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위태로운 그 모습에 이멜다는 고통을 잊은 채 서둘러 일어났다. 워낙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던 터라 간단한 상비약이나 붕대를 곳곳에 구비해 두었다. 의원이 오기 전에 간단한 처치만이라도 해 놓아야 했다.
떨리는 손으로 약을 찾은 이멜다는 카리나의 얼굴에 덕지덕지 약을 바르고 찢어진 이마를 붕대로 감았다. 미리 준비한 수면제를 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맨정신으로 고통을 견디게 할 바에야, 차라리 부상이 다 나을 때까지 잠들어 있는 게 더 낫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괜찮아. 쉬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약효에 기대 잠든 카리나를, 이멜다는 어느 때보다 더 냉정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황태자비가 되고자 했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권력을 얻어 후작가에서 벗어난 후 카리나를 빼돌리는 것. 그것만이 제 유일한 바람이었다.
카리나도 살고 자신도 살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믿었다. 이외엔 희망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삼일이 지나도 카리나가 깨어나지 않자, 이멜다는 억지로나마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카리나는 자신은 괜찮다고. 아마 일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아니었다. 이제 보니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바로 그 새빨간 거짓말을 믿으며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서 버텨온 거다.
그리고 결국, 와르르 무너진 현실이 코앞에 닥쳐왔다.
치료의 이능을 지닌 자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는 건, 폭주를 하고 있거나 폭주를 하지도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유가 뭐든 카리나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두 손 놓고 카리나가 깨어나길 기다릴 시점은 이미 한참을 지나 버렸다.
입술을 깨문 이멜다는 초조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이다 눈을 빛냈다. 삼황자와 공작이 싸고도는 그 여자. 능력자의 폭주를 가라앉혀 준다는 그 여자가 필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여자가 머물고 있는 저택이 어딘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공작저에 찾아든 사제들은 물론, 몰래 침입하려 한 능력자들까지 전부 공작과 삼황자에 의해 가차 없이 처단당하고 있는 마당 아닌가.
그렇다고 황녀 전하를 이용하기엔 하필 시기가 좋지 않았다. 황녀의 각성 이후로 이쪽에서 보란 듯 거리를 둔 탓이었다. 게다가 티 파티에서 공개적으로 황녀의 파혼 사실을 들먹여 망신을 줬다. 이제 와 부탁한다 한들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여자는, 황녀의 총애를 받았던 시녀였다. 이멜다를 살리려면 먼저 황녀를 설득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여자를 만난다 한들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고민 끝에 이멜다는 후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각하의 계획대로 그 여자를 황태자비로 만들어 보이겠어요. 대신 약속하세요. 이 일이 성공하면…… 카리나를 후작저에서 내보내시겠다고.”
다짜고짜 들이닥쳐 협상을 요구하는 이멜다의 모습에 후작은 손안의 깃펜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고개 숙여 잘못을 빌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이런 건방진 제안 따위를 해 오다니.
하지만 이멜다의 태도를 꾸짖기엔 그녀가 내건 제안이 퍽 괜찮았다. 결연한 표정을 보건대 황태자비의 자리를 내려놓을 준비도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에를랑겐 후작은 못마땅한 내심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 뜻대로 움직여 준다는데 맞춰주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치유 능력자를 놓아준다니.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금화를 궤짝으로 받고 팔아도 아까울 마당에.’
그러나 제 속내를 알았다간 이멜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당장은 그러마 하고 넘어가는 게 좋으리라.
능력자 따위에게 애착을 보이는 게 못마땅하긴 해도, 무능한 일황자를 보란 듯 황태자로 만들어 보인 그녀의 책략만은 진짜였다. 이멜다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았고, 이를 다루는 수완도 뛰어났다.
그녀는, 그가 평생 곁에 두고 부려먹어야 할 소중한 딸아이였다.
후작은 선심을 쓰듯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다. 그럼 계획을 말해 봐라. 네가 아무 생각도 없이 날 찾아오진 않았을 것 아니냐.”
너무 순순한 그 말에 이멜다는 후작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차라리 그게 무슨 아까운 짓이냐며 소리치거나 협상을 하려 했다면 믿었을 텐데.
하지만 이를 깨달았다 해서 당장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없었지만…… 후작을 죽이리란 결심만은 할 수 있었다.
‘당신은 내 가족이 아니야.’
오랫동안 바래 왔으면서도 번번이 저지르지 못한 일. 차마 시도하지 못한 패륜을,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는 그가 아버지로도, 아니,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혐오스럽게 숨 쉬는 고깃덩이, 썩어가는 호박도 후작보다는 덜 경멸스러울 것이다. 이멜다는 부유하는 먼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선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카리나는 죽을 것이다.
초조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속내를 숨기고 기회를 엿보는 것은 언제나 자신 있었으므로.
이멜다는 날 선 눈을 감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밤중의 저택은 물에 잠긴 듯 고요했다.
