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매끄럽게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상황을 일단락지은 이븐은, 약속한 날짜를 들은 즉시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두둑한 금전을 약속받은 것은 물론, 찐하게 가이딩까지 받아 가벼워진 몸놀림은 덤이었다.
오던 길을 되짚어 두더지처럼 빛 한 점 들어서지 않는 지하로 이동하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흙더미 사이로 재수 없이 해골이 튀어나와도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신전에서 앞장서 능력자들을 줄 세우고 능력을 어필하는 등의 수고를 한 보람을 드디어 돌려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하를 통해서까지 북부로 이동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곰곰이 생각하던 이븐의 머릿속으로 이비엔과 일리아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황족을 피해 북부로 도주하려는 게 아닐까?
그도 그럴 게, 성축일 당일, 신전에서 그녀를 호위하던 사람 중엔 황족도 있었다. 당시엔 그녀를 보호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실은 보호가 아니라 감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넘겨짚는 게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방금 전 접선 장소에 함께 나타난 건 북부 공작 한 사람만이기도 했고……. 의뢰를 철저히 비밀에 붙이는 것도 영 수상쩍다. 남몰래 연락해온 방법 또한 몹시 은밀했다는 걸 생각하면, 아마 이것은 사실에 가까운 짐작일 것이다.
게다가 아가씨와 북부 공작이 가고자 하는 곳은 북부 오데르겐령이다.
공작은, 그녀를 도우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데리고 도망치려고?
“흐음…….”
이븐은 턱을 문지르며 악시온의 태도를 되새겨보았다. 사람의 얼굴을 덥석덥석 잡아대는 걸 보아 성격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눈빛만은 호수의 밑바닥처럼 깊었다.
태도가 좀 험악한 거야 뭐, 용병으로 살며 험하고 거친 일을 다 겪어본 이븐에겐 대수롭잖은 편이기도 했다.
뭣보다 아가씨가 공작을 믿고 의지하는 것 같았다. 수긍할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다.
“나쁘게 보일 필요는 없지.”
지금처럼 그가 옆을 내주면 이후로도 가끔 아가씨와 접촉할 수도 있을 테니까.
지하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한 이븐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인적 없는 골목길 위로 올라갔다. 짙게 그림자 진 골목 어귀. 땅속에서 쑥 빠져나오는 이븐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폐하께서 결국 일리아스를 처벌하지 않으시겠다더군.”
분통을 터뜨리는 황태자의 모습에 이멜다는 작게 눈썹을 치떴다. 이미 다 나온 결과를 가지고 대체 며칠째 투덜거리는 건가.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투정이 기꺼웠다.
“별수 없지요. 삼황자가 제도의 노예상들을 뿌리 뽑으신 건 사실이니까요.”
부러 황태자의 심기를 긁은 이멜다는, 황태자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관찰하며 천천히 말을 보탰다.
“그리고 이 일로 귀족파들의 결집이 대단히 약해졌어요. 불법 노예 매매에 가담한 자들 모두 전하의 손아귀에 사로잡히게 된걸요. 당장은 삼황자의 공로처럼 보일지 몰라도, 곧 전하의 치세 중 하나로 굳어질 테니 너무 심려 마시라고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렸나요.”
“그렇더라도 그 일과 황태자궁이 불탄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상벌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잖나.”
“폐하께서도 그걸 모르시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때로는 지금처럼 공로가 죄과를 덮는 일도 있는 법이지요. 삼황자 덕분에 귀족파의 일원들 모두 황실에 크게 약점이 잡혔는걸요. 폐하께서도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 처벌을 유예하시는 걸 테지요.”
“흥. 유예는 무슨…… 곧 죽을 녀석이라고 생각해 그러시는 거겠지.”
삼황자를 가리켜 곧 죽을 녀석이라 일컫는 황태자의 말에 이멜다는 웃음을 삼켜야 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싶어서.
성축일 당일. 삼황자는 보란 듯 성력 없는 성녀의 곁을 지켰다. 쉬쉬하며 퍼지고 있긴 하지만, 정보에 민감한 귀족이라면 이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당연히, 이 정보는 폐하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이번 용서에는 그 이유도 있을 테지.
이멜다는 작게 한숨지었다. 대체 이 멍청한 황태자에게 언제까지 정보를 물어다 줘야 하는 걸까. 이 애송이 같은 남자를 나는 대체 언제까지 어르고 달래야 하나.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간 전하의 황태자위를 공고히 해 준 공이 있으니까요. 그 탓에 너그러이 마음먹으신 걸 테죠. 그러니 불쾌하시더라도 관대히 넘어가시길 권고드려요.”
남 일 말하듯 건조한 어조에 숨길 수 없는 질책과 조소가 묻어 있었다.
황태자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이틀 전만 해도 황태자궁을 불태운 죄를 쉬이 용서받을 수 없으리라며 동조해 주던 여인이 왜 갑자기 말을 바꾸는가? 알레인은 의심에 앞서 솟아오르는 분기를 참지 않았다.
