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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87/199)

87화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했다. 그를 할퀴고 상처 주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한 번 더 설득을 해 보려던 거였는데…… 왜 나는 혀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멋대로 나불거렸나. 적당히 의사를 떠본 뒤에 얼버무리면 그만이었는데. 왜 제때 그만두지 못했나.

후회하면서도, 지안은 이미 그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를 살리고 싶다. 바로 그 때문에 몰아세우는 걸 멈추지 못했다. 삼황자가 함께 북부로 떠나주었으면 했다. 왜냐면, 그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으므로.

이를 악문 일리아스가 말했다.

“날 휘두르는 네게서 멀어지고 싶다가도…… 결국에는 너를 갈구하는 내 꼴이 얼마나 비루한지 너는 모르겠지.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서글픈지도.”

떨림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처 입은 금빛 눈동자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지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우는, 거야? 그 삼황자가?’

그를 울릴 생각은 아니었다. 말로 상처입힐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처음의 의도야 어쨌건, 설득이 통하지 않자 흥분해서 쏘아붙이고 말았다. 답답함을 참지 못해 강제로 밀어붙였다. 절박한 건 그나 나나 비슷하단 걸 뻔히 알면서도, 인내심을 가지지 못했다.

다만…… 그 결과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지안은 할 말을 잃은 채 일리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만 떨어트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아야 하는 건장한 남자. 심지어 황족인 데다 에스퍼이기까지 한 그가, 이토록 연약해 보일 줄이야. 푹 젖어 가라앉은 그의 금빛 눈동자만큼이나 심장이 철렁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안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만회해 보기 위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전하. 저는…….”

그러나 그 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일리아스의 태도로 인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전하?”

뒤돌아선 일리아스는 도망치듯 빠르게 멀어졌다. 손을 뻗었지만 지안은 차마 일리아스를 붙잡지 못했다. 그의 품에 안겨 흐느꼈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나 버린 탓이었다.

그래. 바로 며칠 전 삼황자에게 받았던 위로를 생각하니 죄책감이 뾰족하게 심장을 긁어내렸다.

할 수만 있다면 삼황자를 붙잡고 사과하고 싶었다. 상처 줄 생각은 아니었다고. 그러려던 게 아니라…….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했을까. 날 사랑한다면 함께 북부로 가 달라고? 공작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가져와 읊어야 했나? 이런 이기적인 말을?

사실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신분과 부를 모두 포기하고, 태어나 거주해온 세계를 버리고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해서라도 그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그는 황족 아닌가. 차마 그간 그가 누려왔을 지고한 신분을 포기하라 강요할 수 없었다. 타고난 특권을 내려놓으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북부행에 동의해 준다면, 이 낯선 차원에 나를 주저앉히려 하지 않는다면, 황성으로 가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더라면, 제안해 볼 생각이었다.

함께 가지 않겠냐고. 당신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 많겠지만, 내가 늘 옆에서 도와줄 테니. 같이 가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물론 공작을 찾아 그의 의사를 물어봐야 했겠지만, 다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반대에 부딪힐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이, 삼황자는 훌쩍 멀어져 있었다. 더는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을 거리였다.

첨예한 갈등을 끌어안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버거웠다. 달려가 붙잡을 용기는 없었다. 지안은 쓰게 웃었다.

어딘가 울음과 닮아 있는 웃음이었다.

* * *

늦은 밤. 지안은 공작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지하로 향했다.

저택에 지하가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신기한 기분을 누른 지안은 최대한 앞만 보려 노력한 채 발소리를 죽이며 성실히 공작을 뒤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철저히 봉쇄된 입구를 지나치자 예상외로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지하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공기가 습윤했고 먼지 냄새가 퀴퀴했지만 그리 음울하진 않았다. 거미줄 하나 없는 걸 보면 누군가 정기적으로 관리를 해 온 모양이었다.

“여기다.”

공작의 말에 지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켠 작은 등불이 공작의 얼굴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홀린 듯 그 얼굴을 응시하던 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아무도 없는데요.”

그 말에 작게 미소 지은 공작이 지하의 벽면을 노크하듯 두들겼다.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벽면을 이루고 있던 벽돌이 차곡차곡 흙 안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마법 같은 장면에 지안은 놀란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벽 너머 숨겨진 공간이 드러나며 이븐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치자 이븐이 기쁜 얼굴로 알은체해왔다.

“드디어 만났군요.”

“목소리를 낮춰라. 지하라 소리가 울리니.”

