요. 오늘 당장 실행하는 게 무리라면, 내일도 좋아요.”
“잠깐, 잠깐만! 이멜다…… 진심인가?”
의심 가득한 물음에 이멜다는 환히 웃어 보였다.
“전하. 제가 허튼 말을 하는 걸 보신 적 있으신가요?”
“……없지.”
“아신다면 제 청을 들어주세요. 저는, 후작 영애가 아니라 에를랑겐 후작으로 불리길 원하니.”
“하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후작을 만나시면, 그에게 물어보세요. 왜 그녀를 황태자비로 삼아야 하는지……. 저보단 제 아버지께서 더 잘 설명해 주시겠죠. 저를 대신해 그 여자를 황태자비로 삼는 게 좋겠단 의견은 모두 후작 각하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니까요.”
“그 말은, 그 시녀를 황태자비로 삼자는 것이 영애의 의견이 아니란 말인가?”
황태자의 지적에 이멜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의견은 아니었죠.”
그 말에 황태자는 안도하다 말고 금세 분노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후작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 가능성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 후작은 그대가 황후가 되길 바란 것 아니었나?”
그 질문에 이멜다는 빙긋 웃어 보였다.
황태자의 말대로 후작은 자신이 황후가 되길 바랐다. 어릴 때부터 늘, 너는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해 왔다.
하지만 그를 위해 계략을 짜고, 다방면으로 수완을 보이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경계심을 드러내더니 급기야 폭력을 마다치 않으며 굴복시키려 들었다.
귀족 회의에서 성력 없는 성녀를 들먹인 것도 사실은 나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의 일종이었으리라. 이제 와 내가 황후가 되어 봤자 입맛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것이 뻔하니, 마침 나타난 그럴싸한 대용품을 손에 쥐려 한 것 아닌가. 그 머리로 생각할 만한 건 어차피 뻔하디뻔했다.
“한때는 그러길 바라셨는지도요. 하지만 지금은 전하와 제 사이를 이간질하는 인물일 뿐이랍니다.”
“그대 역시 그리 생각한다면…… 알겠다. 후작은 조만간 처리하도록 하지.”
예상외로 선선한 대답에 이멜다는 습관처럼 드러나려는 불신을 힘겹게 숨겼다. 그래도 아버지가 아니냐, 후작은 나를 지지하는 세력의 수장이다. 이런 말로 반대해올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설득안과 거짓말들을 준비했는데……. 이렇게나 선뜻 동의하다니?
그간 황태자는 늘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었고, 한 번도 예외 없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움직였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한데 그는 뜻밖에도 너무나 순순하게 협조하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후작을 죽여주겠노라고. 그렇게 답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 건, 그가 정말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찬찬히 황태자를 뜯어보았지만, 알레인의 표정과 말 어디에서도 거짓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멜다는 반신반의하는 한편, 떨떠름한 감정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전하만 믿겠어요. 아, 그의 머리는 증거품으로 제게 가져다 주세요.”
“그러지. 그럼 황태자비 건에 대해서는…… 취소하는 거겠지?”
“글쎄요. 그 여자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시고. 추후 후작이 된 저를 황비로 삼으셔도 될 일이에요. 그 외에도 방법은 많지만…… 뭐, 우선은 이대로 진행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군요.”
“어째서지?”
“정황상 저희에게 보탬이 되긴 할 테니까요. 전하의 수중에 그 여자를 두는 것도 중요할 테고…… 만일 성공한다면 삼황자에게 복수하기에 이만한 것도 없지 않나요? 그 여자는 삼황자의 약점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삼황자를 거론하는 이멜다의 말에 알레인은 더 생각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지안을 일리아스의 약혼녀로 삼았단 사실은 이미 그의 안중에 없었다. 자신의 입에서 제안이 나왔으니. 여태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해 주리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었다. 황태자를 위하는 척 제안한 것은 단순 노림수 중 하나일 뿐이니.
해서, 이멜다는 굳이 황태자의 어리석음을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황태자가 생각 없이 성력 없는 성녀에게 청혼하려 들어야만, 이를 빌미로 황녀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적당히 이용하면, 틈을 타 카리나를 살릴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멜다는 우아하게 웃어 보이며 황태자를 얼렀다.
“근시일 내 공작의 저택에 방문해 보시는 게 좋겠어요. 직접 가서 그 여자를 확인하세요. 가능한 한 호감을 사도록 하시고요. 아마 그녀도 반색하며 전하를 반길 거예요.”
“그러지. 공작에게 용건이 있는 척 방문해 유혹해 보겠다.”
유혹이라. 황태자가 그 여자를 유혹해 낼 수 있을까? 이멜다는 다소 회의적인 눈빛으로 알레인에게 몇 가지를 조언해 주었다.
“섣부른 유혹보다는…… 기왕 방문한 김에 삼황자 전하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그 여자에게 삼황자 시해죄를 뒤집어씌운 걸 사과하시는 게 좋겠어요. 오판 정도로 포장하면 적당할 것 같군요.”
“사과를 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가능한 한 그녀를 공작의 연인으로 대우해 주는 게 좋겠군요. 형제의 여자를 빼앗는 것보단 공작의 여인을 빼앗는 것이 세간의 눈초리를 덜 받으니까요.”
강경한 이멜다의 지시에 알레인은 불퉁한 얼굴로 답했다.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사과라니? 사과는 내가 받아야 한다.”
“전진을 위해선 후퇴도 해야 하는 법이에요. 그리고 전하. 거듭 말하지만, 제 말을 들어서 손해 보신 적 있나요?”
“……없지.”
“저는 삼황자에게 보복할 최고의 방안을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이후의 선택은 전하의 자유죠. 하기 싫다면 그만두셔도 좋아요.”
“하겠다.”
“그럼 공작의 저택에 방문하기에 앞서…… 에르데네트 쥬얼에 방문하시는 게 좋겠군요. 주문은 제가 이미 넣어 두었으니 대금을 치르고 찾아가시길. 호의와 사과의 의미로 주는 선물이라고 하면 받아들일 겁니다. 에르데네트 쥬얼의 보석을 거절하는 여자는 없으니까요. 아. 그리고…….”
이멜다는 잠시 머뭇거렸다.
“황녀 전하를 뵙고 싶습니다. 오늘 밤 정기회의 외엔 전하의 일정이 없는 걸 확인하고 왔으니 저와 함께 가 주셨으면 해요.”
“이비엔 말인가? 그대는 황녀와 돈독하니 방문이야 언제든 가능하지 않나.”
“아니요. 저 혼자 방문하면 전하는 만나주시지 않을 거예요.”
짐작일 뿐이지만, 황녀궁의 초입에서 쫓겨나지만 않아도 다행일 것이다. 황녀의 티파티에서 일어났던 일을 숨기기 위해 이멜다는 자세한 설명을 아꼈다.
“어쨌건, 전하를 뵙기만 해도 충분해요. 도와주시겠지요?”
“후…… 내가 그대의 청을 어찌 거절하겠나. 다만, 기억해 둬라, 이멜다. 내가 황후로 삼고 싶은 건 일리아스의 시녀가 아니라 그대다.”
보통의 영애라면 분명 가슴 설렐 만한 말이었지만, 이멜다는 말없이 웃어 보이는 것으로 응답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