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한바탕 격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민망함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바로 그 민망함 위에 부스러기 같은 고마움이 남았다. 하찮은 만큼이나 소중한 그 감정을 지안은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그것은 삼황자의 빛나는 금안과 퍽 닮아 있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 창피함 따위를 주섬주섬 정리한 지안은 고개를 들어 일리아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물었다.
“다 울었나?”
“……네.”
훌쩍이며 답한 지안은 일리아스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오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기대서 울었던 것까진 기억하는데, 왜 그의 허벅지를 깔고 앉아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소 민망하고 친밀한 자세를 인식하고 나니 화악 얼굴이 붉어졌다.
“저, 그만 내려 주세요.”
“조금만, 이대로 있어라.”
“하지만…….”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지안은 버둥거리던 걸 멈췄다.
뒤통수에 삼황자의 손이 조심스럽게 닿아 왔다. 슬그머니 끌어 당겨진 지안은 결국 턱을 그의 어깨에 걸쳐놓아야 했다.
“잠깐이면 된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지안은 두 팔을 들어 일리아스를 껴안았다. 제 손 아래서 그의 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그에게 제대로 된 가이딩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수차례 거듭 도움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불퉁한 태도와 사나운 말씨를 문제 삼으며 멀리했다.
솔직하고 당당한, 거침없는 직진밖에 모르는 삼황자가 늘 부담스러워서. 한번 엮이면 돌이키기 힘들 걸 본능적으로 알아서. 가능하면 어떤 관계도 만들지 않으려고 늘 노력했다. 장점보단 단점을 먼저 찾았다. 단단히 벽을 쳤고, 외면했다.
그랬는데……. 삼황자는 고작 한숨을 봐 넘기지 못해서 나를 찾았다. 나는 외면했지만, 그는 외면하지 못했던 거다.
에스퍼의 구애에 껌뻑 넘어가는 가이드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스르륵 몸에서 힘을 뺀 지안은 기대어 안긴 채로 부드럽게 기운을 흘려 넣었다. 가이딩하며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낮에, 황녀 전하께서 너무 맞는 말만 하셔서 속이 좀 상했어요. 성력 없는 성녀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요.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찰나의 연민이야 사람인 이상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감정이고, 잠깐 도움을 주는 건 친절을 십분 발휘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생경한 세계에 외따로이 남는 일은, 상상해본 적 없다. 차라리 졸지에 불법체류자가 되어 버리거나, 여행 중에 여권을 소매치기당해 쩔쩔매는 게 이보단 나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수 있을까? 지안은 의문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좀, 가볍게 생각하려고요. 그냥,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돕는다 정도로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삼황자는 이미 가이딩에 푹 취한 채였다. 꽉 붙들어 안는 일리아스의 팔 힘이 조금 답답하고 버거웠지만, 지안은 이를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다. 전해져 오는 온기가 퍽 따뜻했으니까.
여태 위태로운 그의 파장을 느끼면서도 줄곧 외면해 왔다. 삼황자뿐만이 아니다. 최대한 아는 게 없어야 가벼운 마음으로 지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이외의 수많은 파장을 알면서도 모른 척 넘겼다.
하지만 그렇게 애썼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제도의 에스퍼 대부분을 가이딩해 주게 되었다. 정체도 탄로 나 버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물이 흘러가는 방향만이라도 조절하고 싶었다.
“적어도 눈앞의 사람은 도와주고, 모른 척 외면하지 않고, 그렇게. 거기까지만.”
죄책감과 번민에 충분히 흔들리고 나니 더욱 명확히 알겠다. 윤리의식에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가봤자 발목에 족쇄가 채워지기밖에 더 하겠는가.
“…하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마세요.”
이만큼 흔들리고도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뱃속에 돌을 채운 것처럼 버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도 실패로 끝났지만, 괜찮다. 지구로 돌아간다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잠깐은 힘들지 몰라도 천천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지안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삼황자는 고작 내 한숨을 외면하지 못해 날 찾았는데……. 나는 또다시 그를 외면하는구나.
어쩌면 지금 이 가이딩은, 도리어 그를 지옥으로 떠미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맹렬한 자기혐오와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악취에 지안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보고 싶지 않았던, 알고 싶지 않았던 스스로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바로 그 밑바닥에서, 저딴 게 무슨 가이드냐고 묻던 에스퍼들의 음성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 말대로다. 지구에서도, 이곳 위스로데 대륙에서도, 나는 여전히 반푼이 가이드였다. 최악의 가이드였다.
하지만 때로는, 비겁해지지 않고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 * *
주류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는 고만고만한 하위 귀족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사교계가 있다. 제도의 쟁쟁한 고위 귀족들 사이엔 낄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서로 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만들어진 그들만의 틈바구니가 있는 것이다.
작위를 구입한 아론은 훌륭히 그 틈바구니로 끼어들었다. 그의 새로운 이름은 펠릭스 그라이츠. 변방 출신의 자작으로 교역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들고 막 제도에 올라온 참이라는 설정이었다.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포장한 아론은, 제도의 대저택을 임대해 하루가 멀다 하고 호사스러운 파티와 살롱을 열어 착실히 제도의 귀족들과 안면을 쌓아나갔다.