“이멜다. 황태자궁이 불탔다. 그것이 어찌 관대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봐 넘기지 않겠다면, 뭘 어쩌시려고요?”
“뭐?”
“폐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사안입니다. 게다가 문제를 일으킨 삼황자가 여전히 황성에 머문다면 모를까, 그는 이번 일로 입궁을 제한당했어요. 폐하께서 직접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다시는 황성으로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지요.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이미 처벌은 충분하고도 넘쳐요.”
“이해할 수가 없군. 지금 내 앞에서 일리아스의 역성을 드는 건가?”
이멜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멍청하긴.
이런 자가 일국의 황태자라니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장남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동생들보다 잘난 게 단 하나도 없지 않나. 이런 자보다는 차라리 황녀 전하가 더 국정을 잘 운영할 것이다.
“바로 보셨습니다.”
“뭐라?”
“더는 삼황자의 처벌에 연연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고, 삼황자가 몇 년간 노력을 기울여 양성한 기사단은 온전히 전하의 손에 떨어졌어요. 전원 능력자로 이뤄진 기사단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전하께서 가장 잘 아실 테지요. 그리고 삼황자의 처우가 이보다 더 나빠지면 기사들이 동요할 수도 있습니다.”
“동요라니?”
“황족조차 능력자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여지는 건 결코 좋지 않아요. 전하께선 그들부터 잘 다독이셔야 합니다.”
“오늘따라 충고가 많군.”
분기를 억눌러 참는 황태자의 말에 이멜다는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느끼신다니 애석하군요. 하지만 저는 곧 황태자비가 될 몸. 제가 이 정도 조언도 전하께 드리지 못한다면 황태자비 따위가 제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선을 넘어선 말에 황태자는 의자를 박차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멜다!”
“듣고 있답니다.”
“정신을 놓기라도 했는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오겠다.”
“지금 제 정신 상태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전하를 생각해 드린 말씀을 이리 의심하시다니……. 애석함에 가슴이 다 아프군요.”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손으로 짚은 이멜다의 눈빛은 더없이 냉담하고 차가웠다. 알레인은 그 눈빛에 말없이 쪼그라들었다.
“전하께선 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를 먼저 파악하셔야 했습니다. 제도가 격변을 앞두고 있는데 왜 그걸 모르시나요?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시는 건가요? 저로선 알 수가 없군요.”
서릿발 같은 말에 황태자는 박차고 일어선 것이 무색하게 엉거주춤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이멜다가 이렇게 정색을 할 때는 최대한 그 말을 따르는 게 좋다는 걸 그간의 학습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문제로 화를 내긴 했지만, 고작 이런 일로 이멜다와 틀어지고 싶진 않았다. 이멜다는 유서 깊은 후작 가문의 영애였고, 이합집산으로 흩어져 있던 귀족들을 훌륭히 규합해 자신을 지지하도록 만든 책사였다. 남몰래 숨기고 있던 열등감을 자극해 기어코 자신을 황태자가 되도록 만든 킹 메이커이기도 했다.
“……내가 흥분했군. 미안하다.”
“이제야 제 이야길 들어보실 준비가 되신 것 같네요.”
이멜다가 가볍게 손짓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차를 내왔다. 적막한 가운데 방 안은 찻물 따르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이윽고 하녀가 자리를 피하자 내내 침묵하고 있던 이멜다가 말했다.
“제게 약조하셨었죠. 저를 황태자비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그랬었지. 왜? 이제 와 의심이라도 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걱정 마라. 황태자비뿐 아니라, 장차 황후로도 만들어 주지.”
“영광이로군요.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버려서…….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황태자비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예기치 못한 말에 알레인은 저도 모르게 겁먹은 얼굴로 반문했다.
“뭐라고?”
“전하의 생일 연회를 엉망으로 망쳐 놓은 시녀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기, 기억한다. 갑자기 그 시녀 이야기는 왜 하는 거지?”
“바로 그 여자가 황태자비가 되어야 하니까요.”
“뭐라? 한낱 노예였던 여자를, 황태자비로 삼으라니? 게다가 그 여자는…… 폐하께서 일리아스의 약혼녀로 삼으신 여자잖나. 이멜다. 드디어 미쳤는가?”
당황에 찬 물음에 이멜다는 차갑게 조소했다.
“성축일 당일, 제도에 일어난 기현상에 대해서 들어보셨겠지요? 능력자들이 죄다 신전으로 몰려간 것도 아실 겁니다. 바로 다음 날 정황을 모두 정리해 보고를 올렸으니까요.”
이멜다의 말에 알레인은 난처한 얼굴로 침음했다. 처음 듣는다는 반응 덕분에 이멜다는 또 한 번 실소를 삼켜야 했다.
“설마 제가 올린 보고서를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이멜다의 질문에 알레인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