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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80/199)

80화

망설이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작은 널 말렸어! 너를 독점하기 위해서라도 네 존재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랬지. 당시 나는 공작이 왜 네게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어. 그저, 그가 너의 폭주를 걱정해 널 뜯어말리는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그것도 아니잖아. 아니었잖아!”

“그래서요? 폭주의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제가 모든 능력자들을 책임지기라도 해야 하나요? 전 그럴 수 없어요. 가능하지도 않고, 감당할 자신도 없어요. 그날 신전에서 나섰던 건…… 충동적으로 벌인 짓이었어요. 알량한 동정심일 뿐이었다구요.”

“바로 그 동정심에 기대 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어! 본래라면, 난 오라버니의 손에 죽임당했을 거야. 발현을 스스로 제어하고 진정시키지 못했다면 나는 여기 없었을 거라고! 그리고 난, 나는 제어하지 못했어! 터져 나오는 힘을 막을 수도, 누를 수도 없었다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네가 나타났지. 말해 봐, 지안. 나를 구한 것도 그런 마음이었어? 그런 마음으로 날 구했어?”

“…….”

“너는 선택을 마쳤어. 그 선택마저 스스로 매도하진 마. 네가 그러면…… 네게 구해진 사람들 모두 초라해지니.”

서글픈 목소리에 지안은 할 말을 잃었다. 이비엔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잊지 마, 지안. 너는 나를 구했어.”

“전하…….”

“네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지 몰라도, 내겐 아니었어.”

지안은 꾹 입술을 깨물었다. 격정과 떨림이 묻어나는 황녀 전하의 말이 긴 파문을 일으키며 심장에 틀어박혔다.

* * *

편해지려고, 단지 그것 때문에 익숙한 세계로 돌아가려 하다니…….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일차원적인 선택인가. 남겨질 사람들을 모두 외면하고 떠나는 건 그들을 예정된 죽음으로 떠미는 잔인한 결정이란 걸, 왜 모르겠는가.

“하…….”

지안도 알고 있었다. 나밖에 모르는 겁쟁이가 되는 건, 비겁한 일이라는 걸. 그렇게 비겁한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이 추구하는 그대로 행동하고 결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정말로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사람인데. 이토록 보편적인 인간인 내가 무슨 수로 용기를 낸단 말인가.

샘물이 차오르듯 용맹이 치솟는다면 지금보단 나았을까. 차라리 내가 무모한 사람이었다면, 좀 더 도덕적이고 올바른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괜찮았을까.

“후…….”

무표정한 얼굴로 지안은 거푸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라도 좀 도피해야 등 뒤로 바짝 추격해온 번민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술잔에 따라둔 술에 제 얼굴이 비치자 더는 그럴 수도 없었다.

두려웠다.

어떻게든 최악만은 피해 보자고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이를 비웃듯 최악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가장 바라지 않았던 상황을 모조리 합쳐낸 것 같은 현실은 공포 그 자체였다.

차라리 칼 든 살인마에게 쫓기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그건 그나마 대적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실체도 있고, 반항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신전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에스퍼들의 얼굴로 차례차례 변해가는 번민의 맨얼굴에 지안은 반쯤 미칠 지경이었다.

잊고 싶은 일은 그냥 잊어버리는 그런 사람이고 싶은데, 왜 나는 그걸 하질 못하나.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에스퍼들의 수많은 얼굴과 그들의 눈물이 화상처럼 기억에 남아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싸우기도 전에 나가떨어진 기분이었다.

실체 없는 것과 씨름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간 각성자 협회에서 꼬박꼬박 나오던 월급으로 놀고먹었던 걸 이렇게 되돌려 받는 건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출렁임과 함께 양껏 흘러내리는 술잔을, 지안은 힘없이 들어 올렸다.

그러나 잔이 입술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 빼앗아 들었다.

“그만 마셔.”

삼황자였다. 언제 거기 있었던 걸까. 들어온 줄도 몰랐다. 밤중에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가이딩인가?

그래. 그것밖에 없겠지. 폭주의 위험이 없단 걸 알았으니 이때를 기다렸단 듯 냉큼 요구해올 법도 하다. 지안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제게 용건이라도?”

대답 없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그의 손에 든 술잔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 사실상 빼앗았다기보다는 건네받은 것에 더 가까웠지만, 그녀는 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말이 없으시네요. 역시 가이딩 요구인가요? 막상 가이딩을 요청하려니 민망하셨나?”

어딘가 반쯤 자포자기한 듯한, 가시 돋친 그 말에 일리아스의 얼굴이 참혹히 무너졌다. 반듯한 눈썹이 비탈처럼 기울어지고 입매와 턱이 단단해졌다.

인내하는 삶을 살지 않았던 일리아스에게 지안은 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네게 최악의 인간쯤 되는 모양이군.”

“그렇게까진 아닌데. 보시다시피 제가 기분이 안 좋아서 친절히 대해 드릴 수가 없네요.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하시고, 없으면 가세요. 불필요한 무례는 저지르고 싶지 않으니까.”

“무례하든 말든 상관없다. 언제는 내게 안 그런 적 있었나? 네가 취했다는 걸 감안하여 걸러 듣지.”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푸스스 웃었다. 술주정뱅이에게 특히 더 가차 없을 것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그래도 웃으니까 마냥 무겁기만 하던 생각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태도를 보니 용건만 말하고 순순히 사라져 줄 것 같지도 않고……. 지안은 마음을 바꾸어 일리아스에게 물었다.

