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지안의 대답에 악시온은 만족스레 웃으며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차오르는 충족감에 전신이 떨렸다. 드디어 마음이 받아들여졌노라고. 악시온은 그리 확신했다.
그러나 확신의 순간, 지안이 말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만일 제가 지구로,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 저는 실망할 거예요. 공작님이 아닌 다른 에스퍼를 찾게 될지도 모르죠.”
그 말에 악시온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심한 순간 독니에 심장을 물린 듯했다. 단단한 바위 위로 낙뢰가 떨어진 것처럼 불시에 이루어진 기습이었다.
머리로는 알았다. 그녀의 선택지 중 자신이 있었고, 운 좋게 선택을 받았으니 그로서 족했다. 실패할 일 따윈 없고, 그녀가 다른 에스퍼를 찾아야 하는 일은 결코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북부의 눈보라만큼 냉정한 말에 마음이 절로 서늘해져 왔다.
흔들리는 악시온의 눈빛에서 불거져 나오는 상처와 오해의 기색에 지안은 곧장 공작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대로 천천히 가이딩을 진행하자 악시온의 눈빛이 당황에서 안도로, 안도에서 감격으로 서서히 바뀌어나갔다.
지안은 공작의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차분히 말했다.
“저와 한 약속을 지켜달라는 말이에요. 협박처럼 들렸다면 미안해요. 지금 생각해 보니 표현이 좀 험악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건, 제가 독하게 말한다고 그걸 다 곧이곧대로 믿진 마세요. 그게 다 진심인 건 아니니까. 적당히 걸러 들어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공작의 모습에 지안은 피식 웃었다.
사람의 감정을 멋대로 읽어내는 그의 특성을 시시때때로 경계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난처한 마음, 무수한 언어의 나열로도 설명하지 못할 진심을 이렇게나 손쉽게 전달할 수 있지 않나.
“공작님만 믿을게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뺨을 감싼 손을 끌어당겨 손등 위에 가만히 입 맞췄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손등 위로 진하게 스며들었다.
“믿어도 좋다.”
손등에 대고 속삭이는 그 말에 지안은 만족스레 웃었다.
만족을 얻은 건 악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스며들어오는 그녀의 기운은 너무도 손쉽게 심장을 허물어뜨렸고, 비교할 데 없이 안온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운과 함께 전해지는 지안의 감정이 막 샘솟으려던 서글픔을 일거에 지워냈다.
믿는다는 단순한 말 아래에 숨겨진 무수한 감정들. 멋쩍어 어쩔 줄 모르는, 수줍고 서투른 진심.
그것은 막 생동하는 씨앗의 뿌리처럼 작고 미약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악시온은 그 감정을 곱씹어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신을 향해 어렵사리 자라난 호감과 신뢰에 그는 한참을 감격에 떨었다.
그러길 잠시, 악시온은 이내 어색한 표정으로 돌아간 지안을 보며 애석해했다.
“내가 그렇듯, 그대 역시 내 감정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군.”
“그렇다면 좋겠지만, 전 가이드라서 아마 힘들걸요. 그러니 만약 제가 무언갈 알아주길 바라신다면 제게 말씀하셔야 해요. 말 안 하면 모르니까.”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난처히 웃었다. 자신의 진심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숨김없이 모든 속내를 소리쳐 말하고 싶기도 했다.
너무 좋아서 슬프고, 어느 날 갑자기 변심한 당신이 나를 버리고 사라질까 봐 매일이 아슬아슬하다고. 할 수만 있다면 애써 덮어둔 불안을 토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는가. 지난한 감정을 삼켜낸 악시온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럼, 지금 말하지.”
전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완고하면서도 떨림이 묻어나는 목소리. 애원하는 눈빛에 지안은 이어질 공작의 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대를 사랑해.”
예상 그대로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고백이었다.
* * *
별관의 창가에 선 이멜다는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후작저를 방문한 마차들이 하나둘 저택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탓이었다. 제발, 그가 취했기를! 취해서 곯아떨어졌기를!
하지만 별관으로 후다닥 달려오는 하녀의 얼굴을 보건대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멜다는 상심한 얼굴로 하녀를 맞이했다.
“아가씨. 각하께서…… 각하께서 오고 계셔요! 얼른 정원으로 가요. 잠깐이라도 몸을 숨기면!”
“……그럴 순 없어. 그랬다간 카리나가 해를 입어.”
“아가씨가 다치셔서 그 애가 능력을 쓰는 것보단 나아요!”
하녀의 말에 이멜다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엠마의 말이 맞다. 도망쳐야 한다. 아버지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잠깐만, 아주 잠깐만 몸을 숨기면……. 그러면 무사히 하룻밤을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문 너머로 후작의 손에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오는 카리나를 본 순간, 이멜다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카리나…….”
창틀을 짚으며 이멜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만일 이대로 도망친다면 후작의 분노를 고스란히 이어받는 건 카리나가 될 것이다. 그럴 순 없었다.
“아가씨! 어서요! 어서 가요!”
측근 하녀가 손목을 잡아당겼지만, 이멜다는 냉담히 그 손을 뿌리쳤다.
“도망치는 건 안 되겠어. 얼른 가서 의원을 불러와. 카리나가 능력을 쓰기 전에 즉시 치료해야 하니.”
