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타인이라니? 나는 너를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알아요. 저 역시 전하를 소중히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저희가 서로를 친근하게 여길 때나 유효한 관계인 거죠. 예를 들어. 제가 사기꾼처럼 전하의 재산을 빼돌린다거나 도둑질한다면, 전하께선 제게 화내셔야 해요. 그렇죠?”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는 거야?”
어린아이에게나 할 법한 말 하지 말라며 투덜대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차분한 얼굴로 황녀의 손등을 덮었다. 그러나 친애를 표하는 듯하던 손길은 이내 돌변해 이비엔의 반지를 빼갔다.
보란 듯 반지를 갈취해 낸 지안은 부러 뻔뻔한 얼굴을 한 채 이비엔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이비엔이 화를 내거나 반지를 돌려달라고 하는 일은 없었다. 있는 거라곤 난처함, 망설임, 갈등을 거쳐나가는 눈빛뿐이다.
“왜 화내지 않으세요?”
지안의 질문에 이비엔은 난생처음 바보처럼 답했다. 정답을 뻔히 알고도 오답을 택하게 되는 경험이란 무척 기이했다.
“그야…… 화내고 싶지 않으니까. 가지고 싶으면 줄게. 가져.”
그 말에 지안은 작게 한숨 쉬며 이비엔의 손가락에 다시금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젠 이해하시겠죠. 제가 가이드란 이유로 자진해서 약자의 위치에 서시면 안 돼요. 제게 어떤 감정을 느끼건, 일종의 현상일 뿐이란 걸 자각하셔야 해요. 무턱대고 저를 우선하셔선 안 돼요. 알고 계시겠지만, 어떤 순간이든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에요. 지구의 모든 능력자들은 이와 비슷한 교육을 받아요.”
교육받는다고 고쳐지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개선은 되는 법이다. 거창하게 줄여 말했으나 사실 협회에서 하는 교육도, 가이드에게 너무 절절매는 건 에스퍼에게도 안 좋다는 걸 여러 자극적인 사례로 엮어 강의하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충격요법이랄까. 그마저도 운명적으로 가이드와 만났다고 믿는 에스퍼들에겐 잘 통하지 않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지안은 고개를 돌려 삼황자를 바라보았다. 사실, 황녀 전하보단 삼황자에게 이 사실을 보다 자세히 말해 주고 싶었다.
“전하께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절 향한 호감이 정말로 저라는 사람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고통을 진정시켜주는 가이드를 향한 것인지를요. 제가 살던 곳에선, 가이드의 인간성에 거듭 실망하면서도 단순히 그 사람이 가이드란 이유로 매달리다 불행에 빠지는 능력자가 적지 않아요.”
“나를 의심하는군. 그게 내 고백에 대한 답인가?”
그 외침에 황녀와 공작이 나란히 일리아스를 돌아보았다. 황녀는 뜻밖의 사실에 흥미진진해 했으나, 공작의 표정은 분노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애석하게도 지안에겐 악시온을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가 네게 품은 감정을 함부로 재단하지 마!”
“전하.”
“확신이 부족했다면 다시 말하지. 널 사랑해. 그러니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내 감정을 매도치 마. 나는 대답을 원해! 네가 가이드라서 그렇다는 핑계가 아니라!”
진정은커녕 더욱 격렬히 튀어나온 고백에, 지안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얼굴로 일리아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능만큼이나 뜨겁고 선명한 감정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전하. 저는…….”
“언질 하나 없이 약혼을 꾸민 건 내 잘못이었지. 하지만 지금 네 말을 들으니 그때 했던 사과를 철회하고 싶군. 이것만은 알아 둬. 가벼운 마음으로 너와의 약혼을 계획한 건 아니었어.”
“…….”
“……내가 또 너를 불편하게 만들었군.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비엔을 통해 전달받지.”
말을 마친 일리아스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지안은 당황스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차마 삼황자를 따라가 붙잡지도, 그렇다고 의자에 앉아 있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섰다. 보다 못한 이비엔이 지안의 어깨를 눌러 그대로 내려앉혔다.
“고백을 받아 줄 게 아니라면 내버려 둬.”
“하지만…….”
“어차피 불편해진 관계잖아? 저런 멋없는 고백 따위 받아 주지 않아도 괜찮아. 꽃다발 하나 없이 대체 무슨 행패람. 저런 건 고백이 아니라 폭력이야. 사람 곤란하게 만들기나 하고 말이야.”
이비엔의 말에 지안은 제가 느낀 파장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고백이 아니라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의 파장 때문에 더 안절부절못했단 걸,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황녀가 말했다.
“뭐, 그래도 내 눈엔 공작보단 오라버니가 더 나아 보이긴 하는군.”
편파적인 말에 지안은 난처히 웃어 보였다. 팔은 원래 안으로 굽으니 황녀 전하가 짐짓 저리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지안의 기색을 읽어낸 이비엔은 자신의 말에 근거를 더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단순히 내 오라비라 편드는 게 아니라, 오데르겐가의 남성과 결혼한 여자들 대부분이 불행했기에 하는 말이야. 공작의 모친도 비극적으로 죽었지.”
비극적으로 죽다니? 황녀의 말에 지안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악시온이 험악하게 경고했다.
