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별관 근처까지 끌려왔음을 확인한 이멜다는 차가운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이만하면 아버지의 사용인들도 충분히 속았을 터. 내 발로 걸을 테니 그만 놓도록.”
그 말에 그녀를 끌고 가던 기사들은 서둘러 이멜다를 부축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가씨. 뺨은 괜찮으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난 괜찮아. 나보다는 카리나에게 더 필요할 거다. 젠장, 참았어야 했는데……. 이래선 카리나가 또…….”
이를 악물며, 이멜다는 카리나를 떠올렸다. 늘 제 상처를 대신 짊어지고 있는 그녀를.
여태 후작의 학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던 건 증거가 없어서였다. 세간의 사고방식도 이에 한몫했다. 비록 몇몇 귀족들이 놀란 얼굴로 후작을 말리려 들긴 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딸을 아버지가 훈육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훈육과 학대는 다르다.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때리는 걸, 어떻게 훈육이라 할 수 있나? 심지어 일주일이 멀다 하고 반복되는데.
하지만 사교계의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그토록 얻어맞았는데도 겉으로 드러나는 팔과 얼굴만은 늘 멍 하나 없이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모두 치유 능력자인 카리나가 자신의 상처를 가져가 주어 가능한 일이었다.
울분을 삼키는 이멜다의 모습에 기사, 말릭과 도미니크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자리에선 후작의 명을 따르는 척하며 이멜다를 끌어냈지만,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그녀의 심복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주인인 이멜다는 수완 좋고 영민한 이였다. 흔히 사교계의 꽃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질적으로 후작가의 크고 작은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모두 그녀였고, 공작 부인의 사망 후 가문 내부를 다스리는 것도 전부 그녀의 몫이었다.
그들이 알기로, 이멜다는 이런 취급을 받아도 좋을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에를랑겐 후작가가 가문의 영예를 이만큼이나 훌륭하게 유지시켜 온 것도,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의 구심점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그녀의 공로 아닌가.
제도의 콧대 높은 귀부인들도 한 수 접고 대우해 주는 영애가 바로 이멜다 에를랑겐이었다.
하지만 가문 내에서의 그녀는, 완벽한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 * *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던 황녀 전하가 발걸음을 끊은 지 2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택을 찾아온 능력자들이 몰래 담장을 넘으려다 발각된 것도, 나를 찾으며 저항하다 경비대에 넘겨지는 소란도 벌써 수차례다.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은 이미 한참 넘어섰다. 시름에 찬 얼굴로, 지안은 이 사실을 인정했다.
이제 와서 그날 신전으로 외출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건 그닥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색하는 것이었다.
사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지구로 돌아가는 걸, 조금도 포기하지 못하지 않았나.
여기에 더해 그 수많은 에스퍼들을 나 혼자 감당할 수도 없다. 매일같이 가이딩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부 각인을 할 수도 없다.
재각성하며 제한되어 있던 각인의 한계가 풀렸단 걸 인지하긴 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조차 한계가 있을 것이다. 끽해야 열 명 정도 각인하고 그칠지도 모른다.
백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에스퍼들의 아귀다툼이 그린 듯 눈앞에 빤히 보였다. 어떤 선택을 해도 최악이라면, 그중에 차악이라도 골라내야 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골라낸 선택지는 끝내 비겁해지는 것. 지구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지안은 가라앉은 눈으로 밤이 오길 기다렸다. 공작과 남몰래 대화를 나누려면 삼황자가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미리 낮잠도 푹 자 둔 참이었다. 덕분에 밤이 깊어졌음에도 지안의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삼황자가 잠들었는지 어떤지 따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파장이 몹시 차분해지길 기다리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일리아스의 파장을 수차례 확인하고도 불안해서, 지안은 그로부터도 한참을 더 기다린 뒤에야 움직였다.
공작의 옆 방으로 몰래 건너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침실 양옆에 공작과 삼황자가 거주하고 있었으니까.
보초병이 있긴 했지만, 오늘 밤 보초를 서는 자들은 모두 공작님의 기사들이다. 그들이라면 분명 보고도 못 본 척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오늘 낮 헤롤드에게 슬쩍 쪽지도 던져두었다. 그가 쪽지를 주워 읽는 것까지 모두 확인했기에, 지안은 보초를 서는 기사들이 자신의 행동을 모른 척해 줄 것이라 확신했다.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고, 다행히 공작의 방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막힘 없이 공작의 침실에 발을 디딘 지안은 조심스런 걸음으로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공작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혹시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싶어 지안은 슬쩍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손목이 덥석 잡힌 지안은,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 안으로 풀썩 넘어졌다.
