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99)

84화

“지하를 통해 북부로 향하겠단 말인가?”

“네. 이대로 제도에 있어 봤자 하등 좋을 일 없을 거예요. 다들 말은 안 하시지만, 제가 일으킨 일로 인해 논란이 크리란 것도…… 짐작하고 있어요.”

“…….”

“북부에 있는 기사들에게 명하세요. 샤먼을 찾아 대기시켜 놓으라고. 그리고 사람을 보내서 이븐을 불러와 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도움을 청한다고 하면 아마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어쩔 생각이지? 그녀도 그대의 세계로 데려갈 생각인가?”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이븐이 원할지도 모르겠고요. 문제는 황녀 전하와 삼황자 전하가 저를 추격할 거란 건데……. 반응을 봐선 각인을 한다 한들 순순히 보내주시지 않겠죠?”

“각인?”

공작의 반문에 지안은 도르륵 눈을 굴렸다. 그가 각인에 대해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실제로 공작은 그간 단 한 번도 각인을 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조르지 않았다. 에스퍼라면 한 번쯤 운을 떼 볼 만도 한데 말이다.

반쯤 확신했으면서도, 지안은 굳이 되물었다.

“모친이 가이드시잖아요. 모르셨나요?”

“모른다.”

“각인을 하면 가이딩 없이도 폭주할 걱정 없이 힘을 사용할 수 있어요. 지나칠 정도가 아니라면요. 다만…….”

지안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껏 각인이란 방법을 숨겨온 건, 더는 가이딩이 필요하지 않게 된 에스퍼가, 말인즉 공작이 돌연 태도를 바꿀지도 모른단 불안 때문이었다.

각인 후 그가 더는 아쉬울 것 없다는 듯이 굴면 어쩐단 말인가?

물론, 그간 지켜본 공작은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 속은, 열어보기 전엔 모르는 법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염려스러운 건, 차원을 넘는 순간 각인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추측 때문이었다.

가이드와 에스퍼간의 각인은 전적으로 가이드의 의사로 이루어지고 끝난다. 이외엔 아직 각인에 대해 제대로 밝혀진 게 없었다. 각인은 각성자 협회에서도 연구를 끝마치지 못한 미지의 분야였다.

그나마 알려진 거라곤 가이드가 죽을 때 각인이 파괴된다는 것, 혹은 가이드 쪽에서 일방적으로 각인을 파괴할 수 있으며, 그 여파가 심할 경우 에스퍼가 사망할 수 있다는 것뿐.

이후로는 각인에 대해 제대로 밝혀진 게 없었다.

하지만 차원을 넘기 전, 협회에서 발표한 뉴스를 봤다. 관심을 두고 보지 않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에스퍼가 게이트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을 시 각인이 불안정해져 파괴된 경우가 있다고 했던가.

지안이 염려하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차원을 넘어서도 각인의 효과가 지속될까? 차원을 넘는 순간, 나는 이 세계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각인이 파괴되는 건 아닐까? 혹은 시공의 뒤틀림이 각인에 영향을 주진 않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지만, 사람 목숨을 가지고 실험을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작과 삼황자 전하, 황녀 전하를 내내 마음에 걸려 했으면서도 각인을 꺼린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공작의 모습에 지안은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각인이 파괴되면…… 사망할 수도 있어요.”

“그렇군.”

놀라긴커녕 덤덤히 수긍하는 악시온의 눈빛에 지안은 얼른 본래의 용건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건 가능한 최후의 수단으로 두려고요. 삼황자 전하에게는… 함께 북부로 가 달라고 다시 제안해보겠지만, 이미 거절당한 적이 있어서 큰 기대는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만일 또 거절당한다면, 몰래 도망가는 수밖에요.”

“땅 아래서 이동하면 더더욱 추적을 뿌리치기 어려울 거다. 분명 이동이 느려져서…….”

“알아요. 그래도 지하를 통해 이동하면 절 붙잡으실 순 없을 거예요. 땅에다 대고 삽질을 하든, 곡괭이질을 하든, 제가 있는 곳까지 닿지는 못할 테니까요. 우리는 얼음산까지만 가면 돼요. 그 뒤에 기회를 노려요.”

“내게 이 계획을 털어놓는 건, 어째서지?”

“그야. 같이 가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왜요? 설마 그사이 마음이 바뀌셨나요?”

“바뀌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함께 가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반색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북부를 외면한 채 떠나야 하리란 사실이 괴롭긴 하나. 가이드 없는 비참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여태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지안이 삼황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어쩌나 전전긍긍해 왔지 않았나.

그녀가 황녀와 친분을 쌓아나가는 것도 불안했다. 척박한 북부보다는 제도의 황성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더 안락하다.

스스로 거부해서 그렇지, 원하기만 하면 지안은 언제든 황실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악시온은 지안이 마음을 고쳐먹고 제도에 남으려 해도 별수 없다고. 내심으론 그렇게 여겼다. 동시에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제가 북부를 버리게 되는 건 마찬가지니, 제도에 거처를 두고 지안의 근처를 맴돌며 지내면 되지 않겠나, 하고.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지안이 택한 건 자신이었다.

“수소문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당장 사람을 보내겠다.”

“되도록 빨리 이븐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간혹 이런 식으로 밤늦게 찾아뵙게 될지도 몰라요. 삼황자 전하의 눈을 피해서요.”

