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틀린 말은 아니로군요. 신전의 속셈이야 뻔하지요. 어떻게든 그 여자와 줄을 만들어두려는 걸 겁니다. 능력자들이 그 여자를 원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잘만 하면 능력자들을 제 입맛에 맞게 부려먹을 수 있을 테니 이 얼마나 큰 이득이겠습니까? 조금 더 멀리 보자면…… 그들로선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 여자를 어떻게든 성녀로 포장시키려 들 법도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포장 말입니다만, 신전에선 이미 그 여자를 성력 없는 성녀라고 부릅니다. 에다께서 직접 축복한 여인이란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더군요.”
“성축일에 일어난 이적으로 신전의 세력이 활기를 얻긴 했지요.”
“듣고 보니 참으로 공교롭군요. 소문이야 사제들끼리 말을 맞추면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하필 이 모든 소문의 주인공이 연회장에서 소란을 일으킨 그 여인일 줄이야……. 당황스럽군요. 고작해야 추문의 주인공인 줄로만 알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요?”
황망함을 드러내는 셀스하임 백작의 말에 반대편에서 가만히 경청하던 제라드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 자리에 모인 다른 이들과 달리 소문을 조금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
“가정이긴 합니다만, 황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에 있었던 소란은 단순한 치정 싸움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공작도 삼황자 전하도 능력자이니. 우리가 모르는 것을 진작 느끼고 다툼을 벌인 걸지도 모를 일입니다.”
“…….”
백작의 말에 연회에 참석해 직접 상황을 목격했던 자들 모두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벌인 일치고는 공작과 삼황자의 대처가 과했다.
저마다의 생각으로 입을 다문 귀족들을 향해 제라드 백작이 말했다.
“바로 그 여자 때문에 황태자궁이 불탔다는 소문도 있지 않습니까.”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황태자궁을 불태운 삼황자 전하의 과격함은 용서받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폐하의 비호가 없었다면 삼황자 전하는 아마 지금처럼 전하로 불리지도 못했을 겁니다.”
“으음. 그건 그렇지요…….”
“이쯤 되니 각하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에를랑겐 후작 각하께선 이 일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오가는 논의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에를랑겐 후작은,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이자 짐짓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그 여자가 능력자들을 다룰 중요한 열쇠가 되리란 사실이지. 공작과 삼황자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한 저택에 거주할 정도로 절실한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정계에 오래 몸담아 삼황자의 성정을 익히 아는 후작이기 때문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 후작 각하께서는 그 소문이 진실이라 보고 계신다는 거군요.”
“적어도 그편이 아귀가 맞지. 그리고 우리에게도 분명한 이득이 될 것이고. 생각해 보게. 그 여자만 확보하면, 우리가 보유한 능력자들도 더는 하루살이마냥 죽어 나자빠지지 않을 거네.”
“…확실히, 잘만 하면 능력자로 이루어진 무력 집단을 운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공작과 삼황자가 끼고 도는 여자를 무슨 수로 손에 넣는단 말입니까? 신전의 방해도 분명 만만찮을……,”
“황실에 편입시키는 것은 어떤가?”
“네? 그 말은…….”
“삼황자나 공작을 대적할 위치에 계신 분이 바로 황태자 전하 아니신가. 일개 평민 여자지만, 기적을 일으켜 보였으니 황태자비로 추대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 우리 모두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쪽이니 우리가 선점하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지 않겠나?”
“저…… 후작 각하. 좋은 의견이십니다만, 폐하께서 그 여자와 삼황자 전하의 약혼을 허락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갑자기 황태자비라니요?”
제라드 백작의 말에 응접실에 모인 귀족들 절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의 주장은 너무 과격했고,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무엇보다 황태자비의 자리는 후작의 딸. 이멜다 영애의 것이었다. 이는 후작저에 모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니 차마 지적할 수가 없었다. 제라드 백작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후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여자는 연회장에서 보란 듯 삼황자에게 면박을 주었고, 공작과 도망치기까지 했지. 당사자 간의 동의 없는 약혼이었단 걸 이미 폐하도 아실 텐데. 무슨 걱정인가?”
대담한 후작의 답변에 제라드 백작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그렇지만, 각하.”
“물론 폐하께서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겠지. 하지만 우리도 아는 그 여자의 쓸모를 폐하라고 모르시겠는가?”
“…….”
“그 여자가 만일 신전의 손에 들어가거나 삼황자나 공작의 것이 되면 우리는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되네. 그렇다면 이보다 좋은 패는 없지. 세상에 황태자 전하를 거절할 여자는 없을 테니. 그리고 설혹 폐하가 반대하시더라도 이멜다가 있잖나. 이멜다라면 방법을 찾아낼 걸세.”
에를랑겐 후작의 말에 제라드 백작은 기막힌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후작은 정말 그의 딸이 순순히 황태자비 자리를 내놓을 거라 여기는 건가? 그 이멜다 에를랑겐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한편, 문틈 사이로 몰래 그 말을 엿듣던 이멜다는 흡!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입을 틀어막은 이멜다의 귀로 정기 모임에 참석한 노귀족들의 감탄사가 흘러들었다.