“더는, 말하지 마십시오.”
억눌린 목소리에 이비엔은 차갑게 웃어 보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슬쩍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역시 지안에겐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 오데르겐 전 공작 부인은 참으로 불쌍했지. 아들의 손에 죽임당했으니 말이야.”
“네?”
들으란 듯 일러주는 황녀의 말에 지안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스퍼가 가이드를 죽인다니……. 그럴 리가…….”
그래, 그럴 리 없다. 세 번째 가이드였던, 공작의 모친인 그녀가 공작님에게 살해당했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놀라 공작을 돌아보자 무참히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지안과 시선을 마주친 악시온은 서둘러 해명하려 했다. 어릴 적 있었던 일이라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독약의 전달책으로 이용당한 것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 채로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무력하고 멍청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해묵은 기억들이, 잊으려 노력했던 모든 순간들이 끔찍이 되살아났다.
비극의 잔재 앞에서 악시온은 불 앞의 촛농처럼 무너져내렸다. 논리적으로 사정을 설명할 이성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삐걱이는 정신으로 그는 간신히 변명했다.
“……오해다. 그건, 사고였다.”
초라한 변명에 이비엔은 기다렸단 듯 실소를 날렸다.
“설명은 그게 다인가? 하여간, 잘 생각해 봐, 지안. 공작과 함께 북부로 따라나서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그도 그럴 게, 눈보라 치는 북부에선 고립되기 딱 좋잖아? 무슨 일이 생겨도 도움을 구하기 요원한 곳이기도 하지.”
지안은 짐짓 입을 다물었다. 만약 누구 한 사람이 고립된다면 그건 제가 아닌 공작이 될 터였다.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지구행을 택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나 차마 이 사실까진 말할 순 없었다. 차라리 공작님과 눈이 맞아 북부로 돌아가려 하는 것처럼 비치는 게 낫지. 지구로 돌아갈 예정이라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고라고 말했으니 무언가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겠지. 차마 캐묻지 못하고 악시온의 파장만으로 어림짐작하는 지안에게 이비엔이 물었다. 가벼운 공황에 빠져 있는 공작의 모습은 황녀에겐 관심 밖의 문제였다.
“그보다, 앞으론 어쩔 셈이지? 이제 제도의 능력자 대부분이 네 얼굴을 알아.”
지안은 대답을 미룬 채 공작의 손을 잡아 그를 진정시켰다. 특성을 개화시킨 그라면 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악시온은 잠시 후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 지안과 눈을 맞춰 왔다.
“……황녀 전하께서 흥분하신 것 같으니 나는 잠시 자리를 비키도록 하지.”
“감사해요.”
아직 그의 파장에 불안정함이 남아 있긴 했지만, 위험한 단계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는 그에게 달렸다. 공작 부인의 사망에 관해선…… 나중에 물을 기회가 있겠지.
악시온이 물러가자 이비엔은 기다렸단 듯 지안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일러주었다.
“잘 들어. 요행히 오늘 하루는 조용한 듯하지만, 곧 난리가 날 거야. 다들 널 찾으려 혈안이 될 거라고. 밤사이 널 가리켜 생긴 호칭도 있어.”
“호칭이라니요?”
“몰랐어? ‘성력 없는 성녀.’ 다들 널 그렇게 불러.”
낯부끄러운 칭호에 지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무지 맨정신으론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스물이 넘어 저런 호칭으로 불리다니, 창피와 자괴감이 동시에 들었다.
“성녀라니……. 저는 그런 게 아녜요.”
“부정한들 사실이야. 넌 이미 그렇게 불리고 있어. 성축일 당시 신전에 모여든 능력자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네가 축성 받으며 일으킨 기적 역시…….”
“전하. 그건 기적이 아니에요. 정말로 그건, 그냥 재각성일 뿐이었어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재각성이 뭔진 모르겠지만, 축성 받는 순간 네 힘이 터져 나오는 걸 느꼈어. 생각해 봐, 지안. 평소엔 그런 현상을 일으키지 않았잖아. 더구나 왜 하필 축성 받던 순간에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내게 된 거지?”
황녀의 지적에 지안은 할 말을 잃었다. 한낮에 눈이 내리는 듯했던 제도의 풍광을 기억하는 탓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설명할 길 없는 현상이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알 수도 없고.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안에겐 없는 확신이 이비엔에겐 있었다.
“사제들이 말하길, 네 힘은 성력이 아니지만, 네 힘을 제도에 퍼뜨린 건 성력의 작용이라 했어. 말인즉, 내겐 가이드나 성력 없는 성녀나 동일하게 들려.”
“사제들이 뭐라 말했든, 사실과 달라요.”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다름이 있든, 네겐 폭주로 죽어가는 능력자들을 구할 힘이 있어. 그런 네가 성녀라 불리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성녀로 불려야 한단 말이지?”
“전하. 그만 하세요. 저는 영웅도, 위인도 아니에요. 그런 건 감당할 수 없어요.”
“모르는구나. 제도의 능력자들에게 넌 이미 영웅이야. 바로 어제, 네가 한 일들을 생각해봐.”
“네. 제가 일을 저질렀죠. 후회하고 있어요.”
“후회라니? 다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땐 다른 선택을 할 테야?”
“그건…….”