한낮엔 신관이나 능력자들이 무리 지어 몰려와서 적잖이 소란스러워지곤 했지만, 한밤중에도 그런 건 아니었다.
아주 가끔, 어둠을 틈타 강제로 침입하려는 이들이 있긴 했으나 그마저도 공작과 삼황자가 나서면 어떤 소란이든 단번에 숨을 죽였다. 덕분에 새벽까지 설치는 에스퍼가 없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안은 창가의 화병을 들어 그 밑바닥에 감춰진 쪽지를 확인한 뒤 불태웠다.
공작이 보낸 쪽지엔 이븐이 자신을 만나러 내일 밤 저택에 방문하리란 사실이 쓰여져 있었다.
‘시작한 이상 돌이킬 순 없어.’
그렇게 다짐해 보았으나 내키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실패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돌아갈 수 있을까?
어쩐지 쓸쓸해지는 감상을 뒤로 한 지안은 오도카니 앉아서 자신의 선택을 반추했다.
이븐을 만나 계획을 털어놓고 나면, 그 후부턴 정말로 도망 외엔 답이 없겠지.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것 없었으므로 계획의 수립과 실천은 빠를수록 좋았다. 기왕 비겁해지기로 했다면, 도망치기로 했다면, 무를 수 없을 만큼 서둘러 나아가는 게 좋았다.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이번 일로 인해 황녀 전하가 저택에 방문하지 않고 있어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하게 되었단 것 정도일까…….
남겨진 에스퍼들이야 그렇다 쳐도, 삼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비죽이 물음이 튀어나왔다.
고민 끝에, 지안은 삼황자의 방으로 향했다. 이븐을 만나기 전에 그에게 다시 한번 제안해볼 생각이었다. 북부로 함께 가 달라고.
이런 이유로 찻주전자를 사이에 놓고 일리아스와 마주하게 된 지안은, 설득의 말을 고르고 골랐다.
하지만 근거 있는 주장 따위 할 수 있을 리 없다. 본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겠단 사실을 밝힐 수도 없으니, 결국 남는 건 북부로 함께 가자는 억지 주장뿐이었다. 이런 볼품없는 생떼를 내세우려는 마당에 고민은 쓸데없는 사치였다. 지안은 내지르듯 말했다.
“이렇게 전하를 찾아뵌 건, 더는 제도의 저택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들어보지.”
“경비대에 연행된 능력자들이 수십이 넘어간다고 들었어요. 그 때문에 공작님은 다른 저택을 물색하고 계시고요. 하지만 저택을 옮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닐 테죠. 평생 숨어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럴 테지.”
“해결책이 있다면, 제가 사라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단정하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는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착잡함을 넘어서 화가 났다.
“알 만하군. 어디로 사라지겠단 말이지? 북부인가?”
바라는 바를 정확히 짚어오는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잠시 당황했다.
“맞아요.”
“왜 그렇게 북부에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군. 역시, 공작 때문인가?”
“공작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북부는 몹시 척박한 곳이니 능력자들이 뒤따라온들 쉽사리 발붙일 수 없을 거예요. 지금처럼 저를 표적 삼는 일도 더 어려워질 테고요.”
“그렇다 한들 황성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당연한 일 아닌가? 황성으로 가면 다 해결된다. 그곳에선 지금처럼 숨어 살지 않아도 돼.”
“대신 평생을 갇혀 살아야겠지요.”
비꼬는 지안의 말에 말문이 막힌 사이, 확인 사살을 하듯 서늘한 주장이 날아들었다.
“저는 떠나고 싶어요.”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능력자들이 단번에 널 추격해올 거란 말이다! 당장 이 저택을 방비하는 것도…….”
“네. 알아요. 전하와 공작님이시죠. 하지만 아시잖아요? 제가 황성에 머문다고 이 모든 일이 해결되진 않아요.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억압받으며 살 자신 없어요.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억압이라니 기막히군. 내가 너를 다시 하녀로 삼을까 봐 그러느냐?”
“이제 와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아요. 다만, 한때 하녀였던 제 눈으로 본 바로는, 황성을 찾는 고귀한 영애들 모두 그리 행복해 보이진 않더군요. 가문의 뒷받침을 받는 영애들조차 그러할진대, 제가 무슨 수로 황성에서 살아갈 수 있죠? 전하를 믿으면 되나요?”
반문하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의 눈썹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너는 조금도 날 믿지 않는군.”
고통 어린 눈빛을 외면한 지안은 회의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를 신뢰할 만한 일이 제게 조금이라도 있었던가요?”
“날 믿지도 않으면서 왜 내게 조건을 내걸고 보호를 요구한 거지? 단순한 필요 때문인가?”
“……그 조건, 더는 지킬 생각 없어지시거든 언제든 말씀하세요.”
부정조차 없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는, 너는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비참함에 기가 빨린 듯 힘없는 질문이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 위로 적나라한 상처가 처참히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