“과연! 탁월한 혜안이십니다.”
“동감입니다. 저로선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군요. 각하의 노림수가 실로 대단합니다!”
응접실의 모두가 후작의 주장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후작의 주장에 찬성한 이는 그와 아주 가까운 몇몇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멜다의 속이 뒤집히는 데는 그걸로도 충분하고 넘쳤다.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멜다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우뚝 선 채로 되뇌었다.
‘참아! 참아야 해! 카리나를 위해서라도 이래선 안 돼!’
하지만 발을 한번 내디디니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이멜다는 이성을 잃은 채 응접실 안으로 난입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젖힌 이멜다는 타오르는 눈으로 후작을 노려보았다. 정찬이 차려진 회의 테이블 위로 날카로운 외침이 내리꽂혔다.
“그건 제 자리입니다! 제게 황태자비의 자리를 약조하신 걸, 벌써 잊으셨습니까?”
“……이멜다.”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군요! 알레인 테리온을! 황태자를 유혹해 황후가 되라 하시더니! 이제 와 다른 사람을 황태자비의 자리에 세우시겠다니요? 저를 북부에 팔아치우려 했던 걸론 부족하셨습니까?”
“그런! 닥치거라!”
“닥치라니요? 입을 다물어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각하십니다. 애써 오데르겐 가와의 파혼을 성사시키고 황태자를 사로잡아 놓았는데. 이런 작당 모의를 해 제 뒤통수를 치십니까? 각하께선 정녕, 제가 이를 잠자코 두고 볼 것 같으십니까?”
이를 갈며 비아냥대는 이멜다의 모습에 후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제도의 귀족들이 죄다 보고 있는 앞에서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모임에 참석한 귀족들은 갑작스런 부녀 다툼에 민망스러운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모두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후작과 이멜다의 대치를 살폈다.
그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챈 후작은 씨근덕거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이멜다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악!”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당장 이멜다를 끌고 가라!”
후작의 호통에 달려온 기사들은 서둘러 이멜다를 부축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녀의 이마 위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분노에 찬 기세만은 조금도 꺾이지 않은 채였다. 기사들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로도 이멜다는 당당했다. 그녀는 한 번도 고개를 꺾어 본 적 없는 전사마냥 꼿꼿이 목을 들어 올렸다.
“각하. 에를랑겐 후작가의 가주로서 체통을 좀 지키시지요. 제게 얼마나 할 말이 없으셨으면 다짜고짜 폭력부터 쓰십니까. 차라리 사과라도 하시지요! 각하의 입은 장식입니까? 당신이 그러고도 아버지야?”
“이익! 닥쳐라!”
“아하핫! 연고도 없는 평민 계집애를 황태자비로 삼겠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짓인가! 마침 이 자리에 고매하신 가문의 가주들께서 모여 계시니, 저 이멜다 에를랑겐이 한 가지 조언을 해드리지요. 제가 아니더라도 황태후 폐하께서 이 일을 두고 보지 않으실 겁니다.”
서슬 퍼런 그 말에 후작의 뺨이 분노로 파들거렸다.
예고 없이 손을 높이 치켜올린 그는 그대로 이멜다의 뺨을 내리쳤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에게 이 행동은 건방진 자식의 훈육을 위한 정당한 폭력이었다.
짜악―!
충격으로 이멜다의 얼굴이 홱 돌아갔으나 후작의 분노는 여전했다. 그는 기사들을 시켜 비틀거리는 이멜다를 똑바로 서게 만든 후 연달아 뺨을 내려쳤다.
짝! 짜아악! 짜악―!
삽시간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보다 못한 제라드 백작이 나서서 후작을 말렸다.
“각하. 그쯤 하시지요.”
점잖게 만류하는 백작의 말에 후작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만하면 이멜다의 만행으로 입은 망신이 어느 정도 희석되었을 것이다. 축 늘어진 이멜다를 향해 혀를 찬 에를랑겐 후작은 사납게 소리쳐 명령했다.
“처분은 나중으로 미루겠다. 방에 가둬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멜다는 개처럼 끌려나가야 했다.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이멜다는 실소했다. 황녀의 앞에서도 고고하고 당당한 사교계의 꽃. 지체 높은 에를랑겐 후작 영애의 실상은 바로 이런 것이란 걸, 제도의 고귀하신 영애들은 과연 알까.
‘또 원점이야.’
아무리 버둥거리고 발악해도 후작가란 허울 좋은 새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황태자를 사로잡으면 이 지긋지긋한 후작가와 결별할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그조차 오늘을 마지막으로 산산이 조각났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그간 황태자보다도 폐하의 모친이신 황태후 폐하와의 친분을 더욱 돈독히 하려 노력한 보람이 있다.
황태후께선 명망 높은 브리켄 공작가 출신. 겉으로 드러내진 않으시나 신분의 고하를 명확하게 구별하시는 분이다. 출신도 모를 평민 여자가 황태자비 자리에 앉는 걸 두고 보실 분이 결코 아니셨다.
아버지가 뭘 어쩌든, 소득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계획이지만, 설혹 실현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없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