악시온의 지적에 이븐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게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맞아요. 일전에 신전에서…… 지하를 통해 이동할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거, 기억하시나요?”

“기억하고말고요. 몰래 가야 할 곳이 있으신 모양이시죠? 걱정 마십시오. 제도 내 어디든 모셔다 드리죠.”

“목적지가 있긴 하지만 제도는 아니에요.”

“그럼 어딜?”

“북부. 오데르겐령.”

“네? 어디라고요?”

난색이 드러나는 이븐의 얼굴에 지안은 차분히 되물었다.

“북부요. 가능할까요?”

“어. 음. 그렇게 먼 곳까지 이동을 감행한 적은 없어서……. 이런 말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불가능해요. 전 그렇게 능력을 써 본 적도 없고…….”

“아뇨. 가능할 거예요. 혹시라도 폭주 때문에 거절하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네요.”

그렇게 말하며 지안은 이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확인해 보란 듯 내밀어진 손에 이븐은 꿀꺽 침을 삼켰다. 처음부터 돈을 바라고 찾아온 게 아니긴 했지만, 이렇게나 쉽게 원하던 바를 얻어낼 줄이야.

눈치를 보며 망설이는 이븐의 모습에 지안은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몰래 나온 터라 시간을 끌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오늘로 날을 잡은 것도 밤 경비 당번이 헤롤드였기 때문이다. 짐짓 여유로운 척 표정 관리를 하고는 있지만, 실제론 실랑이를 하거나 협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니 반드시 오늘 밤 안으로 대답을 끌어내야 했다.

“어때요? 아직도 폭주가 걱정되나요?”

이븐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저릿하게 흘러드는 전율 탓이었다.

신전에서 익히 맛본 감각이었지만…… 기분 탓일까? 다시금 접한 지안의 기운은 그때보다 더 강력해져 있었다. 이성이 아득히 멀어져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고통이 가신 전신이 한없이 풀어지다 녹진하게 흘러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 마침내 늪의 일부가 되면 바로 이런 기분일까. 넋을 빼며 탄식하는 이븐에게 지안은 조곤조곤 바라는 바를 설명했다.

“사정이 있어서 지상으로 이동할 수가 없어요. 해서, 반드시 지하로만 움직여야 해요. 이동하면서 필요한 물품은 공작님이 구해다 주실 예정이고요. 이능을 많이 쓰게 되겠지만, 폭주할 위험은 없을 거예요. 제가 있으니까. 어때요? 수락하겠어요?”

이븐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비고 뭐고 냉큼 접수해야 할 부탁이었다. 수락은커녕 이쪽에서 천금을 싸들고 동행을 부탁해도 부족할 판국이다.

“네. 네! 그럼요!”

흥분 어린 대답에 악시온은 그대로 이븐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하라지 않았나.”

우악스럽게 얼굴의 하관을 틀어쥐는 악시온의 행동에 지안은 놀라 그의 팔에 매달렸다.

“공작님. 과하세요.”

“하지만…….”

“주의를 주는 것으로 충분해요.”

소근거린 지안은 곧바로 이븐에게 사과했다.

“용서하세요. 몰래 조용히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 과민해져서 그래요.”

즉각적인 사과에 이븐은 씩 웃어 보였다. 물론, 악시온을 향해 웃은 건 아니었다.

일순 불쾌감이 치솟은 건 사실이지만, 아가씨 앞이다. 성력 없는 성녀. 출신 모를 노예에서 갑작스럽게 삼황자의 시녀로 발탁되어 제도를 들썩이게 한 소문의 주인공.

그녀가 노예상들의 무대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능력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존재는 단연코 최고의 화두였다. 능력자들은 집착적으로 지안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았고, 추이를 살폈다. 이븐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삼황자가 여자 하나 때문에 황태자궁을 죄 불태웠단 소문을 들었을 땐 희대의 악녀를 연상했는데…… 그 주인공이 검은 머리의 아가씨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턴,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직접 만나본 지안은 이븐의 예상과 판이하게 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빛이긴 했지만 악랄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찬밥 취급을 받는 평민 능력자에게도 차별이 없었다. 이는 신전에서 이븐이 직접 목격한 사실이기도 했다.

섬약하지만 차분한 인상. 다툼을 저어하는 태도까지. 이븐의 눈에 비친 지안은 딱 그 나이대의 귀족 아가씨였다. 혹은 조금 부유하게 살아온 평민 아가씨 정도쯤 될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여러모로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란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조심성이 없었던 탓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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