“헉!”
잔뜩 놀라긴 했으나 비명을 지르는 불상사는 없었다. 전신을 단단히 구속하는 힘에 지안은 바르작거리며 악시온의 가슴팍을 짚어야 했다.
“고, 공작님.”
“그대가 내 침실엔 어쩐 일인가?”
그 말과 함께 악시온의 코끝이 지안의 코끝에 문질러졌다. 호선을 그린 입술이 불시에 가까워지더니 이마와 뺨 위로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지안은 짧게 헛숨을 들이켰다. 잠깐 사이 여러 번 공작의 입맞춤을 받아야 했던 탓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심각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차마 악시온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밀쳐낼 수 없어 지안은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그만 멈추란 신호였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짝, 손바닥을 핥아오는 감촉에 지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할짝임 한 번으로 지안의 반항을 무력화시킨 악시온은 내적 비명을 지르는 지안의 입술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
서둘러 그의 어깨를 내려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아랫입술이 가볍게 깨물리고 어느새 침범해온 혀가 치열을 훑었다. 질척하게 타액이 얽히고 호흡이 먹혔다.
“읍! 흐읍!”
공작의 몸 아래 단단히 결박당한 탓에 애써 버둥거린 움직임은 죄다 침대에 흡수되고, 설상가상으로 점점 호흡이 가빠져 왔다. 거친 입맞춤에 서로의 코끝이 비벼질 때마다 분노인지 설렘인지 구별할 수 없는 감정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점점 몽롱해지는 정신을 인지한 지안은 약하게 기운을 방출해냈다. 그러자 공작의 키스가 차츰 느릿해졌다.
어깨를 잡고 밀쳐내자 순순히 몸을 물린다.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한밤중의 예고 없는 불청객은 제 쪽이었다. 게다가 몽롱한 듯한 그의 얼굴을 보니 제정신으로 저지른 짓 같지도 않았다. 지안은 차오르는 화를 눌러 참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공작님. 정신 차리시고 저랑 대화 좀 해요.”
“싫다.”
“……뭐라고요?”
“깨고 싶지 않다.”
슬픈 얼굴로 대답한 악시온은 그대로 지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 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잠깐!
쪽쪽거리며 귓가를 간지럽히던 입술이 차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지안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순히 물러나기에 잠에서 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지안은 팔을 뻗어 간신히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주전자를 휘둘러 공작의 머리를 가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소음이 크겠지. 지안은 쇄골 아래로 닿아오는 입맞춤을 애써 무시하며 악시온의 머리 위로 주전자를 기울였다. 졸졸 흐른 물이 공작의 머리와 턱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다행히도 물주전자가 절반쯤 비자 악시온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지안은 그제야 공작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무슨…….”
“이젠 잠이 좀 깨셨나요?”
“…….”
“정신 차리셨으면, 그만, 제 위에서, 비켜 주세요.”
한 음절씩 살벌히 씹어 말하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그제야 제가 지안의 위에 올라타 있다는 걸 알았다. 후다닥 몸을 일으키는 공작의 모습에 지안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공작은 차마 이쪽을 보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마른 수건을 가지고 왔다. 지안은 그제야 제 가슴께가 공작의 머리에서부터 흐른 물로 젖어 안이 살짝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없이 수건을 받아든 지안은 물기를 닦으며 아직 쿵쿵대는 심장을 수건으로 꾹꾹 눌렀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다행히 아직 삼황자의 파장이 조용했고 큰 소음이나 소란도 없었다. 화를 내는 건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지금은, 필요한 대화를 마친 후 빨리 돌아가야 한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 상황을 숨기는 것.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이것뿐이다.
“삼황자 전하 몰래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드, 듣겠다.”
“아시다시피. 더 이상은 제가 가이드인 걸 숨길 수 없게 돼 버렸어요. 일전에 황성에서 도망치던 날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제가 살던 곳으로 따라가겠다고 하셨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으신 거겠죠?”
“없다.”
“좋네요. 제 계획은 이래요. 그간 이븐이 세 차례인가 저를 찾아왔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도움을 구하고 싶어요.”
“…그건 누가 말해주던가?”
“헤롤드가요.”
순식간에 헤롤드의 인생을 진창에 빠뜨린 지안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를 노렸던 이동 능력자는 까마귀를 다뤄요. 짐작이지만 까마귀를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얻고 있겠지요.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이동은 사실상 무리예요. 어디로 가든, 어떤 변장을 하든 들통날 확률이 높으니까요. 하지만, 지하에서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