“후우……. 그래서 용건이 뭔가요? 말하세요. 듣고 있으니.”

“한숨.”

“네?”

“한숨 좀 그만 내쉬어.”

“……네?”

“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지금, 잠투정이나 하려고 날 찾아온 건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발칵 성이라도 냈겠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하……. 지금 그 말을 하려고…….”

차라리 가이딩 요구가 나았다. 지안은 어처구니를 생으로 씹어 삼키며 신경질적인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런 지안의 머리 위로 일리아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나?”

어딘지 조심스러운 그 물음에, 지안은 멈칫 굳었다.

“혹시, 위험을 피해 도망쳐 온 거라던가…….”

“그냥 사고였어요.”

“그렇군.”

조금도 믿지 않는 것 같은 목소리에 지안은 멋대로 오해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일리아스의 말이 먼저였다.

“네가 살던 곳이 궁금하다. 어떤 세계였는지. 내가 모르는 질서나 규칙이 있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하아?”

“마법서를 뒤져 차원이라는 개념을 찾아 보았는데, 신선한 이론이더군. 공간의 강제분절이나 다중 공간이론 같은 건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네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건 그럭저럭 알 수 있었다. 아마 너는, 위스로데 대륙의 유일한 이세계인이겠지.”

“…….”

“내가 너였다면, 외롭고 무서웠을 거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방황해야 하니까.”

“답지 않으시네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데요.”

“나는 위로 같은 건 잘 못해. 하지만 외로움은 잘 알지.”

“멋대로 넘겨짚지 마세요. 대체 제 어디가 외로워 보인단 건데요. 전 그딴 사치스런 감정, 느껴본 적 없어요.”

까칠한 말을 일리아스는 태연히 넘겼다.

“그럴지도. 하지만 홀로 하는 고뇌는 외로운 법이지.”

어쩐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지안의 동공이 가볍게 흔들렸다.

“일곱 살이었던가? 이능을 발현한 이후. 나는 5년간 탑에 갇혀 생활해야 했다. 그나마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하루 세 번, 식사를 가져다주는 순간뿐이었지. 어렸던 탓에, 이능을 조절하는 법을 그땐 잘 몰랐다. 주변의 모든 걸 불태워 없앨지도 몰라서 돌로 만들어진 탑에 갇혀 지내야 했는데……. 나는 그게 꼭, 돌무덤 같았다.”

차분한 목소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잠들 때마다 차라리 탑이 무너지길, 벽돌 아래 깔려 사라지길 간절히 바랐지.”

불행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일리아스는 마치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아닌 양, 동화 속 이야기를 읽어 주는 것마냥 조곤조곤 알려 주었다.

“괴로웠고, 힘들었다. 누구 하나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었지. 다들 내가 일으킨 불길을 두려워했거든. 덕분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꼬맹이였다. 몇 년간 그랬던 것 같다. 세상에 원망스럽지 않은 게 없었지.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분노하게 한 건 나를 탑에 가둔 폐하도, 탑에 가두어둬야 한다고 주장한 자들도 아니었다.”

덤덤한 그의 다음 말을, 지안은 왠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나를 화나게 한 건, 이능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주변을 다 태워 먹는 나 자신이었다.”

“그건, 전하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군. 나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과거엔 아니었지.”

씩 웃어 보이는 미소가 그답지 않게 서글프고 아렸다.

“내 잘못이 아니란 걸 알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자라서……. 여기까지 왔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너를 만나서……. 살아 있어서.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

“너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러니 더는,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 아무도 너에게 능력자들을 구제하라 강요하지 않는다. 있다면 미친 자의 헛소리일 뿐이다. 알겠나? 그 누구도 네게 그럴 수 있는 권한을 가지지 못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 자신뿐이다.”

그렇게 말하며, 일리아스는 손을 들어 지안의 뺨 위로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미 다 잊어버린 기억을 끄집어내 나열한 것뿐인데, 지안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고 있었다.

“네가 더는 한숨 쉬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니 뭐라도 말해 봐. 내가 네게 공감할 수 있도록. 어떤 곳에서 살아왔는지. 어떻게 자라왔는지 내게 말해 줘. 말하면서 조금은 시름이 덜어질지도 모르잖나. 가족은 있나? 아니면 친구는?”

지안은 입술을 달싹였다. 삼황자의 질문에 대답하려 했는데, 입 새로 힘 빠진 신음만 볼품없이 새어 나왔다. 목이 메어 버린 탓이었다.

목구멍 어딘가가 꽉 틀어막힌 듯, 성대가 움직이질 않았다. 슬픔을 먹고 부풀어 오른 혀가 돌처럼 기도를 막아서 지안은 꺽꺽대며 울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삼황자의 손이 연신 눈가를, 뺨을 훑었다.

접촉은 조심스럽게 늘어났다. 어깨를 다독이던 손은 어느새 등을 토닥이고 있었고. 얼굴은 삼황자의 가슴에 파묻힌 채였다.

들썩이는 지안의 어깨를 일리아스는 가만히 감싸 안았다. 단단한 품속에서 지안은 몸부림치듯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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