“아가씨!”
“너도 가! 어서!”
거친 외침에 엠마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이멜다의 목소리가 높아질 땐 어떤 말로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멜다의 시선은 후작에게 붙들려 끌려오는 카리나에게 내내 고정되어 있었다.
뿌득. 이를 간 이멜다가 중얼거렸다.
“너를 살리려 황태자비가 되고자 한 것인데…….”
허탈해하며 벽에 기댄 이멜다는 흐린 눈으로 과거를 더듬었다.
카리나를 후작저에 두고 떠날 수 없어서 기를 쓰고 북부와의 약혼을 무효로 돌렸다. 카리나가 덧없이 폭주하게 내버려둘 수 없어서 어떻게든 일황자를 황태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모두 덧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반복되는 악몽처럼, 카리나의 신음소리와 후작의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 이마에 흐른 선혈이 채 다 굳지도 않았건만, 그녀의 아비는 분풀이용 사냥감을 찾듯 또다시 자신을 찾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엠마의 충고를 따라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남겨진 카리나가 더 큰 해를 입을 것이다. 그간의 숱한 경험으로 안 사실이었다.
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진 후작의 인기척에 이멜다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쾅―!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후작은 그대로 카리나를 바닥 위로 내팽개쳤다. 이멜다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카리나를 감싸 안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후작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말채찍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공기를 매섭게 가른 가죽 채찍은 그대로 이멜다의 얼굴 반편을 가로질렀다.
짜악!
단순히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한 고통이었다. 가장 먼저 연약한 입술이 터져나갔고, 이마의 상처가 다시 터지기라도 했는지 눈 안으로 핏물이 고였다. 이멜다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다짜고짜 시작된 매질은 그로부터 한 시간가량 지속됐다.
끔찍한 매타작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지경이었지만, 무력감에 몸을 떨지언정 분노로 팽배한 이성만은 공고했다.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구나! 이 괘씸한 것!”
후작의 외침에 이멜다의 눈꺼풀이 파들거리며 흔들렸다. 흐릿한 눈으로 잡아 뜯긴 머리카락 뭉치와 손등의 방어흔을 더듬어보던 그녀는 느릿하게 반문했다. 잘못이라니?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지?
이멜다는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물었다.
“잘못이요? 제가 잘못을 인정하면…… 무언가 달라지기라도 하나요?”
“뭐라?”
“제가 뭘 잘못했죠? 잘못을 해도, 잘못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각하의 기분 여하에 따라 만신창이가 되어야 했어요! 제게 죄가 있다면 아비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며 이멜다는 깊이 후회했다. 아무리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도 입을 다물었어야 했는데. 너무 맞아서 그런가. 정신이 가물해져서 그런가. 성격대로 대들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후작이 우악스럽게 손을 뻗어 머리채를 잡았다. 그대로 쓰러진 이멜다는 배를 가격하는 발길질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려야 했다.
“아악!”
“아, 아가씨……!”
흐릿한 이멜다의 시야 안으로 카리나가 몸을 떨며 우는 것이 보였다. 카리나는 서둘러 후작의 다리에 매달렸다.
“가, 각하! 제발 그만두세요! 아가씨를 치료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치료는 무슨, 치료할 필요 없다. 얼굴만 멀쩡하면 그만이니!”
그렇게 말한 후작은 그대로 카리나를 걷어찬 뒤 이멜다의 머리를 구둣발로 수차례 짓밟았다.
한밤중에 시작된 폭행은 이멜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은 후에야 겨우 끝났다.
분풀이를 끝낸 후작이 별관을 떠나자 달빛이 천천히 창문을 타고 별관 안으로 스며들었다. 야속할 만큼 밝게 스며들어온 달빛이 핏물로 점점이 수놓아진 폭행의 궤적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어스름한 빛은 꿈틀대며 경련하는 손가락 끝에서 멈춰 섰다.
그러길 잠시.
어느 순간, 가물한 정신으로 눈을 깜빡인 이멜다는 제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거렸다. 매질에 터져나간 입술이 매끄럽고 말랑하게 돌아와 있었다. 욱신거리는 몸은 그대로였지만, 얼굴만은 멀쩡했다. 지팡이에 맞아 생긴 이마의 상처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나았다.
카리나가 이능을 쓴 게 분명했다.
이멜다는 인상을 쓰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옆에 카리나가 쓰러져 있었다.
자신이 입은 상처를 고스란히 가져간 카리나의 얼굴은 엉망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그녀의 얼굴을 가로지르며 흘렀다. 입술은 다 터졌고, 뺨은 푸르게 올라온 매질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이멜다는 눈물을 쏟았다.
“흑. 흐읍…….”
흐느끼자 죽은 듯 눈 감고 있던 카리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눈을 뜬 카리나는 손을 뻗어 이멜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울지……마세요. 전 괜찮아요.”
“카, 카리나. 의원을 불렀어. 곧 올 거야. 왜…… 왜 그랬어! 그러지 말았어야지! 이제 더는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계속 이러다간 폭주할지도 몰라. 다신 눈을 뜨지 못하게 될 거라고!”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아가씨를 위해 폭주한다면…… 기쁠 거예요.”
다 터진 입술로 애써 미소 지어 보인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