잘생긴 얼굴과 매끄러운 언변, 그리고 적지 않아 보이는 금력까지. 제도의 고만고만한 귀족들, 그중에서도 돈이 아쉬운 자들은 꿀을 찾는 벌처럼 아론의 저택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돈 냄새는 언제나 향긋한 법이었고, 한 번이라도 아론의 저택에 방문한 자들은 자연스레 주변인들을 끌어들였다.
첫 시작은 고작해야 찌끄래기 준귀족이나 남작 정도였지만, 호화로운 파티를 거듭 열고 이리저리 돈을 뿌리기 시작하자 그를 찾는 귀족들의 작위도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차례차례 사다리를 오르듯, 아론은 고위 귀족들 몇몇과 알음알음 안면을 터 나갔다.
그중엔 황태자의 측근인 셀스하임 백작도 있었다. 물고기를 꾀어낼 미끼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론은 계획적으로 셀스하임 백작과 친분을 쌓아나갔다. 일부러 백작을 곤경에 빠뜨렸다가 돕기를 반복하며 백작에게 톡톡히 눈도장을 찍어두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제도의 능력자들이 보이는 동향을 파악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에다의 신전에서 정체를 드러낸 지안을 자신과 같은 능력자가 도중에 가로챌지도 모른단 불안감 때문이었다.
지안의 정체가 탄로 난 지도 벌써 보름이 넘어가고 있었다. 공작과 삼황자의 철통같은 방어가 아직은 깨어지지 않았지만……. 이에 반발한 능력자들이 조금씩 뭉치며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아직은 제대로 세력을 뻗칠 줄 모르는 어영부영한 집단이지만, 그 규모가 커지고 커져서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상대가 제아무리 상위의 능력자라 한들 꼼짝없이 그녀를 내어주거나 공유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도 지안을 내놓으라며 한 목소리를 내는 능력자들로 인해 이미 제도가 통째로 들썩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공작저를 완전히 뒤집어엎기 전에 여자를 납치해와야 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지.’
지금 당장은 파티장에 모인 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게 먼저였다. 아론은 탑처럼 높이 쌓인 유리잔 위로 샴페인을 터뜨려 보였다.
“그라이츠 자작!”
“기다렸네!”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좌중을 향해 눈웃음지은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환호하는 이들을 위해 술병을 기울였다.
꿀렁이는 소리를 내며 쏟아진 술은 빈 유리잔을 층층이 채우며 흘러내렸다. 샹들리에 빛을 받은 무수한 샴페인 잔들이 빛으로 세운 탑처럼 번쩍였다.
바로 그 탑 꼭대기에 올려진 샴페인 잔을 든 아론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향락을 즐기는 귀족들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모쪼록, 즐기시길.”
쏟아지는 환호와 경탄을 받으며 아론은 보란 듯 샴페인 잔을 비웠다.
가벼운 환각 작용을 일으키도록 제조한 술 덕분에 파티장의 분위기는 농밀하고 끈적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이성이 마비된 귀족들의 약점을 잡는 것은 아론에겐 무척 쉬운 일이었다.
이 같은 아론의 노력이 점차 결실을 맺어가고 있을 무렵,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도 논의가 한창이었다. 최근 제국에 일어난 큰 사건들 때문이었다.
곧 폭동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과열된 능력자들의 결집과, 제국민 모두가 목격한 이상 현상. 그리고 이 두 사건 모두 한 명의 여인과 관련이 있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에를랑겐 후작이었다.
“성력이 없다는 게 확인되었는데도, 신전에서는 그 여자를 성인 중 하나로 추대하려는 것 같더군.”
“으음. 무리도 아니지요. 보란 듯이 제도의 하늘을 뒤덮는 이적을 일으켰지 않습니까. 사제들이 그렇게 주장할 만도 합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당장 뭐 하나 제대로 증명된 것 없지 않습니까? 그저 뜬소문일 수도 있습니다. 능력자의 폭주를 진정시켰다니. 그게 그 여자의 힘이라는 건 신전에서 내세운 주장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주장이라니. 능력자들이 그 여자를 찾으려 혈안이 돼 있는 걸 보고도 모릅니까? 이미 검증이 끝난 일입니다. 그리고 후작 각하의 말씀대로라면 신전이 그 여자에게 꽤나 호의적이라는 건데, 저는 바로 그 점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마음에 걸린다고 해봤자. 기껏해야 명예 고위 사제직 정도 아니겠습니까? 무슨 이능을 가져서 이런 일을 벌인 건지는 몰라도…… 고작 능력자입니다, 능력자. 성력도 없다지 않습니까.”
베스티아 백작의 말에 곧장 반박이 날아왔다.
“그렇긴 합니다만, 신전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분명 뭔가 얻을 게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희가 먼저 점찍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