그 말에 늦은 밤 남몰래 제 방에 찾아드는 지안의 모습을 상상한 악시온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촛불을 밝히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주변에 빛이 있었다면 벌게진 얼굴을 그녀에게 꼼짝없이 들켰을 것이다.

지안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조잘거렸다.

“오늘은 운이 좋아서 아무 소란 없이 공작님 침실에 숨어들 수 있었지만, 늘 이렇게 운이 좋을 순 없을 거예요. 보초병이 삼황자 전하나 황녀 전하의 기사인 날엔 올 수 없을 테니 그때는 필담으로 대신해요.”

그 말에 악시온은 조금 아쉬워졌다. 야간 보초를 서는 자들을 모두 자신의 기사들로만 꾸리고 싶을 정도였다. 달콤한 밀회를 조금이라도 더 이어가고 싶어 애가 닳았다. 물론, 지안이 알 바는 아니었다.

“몰래 전할 쪽지가 있다면 화병 밑에 놔두세요. 하루에 세 번 확인할게요.”

“그럼 다음에 다시 여기 오는 건….”

“보초 순서대로라면 대략 3일 후 정도겠네요. 그땐 가능한 한 방문은 잠그지 않으셨으면 해요. 괜히 노크를 해서 삼황자 전하를 깨우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명심하세요. 잠결에 하는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셔야 할 거예요.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고의란 거 아시죠?”

“내가 잘못했다.”

“좋아요. 할 말은 이걸로 끝이에요. 그럼 전 돌아가 볼 테니 주무세요.”

“잠시만…… 잠깐만 기다려.”

다급히 붙잡아오는 공작의 말에 지안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불쾌했나?”

그렇게 말하며 악시온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불쾌했냐니. 당연히 그랬겠지! 이런 멍청한 질문을 질문이라고 하다니!

흔들리는 그의 파장에 지안은 가볍게 한숨을 삼켰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파장 때문이 아니더라도…… 침구를 움켜쥔 공작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공작의 성격상 악의적으로 저지른 짓이 아닐 테고. 가이드에 눈 돌아가는 에스퍼 특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문제가 될 일도 없었고 중간에 정신 차렸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공작이 없으면 기껏 결심한 일도 죄다 물거품이 될 테고….

다만,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줄 필요는 있을 것이다.

“유쾌하진 않았죠. 다른 사람이었다면 머리에 물 좀 끼얹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거예요. 공작님이라…… 그쯤에서 봐 드린 거예요.”

뜻밖에 너그러운 말투였다. 악시온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지안을 올려다보았다.

“……용서해 주는 건가?”

조심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덩치 큰 남자가 저자세로 나오는 것에 대한 로망 같은 게 내게 있었던가?

그래. 아마 있는 것 같다.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괜스레 뺨이 달아올랐다. 어쩐지 간질거리는 속내를 숨기며 지안은 새침히 답했다.

“용서를 운운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 말은…….”

“그러니까 제 말은, 싫지 않았다고요.”

첫 만남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지만, 가이드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게 만들어 준 첫 에스퍼다. 애착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처음에는 위협적으로만 느껴지던 덩치도 계속 보다 보니 조금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에게 마음이 흔들렸다. 공작은 신전에 몰려든 에스퍼들을 가이딩하려는 날 붙잡고 말리다가도 결국엔 나를 지지하는 것을 택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게 그대의 뜻이라면, 나 역시 함께 감당하겠다.’

불시에 파고드는 그 말에 경계가 허물어졌다.

어쩌다 가이드였던 모친을 죽이게 된 건지, 남겨질 북부는 어떻게 할 건지, 알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 태산 같았지만 당장은 그 말로 충분했다.

그를 믿고 싶었다. 마음에 걸린다고 다그쳐 물을 만한 사안도 아니지 않은가. 의문이 있다면 차근차근 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런 속내를 공작은 조금도 모르겠지. 물론 그는 접촉으로 감정을 읽으니 가볍게 손가락 하나만 닿아도 대부분 다 알게 되겠지만…….

단순히 손가락 하나만 닿기엔 밤이 너무 깊고 아득했다.

지안은 홀린 듯 희미하게 드러난 공작의 얼굴 윤곽을 바라보았다. 찰나간 방 안으로 달빛이 비추자 그의 입술이 실루엣처럼 드러나 보였다.

그것을 본 지안은, 충동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쪽.

가볍게 입 맞추며 지안은 작게 소스라쳤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무언가, 등을 떠밀린 기분이었다. 그것은 마치, 어떤 당위성처럼…… 그래야만 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지안은 빠르게 동요를 숨겼다. 제가 먼저 기습하듯 입을 맞춰놓고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그럼 알아들으셨으리라 믿고, 그만 돌아가 보겠어요.”

“기다려.”

“이번엔 또 왜…….”

지안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뺨을 감싸쥔 손바닥 때문은 아니었다. 공작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의문과 동시에 입술 위로 말캉한 것이 닿았다. 처음의 삼켜지는 듯했던 키스와는 결이 다른,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공작이 몸을 일으킬 때마다 점점 턱이 들렸다.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하고 선 지안은 저항 대신 두 눈을 감았다.

얕은 숨소리와 함께 입술을 떨어뜨린 악시온이 말했다.

“앞으로는 공작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다.”

“……지구로 돌아가게 되면, 그렇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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